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승자박
소리를 지르면서 소리 지르지 마!라고 할 순 없다.
24년 2월 24일
하이가 많이 자랐다. 서운할 때는 삐진듯한 표정도 짓고 배고플 때는 냉장고도 열어 달라고 하고 냠냠을 말하기도 한다. 졸릴 때는 자는 방에 와서 같이 눕자고 나를 잡아끌고 끙가를 했을 땐 기저귀 부분을 자꾸 만진다.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오빠들이 하는 행동을 많이 보고 배운 것도 있을 테고 가족들이 해온 행동을 보고 이럴 땐 이러는구나 알게 된 것도 있겠지. 기분이 좋을 땐 흥얼거리며 춤을 추기도 하는데 기분이 나쁠 때는 소리를 지르는 모습 까지도 닮아버렸다. 좋은 모습만을 취사선택해서 학습하는 아이는 없다. 그래서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하이에게는 보고 배울 부모 격인 선배가 넷이나 있어서 네 가족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영향을 받아 성장 중이다.
'만화의 집'에 놀러 가려고 집을 나서자고 한 참이다. 하이는 애니메이션 센터에서 놀고 준형이는 학습만화를 읽을 것이고 가온이는 dvd시청이 목적이다. 모두가 만족할만한 장소로 손색이 없어 외출복으로 갈아입자고 준비땅! 이 외쳐진 상태다. 하이는 물론 가서야 잘 놀겠지만 요즘 같은 방학 철에 왠지 외출을 귀찮아했다. 추운 것도, 마음껏 가고 싶은 데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싫었나 보다. 두꺼운 옷에 시야가 가리기도 하는 점도. 옷 입는데 한참이 걸리는 것도. 그러고 보니 하이에게 외출은 꽤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각자 자기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오빠들과 달리 하이는 가온이 방에 들어가 레고를 만지작 거리며 옷 입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가온이는 그런 하이가 불편했다.
내 방에서 나가.
요구를 하지만 하이는 그 방을 가온이 방이고 입장에 허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보인다. 평소 문을 잘 닫아두는 준형이와 달리 가온이는 언제나 문을 열어두고 자주 드나들었던 방이니 그럴 수밖에.
오빠!
하고 앙칼지게 대답하며 나한테 왜 그래!라는 거절의 의미를 전달한다. 가온이는 아마도 자기 방이니 나가달라는 요구가 너무나 정당한데 자기에게 먼저 소리를 지르는 하이가 못마땅했다.
왜?!?!!!!!!!!! 나가라고!!
라고 다시 소리를 친다. 남편은 그런 가온이를 두고 봐주지 않는다.
가온아!!
한마디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가온이가 옷가지를 들고 안방으로 건너와 옷을 입는다. 씩씩대며 나간 오빠가 뭐가 좋다고 하이는 또 안방으로 따라 들어간다.
왜!!!! 네가 내 방에서 레고를 만져도 내가 나왔잖아. 비켜줬잖아! 그런데 왜 또 따라와 왜애!!
가온이가 동생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다. 다시 주말 등산을 시작해야 할까 보다. 하지만 남편은 다른 면에서 화가났다. 내가 한번 소리치지 말라고 했는데 또 소리르 쳤다고 화가 난 모양이다.
소리치지 말랬잖아. 나가지 마. 옷 갈아입지 마!!!!
똑 같이 소리를 치면서 가온이에게 뭐라 한다. 그러곤 옷방에 들어가 외출복을 벗더니 주저앉는다. 가온이는 이번에는 일그러진 얼굴로 씩씩대지 않고 운다. 나는 바로 들어가 개입을 하기가 어려워 좀 더 지켜본다. 하이랑 준형이는 아직도 외출복을 입고 외출할 생각에 들뜬 분위기다.
잠시 뒤 눈물을 얼굴에 묻힌 채 가온이가 나와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하이랑 준형이를 먼저 안아 무서웠지? 속상하다 그치. 하고 다독인 다음 가온아 가온이도 이리 와. 하고 안아주려 하는데 거부한다. 혼자 망연자실한 듯이 기분 나쁜 듯이 난 상처받았어 같은 표정을 짓고 앉아있다.
가온아 무서웠지? 속상했어? 왜 무슨 일이야
응 속상했어. 내가 옷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하이가 자꾸 따라오잖아. 그래서 내 방에서 나가라고도 하고 저리 가라는데 안 가서 소리를 질렀어. 그랬더니 아빠도 소리를 질렀어 으앙..
그래 그랬구나. 하이가 가온이 옷 입는데 불편하게 하는데 엄마가 막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는 하이가 금방 엄마한테 와서 옷 입을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 다음엔 가온이가 소리 지르기 전에 가서 하이를 데리고 나올게. 그럼 이제 정리된 건가? 우리 왜 안 나가고 이러고 있지?
그건 내가 나가서도 하이에게 소리를 지를까 봐 아빠가 나가지 말자고 하신 거야.
그래? 그럼 이제 소리 안 지르겠다고 얘기하면 어때?
그럴 수는 없겠어.
왜?
내가 하이한테 소리 지른 건 잘못한 게 맞지만 아빠도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잘못을 했어. 지금은 하이에게 사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 이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이는 꽤 분명하고 명료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앞뒤 상황을 물어보면 얘기를 잘해주지만 분명한 건 아빠가 나에게 소리를 질렀고 나는 하이에게 소리를 질렀으니 아빠는 나에게, 나는 하이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직 사과를 받지 못해서 기분이 안 풀리니 사과할 마음의 그릇에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어른이라서 그런지 생각회로가 달랐다. 아빠가 가온이에게 화를 냈다.-> 가온이가 아빠에게 뭔가 잘못을 했다. --> 아빠 앞으로는 그렇게 안 할게요.라는 상황을 예상했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가온이는 아빠가 자기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온이 논리에는 틀림이 없었다. ㅎㅎㅎㅎ 아빠가 한번 소리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동생에게 또 소리친 죄는 사라졌다. 왜? 아빠도 나에게 소리를 쳤으니까. 그걸 어떻게 뭐라 할 수 있을까. 아빠가.
이 대화가 남편이 있는 옷방에도 분명 들렸을 것이다. 남편도 어른인지라 생각회로가 그렇게 돌아갔던 것 같다.
가온이 너 이리 와! 뭐? 아빠가 너한테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아빠도 저한테 소리쳤잖아요!
2차전이 다시 불붙으려 하고 있다. 아.. 더는 남편이 아이들 앞에서 후회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개입해야겠다. 가온이가 울며 거실로 나오고 나는 티브이를 켜줬다.
하이가 엄마를 찾아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의 대화가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8살, 5살에게 뽀로로는 100만 번 봤을 법이지만 동생을 위해 양보해 준다.
방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얘기했다.
가온이 논리에 틀린 점이 뭐가 있어? 당신이 소리를 치면서 동생에게 소리치지 말란 말은 가당키나 한 소리야? 너무 모순되잖아. 가온이는 이미 알고 있어 소리치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기는 하이에게 아빠는 자기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지. 더구나 하이가 가온이 방에 들어왔을 때 가온이가 나가라고 한말을 듣고도 그 방에 같이 있고도 당신은 아무런 행동을 안 했잖아. 하이를 방에서 데리고 나가기를 했어. 하이야 하지 마라고 제지하기를 했어. 가온이가 자기 방에서 나가달라고 한 요구는 정당한 요구 아니야?
당신이 요즘 들어서 예전보다 감정표현을 더 잘하는 건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 너무 묻어두고 삭히는 감정은 발효돼서 애초에 뭣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게 다른 형태로 원망이나 억울함만 남아. 그래서 담아두지 않고 그때그때 풀려는 시도는 좋지만 지금은 봐. 애들 눈에 당신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봐.
그리고 소리를 쳤는데 왜 갑자기 나가려던 외출을 막아? 넌 소리 지르는 애니까 밖에 나가지도 말라는 거야? 이게 벌이야? 벌은 애를 괴롭히는 게 벌인 거야? 너는 나쁜 아이니까 이런 즐거움을 가질 수 없어 그런 거야? 내 생각에는 소리를 지르는 행동을 했을 땐 진짜 훈육이 하고 싶었다면 말로 뭐라고 해라, 말을 못하는 아이라면 옆에 내가 있었으니 '아빠 하이가 제 레고 못 만지게 데리고 나가주세요.'라고 요구를 해라. 라던지 소리 지르기 말고 다른 어떤 행동을 하면 좋았을지 제안을 해주던가.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벽 보고 서 있으라는 벌이 맞지. 개연성도 없이 왜 나가지 말라는 건데? 가온이는 혼자 해석했잖아. 나가서도 자기가 하이에게 소리를 지를까 봐 못 나가게 한대. 그래? 아니잖아. 나가서 언제 가온이가 소리를 질렀어. 다시 생각해 보고 행동해.
그러곤 거실로 나왔더니 하이는 뽀로로를 보고 있고 큰 녀석들은 식탁에 탁구를 차려놨다. 골인지점을 만들어 골인하는 색다른 방식의 탁구였지만 아이들의 회복 탄력성이나 감정회복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다. 어른이 돼서도 잃지 않았으면 싶다 할 정도로..
그리고는 곧이어 뒤따라 나온 남편이 가온이에게 사과를 한다.
아빠가 가온이에게 소리 질러서 미안해.
벌써 형아랑 탁구를 하면서 키득대던 가온이는 네, 괜찮아요. 한다. 눈짓으로 하이에게도 사과해. 하자, 가온이도 하이를 안아준다. 그리고는 잽싸게 내 옆으로 와서 묻는다.
엄마, 아빠한테 뭐라고 말해서 아빠가 사과한 거예요? 네?
엥? 엄마가 뭐라 하긴.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닌데. 가르쳐주세요~~~
엄마가 뭐라 하긴.. 아이이이이잉!!!! 사과해앵~~~~~~! 요랬지?! ㅋㅋㅋㅋㅋ
아이들이 배꼽 빠지게 웃으면서 따라 한다.
아이이이잉!! 아이들에게 가르친 적이 있다. 방을 치우라고 화내면서 말하기보다는 부탁을 하면 훨씬 상대방이 네 요구를 잘 들어준다고. 거절하기 어렵게 애교까지 섞으면 100%라고. 아이들이 서로에게 계속 아잉~~~~! 을 연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