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는 185쯤 되는 훤칠한 키에 호남형의 백인 아저씨이다. 올해로 50살이 되었지만 건강해 보이는 체격 탓인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인상이다. 겉으로만 보면 그는 왠지 철없는 중년 남자일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속이 깊고 자기 일에 대한 집중도 또한 높은 사람이다. 해야 할 말은 대놓고 하고, 해야 하는 일은 미루지 않는다.
마크는Commcercial Realtor이다. 부동산 중개인인데 상업부동산을 주로 다룬다. 그중에서도 마크의 전문분야는 경공업이나 공장, 또는 물류창고 등등에 관련된 부동산이다 (부지와 건물을 사고팔거나 임대를 주는 일).
커머셜 리얼터 (Commercial Realtor) 란?
커머셜 리얼터(Commercial realtor)의 반대는 레지덴셜 리얼터(Residential Realtor)라고 할 수 있다.
먼저레지덴셜 리얼터는 주로 거주용 부동산을 다룬다. 아파트, 타운하우스, 주택 등등. 하지만 레지덴셜 리얼터 중에서도 거주용 부동산 외에 상가 유닛, 또는 사업체 매매까지 다루는 사람들도 있다. 거주용 부동산 매매는 거래량이 커머셜보다 확연히 많기 때문에 기회가 더 많다고 볼 수 도 있겠다. 물론 그만큼 많은 중개인들이 서로 경쟁을 하긴 하지만.
커머셜 리얼터는 말 그래도 상업용 부동산 매매 또는 임대를 다룬다. 상가건물, 공장, 상업용 부지, 몰, 오피스 건물, 등등. 매물의 단가가 높기 때문에 커미션의 금액도 큰 편이지만 중개인의 커미션 비율(%)만 놓고 본다면 레지덴셜보다 낮은 곳도 있다. (요즘은 거주용 부동산도 상가건물만큼 비싼 매물들이 꽤 있어서 일반화 하기는 어렵다. 또한 중개인의 통상적인 커미션 퍼센트는 각 주마다 조금씩 다르다.) 커머셜 부동산은 거래량이 적고 그나마 이루어지는 거래도 이미 존재하는 네트워크 안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상위 10%쯤 되는 커머셜 리얼 터들은 상업용 부동산 쪽으로 이름이 알려진 대형 펌에서 일을 하고 몇 명이 팀을 짜서 일한다.
나와 마크는 순전히 '일로 만난 사이'다. 오랜 고객의 절친이라 나와의 인연 또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하다 보니 어느새 마크와의 인연도 점점 쌓여갔다. 일로 만난 사이지만, 언젠가부터 편하게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아마도 그건 마크가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말에서 그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넌 언제 쉬어? 일 좀 그만하고 좀 쉬어."라는 염려 내지는, 내가 휴가를 다녀왔다고 하면 "잘했어. 시간을 내서 쉬고 온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라며 응원해준다든가.
그런 그에게 올해 예상치 못한 큰일이 터졌다. 그 일을 겪으며, 조금씩 달라진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겨울답지 않게 화창한 일요일 아침, 마크의 집에서 마크와 그의 아름다운 와이프를 만났다. 아무리 우리가 허심탄회한 사담을 가끔 나눈다고 해도 우리는 일로 만난 사이. 이번에 들어본 그의 스토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더드라마틱했다.
마크가 사는 동네는 꽤나 비싼 동네다. 원래도 (20-30년 전) 싼 동네는 아니었지만, 2000년을 넘어가면서 집값이 점점 올라서 이제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일반 중산층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그렇다. 나는 부동산에 예민하다. 특히 마크네 동네는 나도 어릴 때 왔다 갔다 하던 동네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이 동네 살아야지, 했던 동네다. 20년 전에 밀리언 아래쪽이었던 그 동네 집값이 이제는 평균 3 밀리언이 넘는 동네가 되었으니 나의 꿈은 저 멀리 연기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다.) 그가 다닌 고등학교 또한 부촌 한가운데 있는 학교이고.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기에, 나는 당연히 마크가 부모덕 좀 본 사람, 잘 사는 집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부모님이 어디서 오셨냐고 물었다. 그의 부모님도, 그의 조부모님도 모두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인터뷰 대상 중 처음으로 조부모까지 올라가도 이민의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다.) 친할아버지는 지역 병원에서 한자리를 하셨고, 이후에 보험 쪽에 종사하셨다. 아버지는 출판업을 하는 사업가셨다. 엄마는 심리학을 공부하셨고 임상심리사 일을 하셨다. 돈이 많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마크가 5살 정도 되었을 때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그 후, 마크와 여동생은 엄마와 아빠의 집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 모두 가까이 살고 있었고, 공동양육에 협조적이었기에, 큰 마찰 없이 아빠랑 있고 싶으면 아빠 집에, 엄마랑 있고 싶으면 엄마 집에, 그렇게 지냈다고 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마크는 장난을 많이 치는 개구쟁이였다고. 그때만 해도 학교가 가깝고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서 친구들과 함께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학교가 파하면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볐다. 떼를 지어 누군가의 집에 가서 놀거나, 바깥에서 놀거나. 그 만한 때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무언가를 만들거나 또는 부수거나, 하며.
열 살 때쯤 운동을 시작하면서 넘치는 에너지를 운동에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고도 덜 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똑같은 친구들과 (동네 친구들이자 학교 친구들) 한 팀에서 축구도 하고, 배구도 하고, 학교 육상 팀도 하고. 중학교 즈음 럭비를 시작했는데, 20대 초반까지 럭비는 계속했다. 친구들과 뛰고 구르는 게 마냥 좋았고, 럭비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럭비 하는 애들이 다 순하고 착하다고 마크는 말한다. 사실 운동하는 애들 중에 나쁜 애들은 별로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부모님들 마크가 당연히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을 하셨지만, 마크는 누구나 가는 길을 걷기가 싫었다. 알바로 돈을 좀 모은 후, 무작정 배낭여행을 떠났다. 처음에는 호주에 갔다. 거기서 한두 달 머물다가 중국으로 향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배낭 하나만 매고 도시에서 도시로, 시골에서 더 시골로 움직이며 중국을 돌아다녔다. 1991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지 겨우 2년 후였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폐쇄된 곳이었고, 백인을 처음 보는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마크는 중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곳엘 가도 누군가 그를 반겨주었다. 때로는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젊은 청년이었고, 때로는 말이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 동네 아저씨들이었다. 한두 사람과 어떻게든 소통을 하고 있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와서 앉고. 그렇게 진짜 중국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중국을 체험한 마크는 2년 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입국비자 기간을 꽉 채울 정도로 머물렀다. 비자에 기재된 체류기간이 끝날 때 즈음, 그는 북경으로 이동해서 기차를 타고 러시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탔다.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뭐라고? 진짜? 그 시절에?"라고 소리쳤다. 정말이지 대책 없는 젊음이 아닌가. 나는 그의 열정에 감탄했다.) 그는 그때 주량이 늘었다고 했다. 러시아인들과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12일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게 모스크바에 가서 거기서 또 몇 달을 지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Trans-Siberian Railroad)
러시아 서(西) 시베리아 지방의 첼랴빈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로 이 철도는 1850년대 극동지방의 군사적 의의(意義)의 증대, 시베리아 식민, 대(對) 중국 무역 등을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철도의 예정선은 종래의 시베리아 가도(街道)를 따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1887년에 조사를 시작하여 1891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착공하였으며 1916년에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시베리아 철도 [Trans-Siberian Railroad] (두산백과 두피 디아, 두산백과)
22살까지 그렇게 여행을 위해 살았다. 캐나다로 돌아와서 몇 달간 일해서 돈을 모으고, 여행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서 또 돈을 모으고, 다시 여행을 떠나고. 그 당시에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호텔 도어맨을 하기도 하고 (손님들이 귀엽다고 팁을 많이 줬다고 한다), 리무진 면허를 따서 리무진 운전도 하고, 대형버스 면허를 따서 버스 운전도 했다. 그 나이에 하기엔 충분히 즐거운 일이었다. 리무진을 몰면서 메탈리카를 만나기도 했고 (마크는 메탈리카가 자기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친절하고 예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역시 록커들이 착하다.) 한국 관광객들과 그들의 김치와 밥솥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를 몰고 록키산맥을 달리기도 했다.
22살이 됐을 때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문대학의 경영학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2년간 학교 근처 반지하방에서 살면서 공부를 했다. 학교를 다니던 중, 너무도 핫한 여자가 자꾸 눈에 띄었다. 그렇게 지금은 와이프가 된 아름다운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스물셋에 학교를 졸업했지만 불경기였고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마침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만난 친구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고, 와서 좀 도와달란 요청에 모스크바로 가서 네 달을 보냈다. 당시의 여자 친구이자 지금의 와이프에게 "거기가 좋으면 눌러 살 수도 있어" 말하고 떠났지만 네 달쯤 지나니 집으로 돌아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정착하고 어른처럼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4년간 여러 직장을 다녔다. 벤처캐피털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영화배급사도 다니고, 다 어느 정도 흥미롭긴 했지만,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다 27에 여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약간의 모아둔 돈과 아버지에게 빌린 돈과 은행 대출로 집을 샀고 집수리를 했다. 그래, 집 살 돈을 빌려줄 아버지가 있다는 것 만해도 어쩌면 흙수저는 아니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알았다며 자신의 변호사에게 전화하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은행과 같은 조건으로, 그러나 은행의 차순으로 집 담보 설정을 하고 매달 같은 이율로 원금+이자를 받아가셨다. 더럽고 치사해서 이 악물고 아버지 돈은 3년 만에 갚았다고. 난 왜 이게 웃긴지 모르겠지만, 좀 웃겼다. 막 결혼한 27살짜리 아들이 색시와 공동명의로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나라도 똑같이 할 것 같다.
첫째가 태어나고, 얼마 후 부인이 둘째를 임신했을 즈음, 그는 친구와 함께 동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업용 기계 같은 것들을 도소매로 파는 샵과 창고를 친구와 함께 인수할 생각이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일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물론 무임금으로. 그런데 네 달째에 접어들던 어느 날 아침, 출근을 해보니 창고며 가게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알고 보니 가게 주인이 정신병이 발현해서 밤사이에 자기 샵에 들어가 다 때려 부신 것이었다.).
'난 이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 돌이 지난 첫째, 곧 태어날 둘째, 모아둔 돈은 집 장만하는데 다 들어갔고, 네 달 동안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이 일에 매달린 터. 매달 내야 하는 은행 대출금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돈이 없어서 가지고 있던 차마저 팔았다. 나이 서른하나에 딸린 식구들은 2배로 불어났고먹고 죽을래도 돈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와이프에게 우린 망했다고 말하고 침대에 기어들어가 엉엉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