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지음, 창비, 2025년 3월 28일 발행
2025년 10월에 읽음
[혼모노]는 동명의 단편 '혼모노'를 비롯한 7개의 단편을 엮은 성해나의 소설집이다.
성해나 작가의 글은 처음이었는데 단편 하나하나가 다시금 곱씹으며 읽고 싶을만큼 좋았다.
먼저 '혼모노'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혼모노’란 일본어로 ‘진짜’를 뜻하는 단어 ‘本物’(ほんもの)의 음차 표기로, 한때 인터넷상에서 ‘진상’이나 ‘오타쿠’를 조롱하는 신조어로 사용되며 널리 알려졌다. 작가가 한 인터뷰를 통해 본디 긍정적인 뜻을 지닌 이 단어가 변질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거짓일지라도 다수가 믿으면 진실이 되어버리는 지금의 시대상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듯, 이 소설집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진짜’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 교보문고 서평 中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는 제목처럼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작품집이다. 무속, 팬덤, 가족, 건축, 예술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인간의 불안한 정체성과 관계의 허위를 드러내며, 현실과 허구,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소설집의 첫번째 단편이다. 화자는 김곤이라는 유명 감독의 팬으로 그 감독이 촬영장에서 어린 배우를 함부로 대했다는 논란에 휩싸이자 일말의 의심을 품지만 여전히 그를 옹호한다. 화자는 '길티 클럽'이라는 이름의, 김곤 감독의 찐 팬만 초대받을 수 있는 비밀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활동하며 오프라인 정모에도 참여하지만, 영화학도나 시네필들이 모여 자기들끼만 통하는 현학적인 얘기를 나누며 은근히 본인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끝까지 김곤을 옹호하고 새 영화 GV에도 꽃다발을 들고 참석하지만, 김곤이 해치우듯 지난 논란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순간 지독히도 못만든 영화의 엔딩을 본듯, 허무해진다. 팬덤의 윤리와 개인 감정의 모순을 드러낸 작품.
"그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가던 길에 모럴의 뜻을 검색해보았다.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정신적 태도.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의 구분에 관한 태도. 뜻도 모르고 지껄인 게 분명했지만 내게 적용해보면 완전히 잘못 쓴 것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무엇이 좋고 싫은지, 옳고 그른지 깊게 따지고 들지 못했으니까. 나에게는 태도랄 게 없었다. 그 사람의 허울뿐인 고상함이 지긋지긋하기도 했지만 그 사람과 있을 때 체감되는 나의 무지와 단순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p.18
"방금 전의 일들이 다 허구 같았다. 펑, 무언가 터지던 순간도, 그 순간의 감정도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허구 아닐까 하는, 내가 실패한 영화를 한편 본 게 아닐까 하는. 별 반개도 아까울 만큼의 너절한 서사. 치덕치덕 바른 클리계. 질문도 남지 않고 더할 말도 없는 싸구려 엔딩. 감독이 지고 만 영화.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영화. 그렇게 지독히도 못 만든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 p.63
두번째 단편. 제목 '스무드(Smooth)'는 소설 속 주인공인 한국계 미국인 듀이가 전시를 진행하는 작품의 이름. 이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낯선 땅 한국에 온 듀이는 종로에서 태극기 집회에 휩쓸려 그들의 '축제' 현장에 참여한다. 핸드폰 충전도 하고 밥도 얻어먹고 선물까지 받는 등, 그들의 '환대'에 그에게는 타국이었던 '한국'에 대한 경계가 풀린다. 여러 잘못된 정보들이 그 환대 속에서 흘러들어오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한국이라는 나라에 마음을 여는 아이러니를 그렸다.
세번째 단편이자 소설집의 제목. 노년의 무당 박수는 자신을 떠난 신 ‘장수 할멈’이 이제는 젊은 무당 ‘신애기’에게로 옮겨갔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이 ‘가짜’가 된 것 같은 절망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지만, 결국 신의 존재와 인간의 믿음 사이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선다. 박수가 정치인 황보를 위해 준비하던 굿이 결국 신애기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 속상해하지만, 신애기가 차려놓은 굿판에 가 그냥 작두를 타버린다. 진짜와 가짜를 넘어, 그저 믿으며. 작두 위에서 그의 장삼은 피로 물들지만, 그의 믿음만큼은 신애기와 장수 할멈 마저도 나가 떨어질만큼 확고하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가짜도 믿으면 진짜가 되는, 마지막 굿 장면이 압권이다.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장삼이 붉게 젖어든다. 무령을 흔든다. 잘랑거리는 무령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가볍고도 묵직하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작두에서 내려오지 않던 신애기가 아연실색하며 나가떨어진다. 그애는 바닥에 주저앉아 휘둥그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황보와 그의 가족도 기도를 멈추고 나를 올려본다. 할멈도 이 장관을 다 지켜보고 있겠지.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 p.397
건축가 여재화는 '구'의 집이라 불리는 건물의 설계에 관여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국책 사업을 비판하던 스승 Y가 자의반 타의반 해외로 떠난 후 여러 국책 사업을 도맡아 하던 여재화는 그 중 하나인 갈월동 고문시설의 건축을 제자 구보승에게 맡겼었다. 구보승은 창조적이거나 대담하지는 않았지만 유난히 합리적이고 도식적인 건축을 하는 제자였고, 그의 스타일대로 갈월동 98번지의 건물도 철저히 목적에 맡겨 설계한다. 고문을 받을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집중한 것. 구보승의 건축을 보며 인간을 위한 건축이란 무엇인가 자문하는 여재화. 갈월동 98번지 건물의 건축에는 끝내 구보승의 이름만을 남긴다. 공간과 역사, 죄의 기억을 결합한 단편.
"제 생각에, 이 공간엔 창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피조사자가 유리를 깨고 밖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고 자칫 비명이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이 생기잖습니까." -p.193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p.205
"아니야. 여긴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야. 난...... 그런 걸 가르친 적 없어." - p.206
회사 내 동료 간의 ‘호의’와 ‘감정 노동’을 다룬 이야기. 겉으로는 따뜻한 인간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계산과 기대, 상호 이용의 감정이 얽혀 있다. 현대 직장 사회의 감정적 피로와 인간관계의 허위를 드러내는 단편.
"외따로 떨어지거나 적응을 못하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은 내 오랜 습관이없다." -p.221
주인공은 딸 서진을 부족함 하나 없이 그때그때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며, 딸의 인생을 설계해주며, 애지중지 키워왔다. 그 과정에서 시아버지와 늘 부딪혔는데, 시아버지도 주인공 못지 않게 손녀딸 인생의 중요한 선택 - 태어날 병원, 초등학교, 유학, 대학, 결혼 - 마다, 본인의 선택대로 밀어부치려 했기 때문. 그 갈등은 임신한 서진이 한국에서 아이를 낳느냐 미국에서 낳느냐를 놓고 절정에 달한다. 주인공, 시부, 서진 개성강한 세 명의 캐릭터가 잘 묘사되어 핏줄과 여성의 정체성, 가족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드러낸 작품.
"미안해하지도 겸연쩍어하지도 않고 내 돈을 거리낌 없이 쓰는 아이. 나는 이것을 사치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욕도 아니지. 이 아이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누릴 뿐이다. 자연스럽고 기껍게." -p.263
"기억이라는 건 쉽게 미화되고 변질되며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려 여지를 만든다는 것을, 그 가능성을 믿고 다가갔다간 금세 후회한다는 것을 일전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p.311
젊은 시절 메탈 음악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각자의 현실 속에서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음악이 상징하는 자유와 이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현재를 마주하며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 청춘의 열정과 현실의 냉소가 교차하는 서정적 단편.
"우림이 메탈을 논하거나 과거를 들출 때마다 친구들은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p.349
"부엉이는 성급히 날아오르지 않는다. 날갯짓을 하기 전 충분히 주변을 살피고, 신중히 방향을 정한 뒤 착지한다. 나 역시 예리한 발톱으로 문장을 낚고, 너른 시선으로 사회의 아픔을 포착하며 열린 귀로 멀리 떨어진 이들의 이야기까지 경청하고 싶다." -p.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