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눈물이 많은 아줌마다. 170cm가 넘는 큰 키에, 체격이 있는 편이지만, 팔다리가 길고 가늘어 치마가 잘 어울리는 수잔. 동그랗고 파란 눈에, 웃을 때 귀엽게 올라오는 광대, 동글한 턱, 그리고 자그마한 입술을 가진 네덜란드계 캐내디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1954년에 네덜란드에서 단짝 친구와 함께 배를 타고 캐나다로 이민 왔다. 캐나다 동부에 있는 섬, 뉴펀랜드(New Foundland)에 내려 천천히 서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처음 정착한 곳은 서부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인 밴쿠버 아일랜드. 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캐나다에 오니 사람들이 다 서쪽으로 가라고 했단다. 그 당시 그 동네에 큰 목재 공장이 있었는데 이미 캐나다에서자리를 잡은 지인들이 그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고.
일 년 정도 목재공장에서 일하다가,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 두고 온 연인을 데려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초등학교 동무였다 연인이 된 수잔의 엄마.)
밴쿠버 아일랜드 소도시에 정착한 젊은 네덜란드 이민자 부부는 캐나다에서 아들 셋, 딸 하나를 낳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에다 유일한 딸인 수잔은 어릴 때부터 세 오빠들의 과잉보호 아래서 자랐다고 한다. 남자애들이 무서워서 다가오질 못했다고. 큰오빠와 13살 차이니 그럴 만도 하다. (세계 어디나 오빠들은 비슷한가 보다.)
아버지는 따뜻하고, 부지런하고, 활발한 사람이었고, 엄마는 조용히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는 말 수가 적은 타입이었다. 그는 자녀들이 도시로 나가길 바랬다고 한다. 소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기에, 자녀들이 도시로 나가서 성공하길 바라셨던 것 같다.
큰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에 진학을 했고, 보험 쪽 일을 시작했다. 수잔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오자, 큰오빠는 아는 법무사 사무실에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그렇게 이 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벌써 30년 전이다. 그전에 법에 관련된 일을 한 경험도 없었고, 심지어 사무직 경력도 없었다. 자격증을 딴 것도 아니었다. 일하면서 배운 지식과, 노하우와, 경력이 바탕이 되어 paralegal(준법률가) 일을 하고 있다. 변호사의 업무를 서포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정확할 것 같다.
Paralegal이란?
로펌에서 변호사 외에 서포트를 하는 직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Paralegal ( 패러리걸)과Legal Assistant (리걸 어시스턴트).
Legal Assistant는 말 그래도 사무보조직에 가깝다. 대신해서 전화나 이메일 연락을 받고, 고객에게서 필요한 정보나 지시사항을 전달받거나, 복사하고, 스캔하고, 등등. 로펌이라는 특수성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Assistant 업무라고 할 수 있겠다.
Paralegal은 조금 더 전문적인 업종이다. 사무보조라기보다 변호사의 업무보조에 가깝다. 그리고 전분문야가 있다. 예를 들어 상해 전문 변호사의 패러리걸은 그쪽일만하고, 민사소송 패러리걸은 그것만, 부동산 패러리걸 (Conveyancer; 컨베연서 라고도 한다.) 은 그쪽 일만 한다. 서류 초안을 작성하고 협력업체나 고객 또는 상대편 로펌과 소통한다. 필요한 Search (서치; 조사)를 하기도 하고. 물론 모든 서류는 결국 변호사의 검토를 거친다.
Paralegal의 업무가 전문적인만큼, 한 분야를 하다가 다른 분야에 가기가 쉽지않다. 최근 캐나다 비씨주에서 경미한 교통사고로 인한 상해 보상 시스템을 "no fault system" (무책 주의)로 바꾸면서 상해 관련 일을 하던 많은 변호사들이 일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무책 주의는 아니지만, 여기에 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그들을 보조하던 패러리걸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분야로 가야 했다. 그나마 소송 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약간이나마 겹치는 부분이 있어 배움의 오르막이 좀 더 완만했겠지만, 회사법/상법/부동산법으로 넘어간 이들은 판이하게 다른 업무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눈물이 많은 수잔
수잔은 내가 아는 아줌마들 중에 가장 눈물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눈물 포인트를 잘 알고 있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거나, 울기 직전 눈빛만을 주고받고 도망간다. 이야기를 하다가 "나 울 것 같아" 하고 도망가는 식이다. 최근 들어 그녀의 눈물 버튼은 몇 년 전에 차례로 돌아가신 부모님이다. 그밖에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울컥하기도 하고, 청소년 하키팀이 교통사고로 참담하게 사망한 사고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하고. 나도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같이 울컥해서 둘 다 도망치는 사태가 발생한다.
나는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고, 뭐든 좀 과장되게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반면, 수잔은 여성스러운 목소리에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누구에게나 적당히 장단을 잘 맞춰주는 사람이다. 아마 나처럼 '약간 나대는 스타일'과 가장 잘 맞는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수잔을 알게 된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수잔의 남편과 두 아들도 그만큼 보았다. 수잔은 21살 때 만난 지금의 남편과 25살에 결혼을 해 두 아들을 낳았고 지금까지 오손도손 잘 살고 있다. (그렇다. 결혼의 의리를 잘 지키고 사는 캐내디언들도 많다.) 처음 만났을 때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수잔의 아들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큰아들은 대학교 3학년이 되었고, 작은 아들은 지금 하이스쿨 11학년 (고2)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