알렉스는 내성적인 편이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한 편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즈음 변호사가 되었으니 35년 넘게 tax lawyer로 일해왔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에, 평소에는 하얀 피부이지만 붉은색으로 변하는 전형적인 영국계 백인의 얼굴이다.
내가 수습 변호사로 일할 때 알렉스는 그야말로 깐깐 대마왕이었다. 그때는 알렉스가 무서워서 앞에서 제대로 말도 못 꺼냈는데, 그의 펌에서 퇴사한 후 어쩌다 보니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만나 점심식사와 마티니 한잔을 즐긴다. 예전의 알렉스는 결코 함께 일하기 쉬운 상사는 아니었다. (내가 개업한 이유의 8할이 그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만난 지 십오 년이 넘은 지금, 옛날보다는 많이 순해지고 너그러워진 그가 가끔은 신기하다. 예전의 그는 늘 무언가에 화나 있는 것 같았고, 한 번씩 그의 스트레스가 최고점을 찍을 때면 사무실 분위기도 살얼음판이었다. 주니어들 뿐만 아니라 직원들 모두 조심조심 피해 다녔다. 변호사로서 그는 매우 꼼꼼하고, 쉬지 않고 공부하고, 끊임없이 리스크(risk)를 가늠하는 최고의 tax lawyer 임에 틀림없다. 이런 성격이 tax lawyer(세제 변호사)에게는 딱이다.
세제 변호사가 하는 일은?
먼저 회계사가 하는 일과 세제 변호사가 하는 일을 구분해보자. 회계사는 회계실무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세금보고 및 각종 보고(tax reporting & filing)를 도맡아 하고, 절세를 위한 플랜을 세우기도 하고. 회계사가 좀 더 실무에 가까운 일을 한다면, 세제 변호사는 절세를 위해 세워진 플랜을 다른 쪽에서 실현시키는 인물이다.
적당한 주식구조를 가진 법인을 세우고, 법인이 발행할 수 있는 각각의 주식 클래스에 알맞은 권리 및 제한을 붙여주고, 어떤 주식을 누구에게 얼마나 발행할지, 전략을 짜서 세법적으로 유리한 포지셔닝을 만들어 주는 역할이다. 꼭 절세가 아니더라도 세금 납부를 지연하는 (tax deferral) 여러 가지 전략을 짜고 실현시키기도 한다. 캐나다에서 많이 쓰이는 family trust (일종의 신탁)를 설립하거나 필요에 따라 자회사와 모회사를 포함한 multi-level 법인의 설계 또한 tax lawyer가 하는 일이다.
세법은 매우 복잡하고, 매년 조금씩, 또는 크게, 바뀐다. 복잡한 거미줄 같은 세법 속에서 절세방안을 기획하고 실현(implement)하는 일은 상당히 세밀한 작업이다. 세법 곳곳에 내재된 지뢰들을 재주 좋게 피해야 한다. 작은 실수나 간과가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기에 조심 또 조심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그에게 궁금했던 것들
고급 신발과 모자, 그리고 코트를 걸친 그는 어떤 집안에서 자랐을까? 집안에 변호사나 판사가 있나? 개천 용인가? 나는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어릴 때 공부 잘했어요? 부모님은 뭐하셨어요? 왜 법대를 갔어요? 집안에 법조인이 있었나요?" (영어는 경어가 없지만, 그냥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지금의 멀끔한 알렉스를 생각하면 tax lawyer가 아닌 그를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릴 때 그는 산간지방 시골에 살았다. 알렉스에게는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하나가 있는데 나이차 때문에 같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에 늘 혼자 걸어 다녔다고. 그가 살던 산간지방은 10월 말에 눈이 오기 시작해서 3월까지 눈이 사라지지 않는 동네였는데, 그때는 8살짜리 아이도 혼자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캐나다의 도시에는 혼자 걸어 다니는 초등학생들, 특히 저학년 초등학생들이 극히 드물다. 유괴나 성범죄가 무서워서 어린아이들도 무리 지어 다니거나, 부모나 보모가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어린 알렉스는 거의 1마일(1.6km)의 눈길을 헤치며 학교에 갔다고 한다. 눈 길을 걷다 친구를 만나거나, 동네 어른을 만나, 사탕 하나 얻어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고. 아빠는 자영업자였고, 엄마는 선생님이셨다. 아버지는 벨기에계, 어머니는 스코틀랜드계이나, 두 분 다 캐나다에서 출생하셨다. 알렉스의 조부가 이민 1세대이고 알렉스가 이민 3세대인 셈이다. 집안에 변호사는 없었고 (개천 용이 맞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동생들 중 여동생은 공부를 매우 잘했고, 남동생은 학업에 뜻이 없었다고.
시골에서 자라서 힘들었겠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내가 틀렸다. 알렉스는 그 시절이 너무나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부 때 까지는 의대를 가서 의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고향엔 자신의 모든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었고, 그냥 그곳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겨울에 눈을 헤치며 다니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레이크에 수영을 하러 가고, 낚시를 하고, 사냥을 하고. 그 생활이 너무 즐거웠다고...
(구두에 먼지 한 톨도 용납하지 않는 그가, 생선이라고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작고 예쁘게 썰어진 생선만 먹는 그가, 사냥과 낚시를 하는 모습이... 나는 상상되지 않았다.)
그런데 학부를 졸업할 때 즈음 의대에 입학 신청을 넣자 (생화학 전공이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나도 이과 출신 변호사다.) 의대에서 바로 합격통지를 보내지 않고 대기자 명단에 올린 것이다. 성적도 좋았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의대 합격통지를 받지 못하자 빡쳐서 실망해서, 법대를 알아봤단다. 아무 준비도 없이 법대 입학시험인 LSAT을 쳤는데 높은 점수를 받았고, 바로 같은 대학의 법대에 입학신청서를 냈다. 법대 합격통지를 받자마자 의대에 전화했단다. 나 법대 갈 거니까 대기자 명단에서 이름 빼라고. 나 의대 안 간다고. (뒤끝이 좀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