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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다음 스프린트(Sprint)를 계획하며

by Aaaaana

지난 회사생활 전체를 돌아보는 큰 회고를 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에서 출발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엉켜있던, 그간의 경험과 감정을 비로소 하나의 글로 정돈해 볼 수 있었다. 특히 회사생활을 지속하게 해주는 동력으로써 일, 사람, 돈이라는 세 가지 축에서 돌아본 지난 나의 회사생활은 여러 실수와 좌절 가운데서도 매 순간 나름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 온, 아쉬움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더 후하게 말하자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남는 아쉬움은 이런 것들이다.


- 일 : 기술을 통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서 일의 의미를 찾으며 IT 업계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했으나,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내 안에서 그 의미가 점점 희석되어 갔음을 인정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찾기보다는 그저 이름이 알려진 회사를 찾아 옮겨다닌 것도 같다. 나 스스로 기술을 통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과 점점 멀어져 놓고 언젠가부터는 회사 일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고, 쓸데없는 걸 시킨다고, 왜 이런 걸 시키는지 모르겠다고, 습관적으로 회사를 탓하기도 했다. 회사와 나라는 대등한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회사 탓만 했던 순간들에, 씁쓸한 아쉬움이 남는다.


- 사람 : 내가 만난 일잘러들, 각자의 강점이 확실했던 보스들, 그 밖의 수많은 동료들에게서 발견한 배움의 순간들에 감사한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불도저 같은 추진력, 무쇠 같은 인내와 끈기, 영리한 눈치와 전략, 따뜻한 포용력, 무거운 책임감, 솔직한 자기 고백, 믿음직한 리더십, 편안한 여유와 유머, 명쾌한 소통능력과 아름다운 문서스킬까지, 그저 옆에 머물렀던 것만으로 그들의 업무능력과 삶의 지혜를 공짜로 얻었다. 반면에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돌아본다. 나는 어떤 회사원이었나. 일은 꽤나 성실히 해왔지만 그저 그게 다였던 건 아닐까. 남의 눈의 티는 발견해 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했던, 회사원으로서 부족했던 나에게 아쉬움이 남는다.


- 돈 :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겉으로는 돈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자세로 회사생활을 해왔다. 돈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다. 그러다 보니 전략적으로 연봉협상을 하거나 근로소득을 불리려는 노력 없이 그저 통장에 월급이 꽂히면 적당히 쓰고 남는 건 저축하는 식으로 살아왔다. 내 노동의 대가이자 인정과 보상인 돈을 소홀히 대한 것이다. 운 좋게도 여덟 곳의 회사를 다니는 동안 두 회사가 각각 상장을 한 덕분에 한 번은 우리 사주로, 한 번은 스톡옵션으로 조금은 특별한 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돈과 관련한 내 운을 다 썼는지도 모르겠다. 받는 만큼 일하는 데에만 집중한 나머지 내가 받은 돈의 가치를 어떻게 더 키워나갈 것인지 소홀했던, 돈에 무지했던 그 시간들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 아쉬움들을 회사생활을 통해 만회할 기회가 다시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쉬움은 그저 아쉬움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지난 십수 년의 회사생활을 치열하게 회고했으니 이제는 이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다음 스프린트를 계획할 차례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세상에서 주어진 목표대로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시절 진로를 한번 비틀기는 했지만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작한 회사생활에서는 회사에서 주어지는 목표를 달성하고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또 열심히 일했다. ‘일'에서 성취도 느끼고 ‘사람'들 속에서 배우기도 하고 ‘돈'도 벌어 어느 정도 생활기반을 다졌으니 감사할 일이지만, 늘 밖에서 주어지는 목표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회사원 생활이었다. 퇴사한 지 세 달, 이직할 곳을 정해놓지 않고 마주한 이 생경한 자유 앞에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만의 목표를 세우는 다음 스프린트를 계획하고 있다.


아무 계획 없이 퇴사했다고는 하나 러프하게나마 6개월로 정해두었다. 내가 가질 안식기(Gap Year) 말이다. 6개월 후 이 안식기를 다시금 회고하며, 회사원으로 돌아갈지 무한한 자유를 나만의 계획으로 가득 채우는 이 생활을 이어갈지 판단하려고 한다.


퇴사 후 지난 세 달간은 그저 아침에 일어나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온전히 나 스스로, 아무 부담 없이 결정하고 실행하는 자유를 만끽했다. 우선은 그동안 회사 핑계를 대며 못했던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하나하나 해보고 있는 중이다. 운동, 글쓰기, 책 읽기, 영어공부 등, 회사를 그만두고 해야 할 만큼 특별한 건 아니지만 지난 몇 년간 변함없이 늘 하고 싶었으나 회사 핑계로 꾸준히 하지 못한 것들 말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것들을 정말로 날마다, 꽤 바쁘게 하고 있다. 아침에 눈뜨면 뛰러 나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1-2시간 동안 땀을 흘린다. 씻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영어공부를 한다. 인문, 에세이, 소설, 지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올해 읽을 책 50권의 목록을 작성해 놓고 하나하나 읽는 중인데, 다 읽고 나면 간단한 요약이나 감상이라도 글 형태로 남기고 있다. 오랜만에 읽는 두꺼운 인문서는 예전만큼 속도가 붙지 않아 고민이지만,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뇌 근육을 다시 트레이닝한다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있다. 영어공부는 그동안 고군분투해 왔던 만큼 이왕 해외생활을 시작했으니 끝장을 보기 위해서다. 요즘은 원서 소리 내서 읽기를 시도 중이고 회사생활을 하며 만난 외국인 동료들과도 종종 연락하며 스피킹 감각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대망의 글쓰기. 늘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뭘 써야 할지 막막했던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일단 내 이야기를 글로 써보자는 소박한 목표로 지난 회사생활을 회고하는 이 글을 일주일에 한두 편씩 두 달간 꾸준히 써왔다. 연말에는 픽션을 포함한 다른 형태의 글쓰기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회사원이 되기 전 정말 친했던 ‘글쓰기’라는 친구와 다시 친해지는 요즘이다.


한편, 최신 기술 트렌드에 관심을 끊을 수 없는 테크업계 덕후의 습성에 따라 최근에는 프리랜서로 한 AI 개발사의 AI 언어 모델 개발 관련 업무를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 없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일한 만큼 페이를 받는 프리랜서 형태가 아직 낯설지만, 코로나 시절 느꼈던 ‘시간을 조절해서 쓸 수 있는 재택근무가 주는 즐거움’과 최근 테크업계의 화두인 ‘AI의 개발 과정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두 가지 면에서 흥미진진하게 도전해보고 있다. AI라는 미지의 생태계의 초입에서 AI가 내린 답을 사람의 시선으로 다시 점검하며 AI의 언어 모델을 정교화하는 이 일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듯 흥미롭다. 이전 회사에서는 AI 관련 업무를 할 기회도 없었고 사내 보안 문제로 시중의 AI 서비스를 업무에 직접 적용하기도 어려웠는데, 회사 밖을 나온 만큼 다양한 AI 툴을 써보면서 개인적으로도 몇 가지 AI 프로젝트를 시도해보고 싶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계획은 가득하고 나는 자유로우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안식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회사생활 전체를 회고하는 동안 깨달은 것은 나는 회사를 참 싫어했지만 좋아하기도 했고 회사를 원망하면서도 감사해했고 회사생활에서 늘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퇴사하는 순간에는 홀가분했지만 문득 아쉽기도 했던, 어쩌면 회사와는 그런 애증의 관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회고의 글을 쓰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회사에 대해, 또 나라는 회사원에 대해 많이, 오래, 깊게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지난 십수 년의 회사생활 중에 알게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쌓여있던 앙금, 후회, 분노, 좌절, 트라우마 등,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지난 회사생활을 회고하는 글을 하나하나 쓰다 보니, 이제야 비로소 그것들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벗어남을 느낀다. 왠지 모를 용기와 자신감이 솟는다. 당분간은 매일매일이 아까울 만큼 이 자유를 누리며, 다음 스프린트를 충실히 계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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