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멋모르고 시작한 나의 회사생활은 다사다난했던 30대를 거쳐 40대에 이르러 잠시 멈춰 섰다. 열정과 체력이 골고루 넘치던 20대 시절 야근과 주말출근을 밥먹듯이 하며 맷집을 쌓아온 덕분에 30대에는 꽤 인정도 받고 성공도 맛볼 수 있었고 해외에 와서도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고 꾸역꾸역 버텨낼 수 있었다. 40대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생활에서 여러 고난이 닥치기도 했는데 결국 회사와 나의 인연을 끊어 내고 나서야 그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하튼 그 긴 세월 동안 하루 최소 8시간씩은 회사와 함께 했으니 어찌 보면 20대부터 40대까지 내 인생의 대부분은 회사생활이었던 셈이다. 새삼 회사원의 삶에서 회사를 분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내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 -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 의 많은 부분도 결국 회사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회사생활이 안겨준 희로애락의 순간들, 그 안의 일, 사람, 돈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회고가 될 것 같다.
지난 회사생활 중 가장 기쁜 순간을 꼽자면, 단연 내가 만든 서비스가 성공의 정점을 찍던 네 번째 회사시절을 꼽겠다. IT 업계의 회사원들은 어느 정도 공감하겠지만 하나의 온라인 서비스나 게임을 만드는 과정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테스터 등 제작팀이 각자의 역할을 최대치로 해내야지만 퀄리티 있는 서비스나 게임이 만들어질 수 있고 사업기획, 마케팅 등의 지원을 받아 더 많은 사용자의 선택을 받고 사용자가 그 서비스나 게임을 즐길수록 - 더 오래 머무르며 더 많은 돈을 쓸수록 - 성공한 작품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IT 업계 - 특히 B2C IT 업계 - 에는 회사원이지만 예술가적인 면모를 풍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본인이 제작에 참여한 온라인 서비스나 게임을 성공시키기 위한 노력과 집착이 예술가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온라인 서비스든 게임이든, 본인이 참여한 프로젝트로 성공한 타이틀을 갖는 건 그만큼 영예로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네 번째 회사에서 서비스 기획자로서 그 정점을 맛봤다. 내가 기획자로 참여한 모바일앱이 2016년경 글로벌 누적 사용자 3천만 명을 돌파하고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애플 앱스토어의 글로벌 누적매출 역대 2위와 10위를 차지하는 등, 영광스러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말고도 여러 명의 기획자가 있었고 디자이너와 개발자까지 합치면 거의 7-80명에 가까운 제작팀 멤버가 참여한 프로젝트였지만 내가 이 모바일앱을 기획하고 개발과정과 출시일정을 관리하고 운영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고 그 결과가 사용자들의 뜨거운 반응으로 나타났음에, 단순히 회사 일이 아닌 개인의 영광으로 느껴질 정도로 뿌듯했다. 성공한 모바일앱 기획자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에 더해 인센티브와 스톡옵션이라는 보상까지 따르니 그야말로 회사생활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의 절정이었다.
이후로는 이 정도의 성공을 맛본 적이 없어 여전히 그 시절을 리즈시절로 회상하게 되는 것이니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돌아보면 나는 이 네 번째 회사에서 가장 많이 성장했다. 주니어 기획자로 입사해 작은 소셜 기능 하나를 맡아 전전긍긍하며 내 기획을 시작해 점점 업무의 파이를 넓혔고 5년쯤 지나서는 전체 기능을 조율하고 먼저 나서서 이슈를 해결하고 그때그때 주니어들에게 적절한 조언해 줄 수 있는 시니어 기획자로 성장했다. 저절로 큰 건 아니고 보고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선배와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장이고 성공이었다. 좋은 팀을 만난 덕에 업무적으로 성장하고 함께 성공을 만들어냈지만, 그 성공을 경험하고 성장한 채로 옮겨간 다른 회사들에서, 내가 그 시절 내 동료나 선배만큼의 역할을 못해냈던 것은 아닐까 싶어 씁쓸하기도 한, 그런 후일담과 함께, 회사생활의 기쁨(喜)의 순간을 회상해 본다.
지난 회사들에서 겪은 크고 작은 빡침의 기억들은 이미 기억보정 버프를 받아 미화되어 버려서인지, 회사생활의 분노와 좌절의 시절을 꼽자면 가장 최근을 회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 대기업 전자회사의 해외법인인 마지막 회사에서는 최근까지 약 삼 년을 근무했다. 처음으로 IT 회사가 아닌 일반 대기업으로의 이직이었기에 내가 담당하는 IT 시스템의 위상이 회사의 ‘핵심제품’에서 회사의 주요 사업을 위한 ‘지원시스템’으로 달라졌고, 그래서 ‘제품개발부서’에서 ‘지원부서’로 소속이 바뀌긴 했지만 첫해는 비교적 무난히 지나갔다.
수난은 약 일 년 뒤부터 시작됐다. 2023년 9월 말 어느 날, 느닷없이 지원부서 산하 재무팀에 신설된 TF(Taskforce) 팀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같은 지원부서 소속이긴 하지만, 비즈니스 프로세스 개선과 IT 시스템 관리를 담당하던 혁신팀에서 회사의 재무지표를 관리하는 재무팀 산하 TF로 이동하라는 발령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반적인 조직개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나를 포함한 몇몇만. 내가 신입사원이었다면 여러 팀을 돌며 다양한 직무를 골고루 익혀 최적의 직무를 발견하라는 회사의 의도가 있었을 거라고 이해해보려 했겠지만, IT 업계에서 십수 년 넘게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성을 발휘해 달라는 기대를 안고 이직을 해 온 나에게 뜬금없이 재무팀으로 이동하라니, 회사를 나가라는 건가도 싶었다. 지원부서에서 재무, 회계, 총무, 위기관리 등 여러 기능을 두루 섭렵하며 십수 년간 수명의 임원을 겪어온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여기서는 흔한 일이라 했다. 담당 임원이 바뀌거나 연말 임원인사를 앞둔 시기에 갑자기 조직이 개편되거나 팀이 바뀌는 건 흔한 일이며 일단 하라는 일은 그냥 빨리 배워서 해내면 되는 것이라고, 다른 옵션은 없다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장기말처럼 다뤄지는 데서 오는 분노와 좌절은 이곳에서는 이해받지 못하는, 스스로 극복해 내야 하는, 다소 예민한 반응 정도로 치부될 뿐이었다.
발령 자체는 그래도 ‘인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일 좀 하는 직원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IT 시스템관리 업무보다는 신설 TF팀에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며 활약해 주길 기대한다고도 했다. 가슴속에 조용한 분노를 안고 그래도 긍정의 기운을 끌어올려 꾸역꾸역 버티고 노력하는 가운데 연말이 되었다. 나를 TF팀으로 발령 냈던 임원은 연말 정기 임원인사에서 갑자기 다른 나라로 떠났버렸다. 얼떨결에 TF팀은 해체되고 나는 원소속팀으로 복귀했다.
원소속팀에서 떠나 있던 3개월 사이 내가 맡아하던 일들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니게 되어, 복귀한 후로는 임시로 떨어지는 프로젝트성 업무나 각종 보고서 작업을 도맡아 했다. 한번 차출과 복귀를 겪고 나니, 원소속팀의 싱가포리안 팀장은 부서 내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내가 언제고 한국인 임원의 결정에 따라 또 다른 TF로 차출될 수 있는 인력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내 자리를 확고히 하려 주어지는 온갖 애매모호한 일들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다시금 원소속팀에서 자리 잡나 싶던 2024년 9월, 또 다른 임원에 의해 이번에는 소속법인 이동을 발령받았다. 역시나 다른 옵션은 없었다. 넌더리가 났다. 또다시 아무렇게나 다뤄지는 장기말이 된 처지에 서글펐고 이어서 화가 났다. 이 회사에 있다가는 매번 임원이나 주재원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다뤄질 것이 뻔했고 거기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잘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대기업 조직과 안 맞는구나를 인정해야 했다. 마음속으로 퇴사를 결심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옮겨간 법인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냥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나 보다. 회사를 나와서야 화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로 퇴사한 지 세 달 정도 지났고,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냉정히 내 분노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그 회사는 늘 그래왔을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 대기업이 그렇게 사람을 다루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이직 당시 조금 더 나은 처우와 연봉, 더 이상 ‘을'이 아닌 고객사 소속인 ‘갑’이 되어 일하고 싶은 치기, TOP 대기업의 네임밸류를 이력서에 추가해 보겠다는 안일한 생각에 애써 눈감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은 3년 동안 직무전환, 소속팀 이동, 소속법인 이동 등을 당하고 또 당하면서 다른 업계로 - IT 업계에서 전자업계로 - 의 이직, 회사의 주제품 개발부서에서 지원부서로의 이동 - IT회사의 제품개발부서에서 일반 대기업의 지원부서 - 을 가볍게 생각하고 이직한 대가를 혹독히 치렀다. 이제는 알았으니 됐고, 그 회사에서 나왔으니 됐다. 분노를 길게 끌고 갈 필요는 없다.
슬픔 같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과 회사생활 같은 지극히 공적인 영역이 겹쳐질 일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20대에 시작해 십수 년의 회사생활을 하면서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머금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별이 된 동료들을 떠올릴 때가 그렇다.
사회 초년생 무렵에 만난 어느 과장님이었다.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옆 팀이라 종종 마주쳤던, 맑고 밝은 얼굴의 과장님.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해 그 팀의 에이스로 꼽혔었고 당시 내 사수가 그분과 친분이 깊어 서비스 기획자로서 뭔가 막힐 때마다 종종 그 과장님께로 가 의견을 구하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사업팀, 디자인팀, 개발팀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마주치면, 같은 업계 같은 직군 후배를 응원의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주던 얼굴과 저녁에 운동하러 간다고 인사하고 나가시던 뒷모습도 기억난다. 같이 그 회사에 머물던 시간은 한 일 년 남짓이나 될까. 당시 IT 업계는 PC 중심에서 스마트폰 중심으로 전환되는 격변의 시기였고 스마트폰 시대에 맞는 모바일 서비스를 얼마나 빠르게 내놓느냐에 따라 IT 업계의 구도도 재편되고 있었다. 이직 시장도 활발히 움직였다. 모바일앱을 만들어 본 경험을 가진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가 아직 그리 많지 않은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경험 있는 사람들은 귀했다. 새롭게 열린 스마트폰 생태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도전을 위해 회사를 떠났고 나도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분도 나보다 몇 달 먼저 이직을 하셨다.
이직한 회사에서 신규 모바일앱 론칭을 담당하셨다고 들었다. 모두가 아직은 블루오션이었던 모바일앱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달리던 시절이긴 했지만, 과로였다고 한다. 출시 일정에 맞추기 위해, 이직 직후부터 연이은 야근과 철야로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다 어느 날 쓰러지셨다고 했다. 그리고 못 일어나셨다. 그 소식을 들은 건 그분이 이직하신 지 채 한 달이 안 됐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세상이 조금 무서워졌고 그분의 가족들과 그분과 친했던 내 사수, 맑고 밝았던 그분의 얼굴이 생각나서 한동안 마음이 쓰렸다.
이후로도 회사생활 중 공황장애를 겪고 크고 작은 지병이 도지거나 여러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다 결국 회사를 떠나시는 분들을 만나왔다. 하루 8시간 이상, 깨어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회사라는 공간에서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는 사람들과 머물며 격무에, 사람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없던 병도 생기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몸과 마음에서 이상신호를 줄 때는 회사고 뭐고를 떠나 일단 내 몸과 마음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걸 알지만, 막상 회사를 그만두거나 회사에 쉴 시간을 달라고 말할 용기를 내는 건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으니, 나밖에 모르는 내 몸과 마음의 고통을 괜히 입 밖으로 꺼냈다가 엄살떤다는 눈초리나 받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조금씩 그 고통을 드러내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 다행이다. 회사생활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낄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기쁨과 즐거움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른 감정이라고 한다. 기쁨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뤘을 때 그 결과에서 오는 성취감이나 행복을 의미하는 반면, 즐거움은 행위의 결과보다는 그 자체나 상태에서 오는 행복, 즉 보다 감각적인 쾌감을 의미한다.
회사생활에서 느낀 ‘기쁨’의 순간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자세히 서술했지만,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성공 즉, 업무적인 성취에서 대부분 비롯됐는데, 막상 그 성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소소한 ‘즐거움’들이 가득했던 것 같다. 결국 그 소소한 즐거움의 바탕 위에 성취를 이뤄내고 기쁨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지는, 한국에서 다녔던 네 번째 회사에서의 이야기다. 당시 팀 동료들 중에는 비슷한 개그코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IT 회사답게, 각종 게임과 대중문화에 찌든, 이른바 덕후들이 많아 관심사가 겹쳤고 당시 팀원 모두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에 걸쳐있어 나잇대도 비슷하다면 비슷했다. 매일 10 to 10 - 밤 10시까지 야근 후 다음날 오전 10시에 출근 - 을 하던 시절, 불과 12시간 만에 다시 만나 회사 카페에서 최근의 대중문화 이슈와 회사 내 이슈에 대해 썰을 풀며 잠을 깨거나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연이은 철야로 찌들 대로 찌든 가운데에서도 서로 더 웃기고 싶어 반가사상태로 이런저런 드립을 치던, 그렇게 함께 웃고 떠들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회식 때면 한데 어우러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는 몸개그로 누구는 입담으로 한바탕 개그쇼를 하고 삼사오오 모였다 흩어졌다 서로를 놀리고, 다음날 다 같이 회사 근처 평양냉면 집에서 해장을 하며 전날의 개그쇼를 복기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팀원 누구나 제 몫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는 업무적인 신뢰의 바탕이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다 함께 고생하고 있음을 알기에 서로 한 번이라도 더 웃겨주고 싶었던, 개그 욕심이 가득하고 유머를 사랑하던, 그래도 모두가 아직 2-30대였던, 그 시절의 그 동료들과의 즐거웠던 회사생활을 회상해 본다.
싱가포르에 와서는 정반대의 상황에서 회사생활의 즐거움을 발견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이야기다. 2020년 3월, 일곱 번째 회사로의 이직 첫날, 짧은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후 인사팀으로부터 전 직원이 내일부터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모두가 그랬겠지만 그 누구도 재택근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는 데다 나는 이제 갓 입사해 회사 시스템도 하나도 모르는 상태인데 재택근무를 하라니, 당혹스러웠다. 우여곡절 끝에 원격으로 인수인계를 받고 그로부터 약 2년을 재택근무를 하며 지냈다. 일단 출퇴근을 안 하니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싱가포르 락다운(lockdown) 기간에는 저녁 6시쯤 업무를 마치고 노트북을 닫고 가족 모두 집 근처 공원으로 나가 자전거를 타거나 뛰다 들어왔다. 남은 업무가 있으면 밤에 잠깐 노트북을 열었다. 락다운이 풀리고부터는 집 근처 요가센터에 등록해 일주일에 두세 번, 저녁 시간에 요가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업무와 일상을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저녁에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다. 영어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거나 일기를 쓰는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를 충전했고 아이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일하는 엄마로서 늘 느끼던 막연한 죄책감에서도 해방되었다. 왕복 2시간의 출근시간 + 1시간의 출퇴근 준비시간, 총 3시간 정도가 온전히 내 시간으로 다시 주어졌을 뿐인데 생활의 질이 확연히 달라졌다. 평일엔 회사 다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다른 게 하나도 없던 모 아니면 도의 각박한 삶에서 회사생활과 개인생활이 균형을 이루는 삶으로,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이던 삶의 형태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한다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회사를 다닐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해 줬던, 코로나라는 유래없는 인류 대재난의 시기에 역설적으로 발견한, 그래서인지 단 2년 간만 누릴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소소한 즐거움을 회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