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봐도 멋있는 여자들이 있다. 첫눈에 '저 언니 멋있네' 하는 생각이 드는 여자. 리디아를 처음 만났을 때 이유 없이 그녀가 매력적이었고 친해질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예감 때문에 처음부터 허물없이 다가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64세가 된 리디아는 동네에서 작은 그릭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절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리디아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지고 있다. 40석 정도를 갖춘 작은 식당은 단골이 많은 동네 맛집이다. 리디아의 식당에 가기 전, 내가 가본 그리스 식당은 주로 (1) 오래되고 허름하고 청소 상태가 그저 그런 곳이거나 (2) 벨리댄스를 추는 여자가 테이블 주변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을 유혹하거나, 하는 곳이었다.
리디아의 식당은 작지만 청결하고 내부도 모던한 느낌이다. 일단 외부에 그리스풍 사인 (그리스 글자 같은 것이 들어갔다거나 하얀 바탕에 파란 글씨의 간판)이 전혀 없다. 그냥 힙한 동네 식당인가, 하고 들어가 보면 신선한 로컬 음식으로 만든 모던한 그릭 음식들이 메뉴를 채우고 있다.
사실 식당 운영 짬이 어마무시한 리디아다. 현재 운영 중인 그릭 식당을 낸 것은 5년 전이지만 근 40년간 여러 식당을 운영해 온 경력이 있다. 현재의 식당을 셋업 할 당시, 말은 못 했지만 나는 내심 걱정이 컸다. 위치가 좋은 곳도 아니었고, 다운타운처럼 유동인구가 많은 곳도 아니고, 근처에 직장인들은커녕 동네 사람들밖에 없는 주거지 한가운데에서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지난 3년간 그 자리에서 망해나간 비즈니스가 벌써 세네 개였다. 하지만 역시 변호사는 사업가가 아니다. 요식업가도 아니다. 식당 운영에 잔뼈가 굵은 그녀의 실력을 내가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녀는 누가 들어가도 망할 것 같던 자리에서 손님이 붐비는 맛집을 만들어냈다. 혼자 조용히 식사를 하러 갔던 요 근래, 6시 반쯤 되자 이미 식당이 꽉 차기 시작했다. 혼자서 2인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난 부랴부랴 일어섰다. 세계 어디에서나 음식점은 맛으로 승부한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실이다.
난 인물이 좋은 그녀의 아들도 만났고, 홀을 맡고 있는 넉살 좋은 남편도 만났다. 그녀의 가슴에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구멍을 남긴 딸은 만나지 못했지만. 리디아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자랐을까? 밥 먹으러 가서 리디아와 수다를 떨다가 궁금해졌다.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호탕하신 리디아 언니는 "그래, 쉬는 날 같이 밥 한번 먹자"라며 흔쾌히 응했다.
리디아가 자란 곳은 이 지역의 그리스인 밀집지역이었다. 동네에 그리스 식품점도 있고, 교회(그리스 정교회)도 있었고, 그리스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지금은 상당히 비싼 동네가 되어서, 그 동네에 살던 그리스계 캐내디언들은 많이 떠났다고 한다. (리디아의 생각에 따르면 요즘 집값이 너무 올라서 자식들이 내 집 장만하기가 힘든 탓이라고. 부모들이 중심지에 있는 집을 팔아 외곽으로 이사를 가야 남은 돈으로 자식들의 집 장만 비용을 대 줄 수 있다고.)
그리스에서 태어난 리디아는 1966년에 7살의 나이로 캐나다에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리스에서 재봉과 재단일을 하셨는데, 손재주가 좋은 편이셨다. 리디아의 아버지와 결혼해서 리디아를 낳고 그리스에서 그럭저럭 잘 살고 있었는데, 남편(리디아의 아버지)이 어느 날 캐나다에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캐나다로 가는 아버지를 배웅하러 나온 가족들
아버지는 그 당시, 택시운전이며 자동차 정비며, 돈 되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하셨다. 축구선수이기도 했지만, 축구로 식구들을 먹일 수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손님을 태웠는데, 그 손님이 자기는 캐나다에 갈 거라고 했단다. 캐나다? 거기 가면 좋아? 어떻게 가는데? 캐나다에서 이민자들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듣고 솔깃했던 아버지는 그 길로 이민 신청을 하러 간다. 아르헨티나와 캐나다, 두 나라에 이민 신청을 했는데 캐나다 이민 허가를 받게 되고, 아내와 딸을 두고 혼자배를 타고 캐나다로 왔다. (재미있게도 그때 그 손님을 나중에 캐나다에서 다시 만났다고 한다.) 리디아의 엄마는 그리스에 남아서 살고 싶었지만, 캐나다에 가서 남편과 함께 하라는 친정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얼마 후 7살 리디아와 함께 캐나다로 향했다.
리디아는 곧 캐나다의 동네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1966이니 ESL(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이들이 들어가는 반; English as Second Language)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그리스 소녀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친구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다가 수업 중 손을 들고 "peepee(쉬)"를 외친 뒤, 선생님이 화장실에 가라고 하면 죽어라고 달려서 집에 와버렸다고. 그렇게 매번 탈출을 시도하다 수두에 걸려 학교를 안 가게 돼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첫 학교에서는 전혀 적응을 하지 못했으나, 몇 달 후 그리스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집을 옮기고 전학을 가면서 생활이 달라졌다. 교회 친구들을(그리스 정교회) 학교에서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매일 같이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즐거웠다고. 어린 시절엔 역시 친구들과 노는 게 최고다.
그렇게 자라서 청소년이 된 리디아는 신나는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빠가 무서워서 나쁜 짓은 못했지만, 친구들과 소다 마시러 가고 춤추러 다니고 그랬다는데, 16살 어느 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 역시 그리스인이다.) 리디아보다 두 살 많은 남편이 "일요일에 뭐해? 만나자."라고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그녀는 그 당시에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다니!' 생각했다고 (그때는 어려서 생각이 없었다고 살짝 덧붙였다). 그렇게 사귀게 된 남자 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했고, 부모님은 남편을 꽤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한다. 그 후에 신기하게도 전에는 주어지지 않던 자유가 주어졌다. 지켜줄 남자가 옆에 있어서 그랬을까, 밤에 놀러 나가도 남편이랑 같이 나가면 부모님께서 크게 뭐라 하지 않으셨다. (원래 제일 가까운 놈이 제일 위험한 법인데...) 갑자기 성인이 된듯한 자유가 주어져서 너무 좋았다고 한다.
연애를 하다 고등학교를 마쳤고, 정신을 차려보니 일사천리로 결혼 날짜가 잡혀있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유부녀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당연히 대학에 갈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런 것들이 멀어졌다.
가난한 신혼부부는 리디아의 부모님께 $1200불을 빌려서 작은 피자가게를 인수했다. Take-out(포장) 장사만 하는 곳이었는데, 피자를 어떻게 만드는지도 모르고 시작했다. 좌충우돌을 거쳐 가게는 점점 자리를 잡았다. 부모님께 빌린 돈을 갚고, 돈을 모아서 집도 사고 애도 낳고. 돈이 좀 모이면 가게를 팔고, 좀 쉬고, 돈이 떨어져 가면 새로운 가게를 차리고, 또 장사를 하다가, 가게를 팔고, 또 쉬다가. 그러다 당시엔 그다지 번화하지 않았던 동네에 작은 카페 겸 다이너를 차렸다. 건물주도 너무 좋았고, 동네 단골들도 좋았다. 그렇게 한자리에서 17년 동안 장사를 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식당에 오던 코흘리개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동네 양아치들이 애아빠가 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 사이 리디아의 딸과 아들은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짓이야.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 돈이 다 떨어졌네? 그럼 저기 가서 장사하자. 실패할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될 거라고 믿고 덤비면 성공할 수밖에 없어."
리디아는 이렇게 말했지만, 아마 이게 다는 아닐 것이다. 덤벼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공할 때까지 덤볐기 때문이 아닐까?
딸과 아들은 성인이 되어 독립을 했지만 리디아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딸과는 일주일에 세네 번씩 만났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딸을 잃었다. 이제 겨우 30살이 된 딸을.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던 딸이었다. 아름답고, 재주도 많고, 머리도 좋은 딸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리디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버텼냐고.
리디아는 답했다.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아서 버텼고, 나중에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았는데 무너질 수도 없었다고. 하필 비보를 들었을 때 아들은 친구들과 여행 중이었고, 누나를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이 무너질까 자기라도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고. 그렇지만 더 이상 식당에 나갈 수도, 사람들을 볼 수도 없었다고.
뼈를 묻을 것 같았던 식당은 17년 만에 문을 닫았다.
시간은 흘렀고 리디아는 무언가 할 일이 필요했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를 알고 그녀의 슬픔을 아는 동네에서 다시 일을 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없는 다운타운의 식당을 인수했다. 직장인 점심 장사를 주로 하는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몇 년간 다시 돌아올 힘을 키운 것이 아닐까.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예전의 그 동네로 돌아왔다. 고맙게도 지금의 단골 중에는 예전 다이너의 단골들이 많다.
난 첫눈에 리디아가 강한 여자란 걸 알았다고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우리가 친해질 줄 알았다고.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강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약한 여자가 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그날 이후 리디아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고 했다. 차라리 술보다 낫다며 (캐나다에서 담배를 필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상담은 받아본 적 없다. 그녀가 원하는 건 딸이 살아 돌아오는 것인데, 그 누구도 그 건 해줄 수 없기에. 의대에 갈 줄 알았던 아들은 자기가 진정 원하는 걸 하겠다며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렇게 남은 리디아와, 그녀의 남편, 아들, 그리고 리디아의 부모님까지, 그녀의 가족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보듬고 산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한 꼭지 한 꼭지 써가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지. 내가 감히 이들의 인생을 이 짧은 글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오류다. 내가 담을 수 있는 건 단지 몇 장의 스냅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