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증오하는 할머니로 인해 아빠를 은연중에,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워했던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친가 쪽 사람들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릴 적, 할머니는 엄마에게 좋은 소리 한번 하지 않던 일만 시키던 나쁜 시어머니였다. 당연히 우리 엄마를 괴롭히는 사람은 어린 시절 나에겐 악당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셨다.
그 이유에서인지, 늘 할머니는 내 이름을 헷갈리셨다. 추석, 설, 제삿날 꼬박꼬박 보아왔지만 나를 만날 때마다 내 이름을 물어보셨고, 이름뿐만 아니라 내 나이도, 그냥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셨다. 알고 싶지도 않으신 것 같았다.
그게 참 서러웠다. 명절이 지나고 학교에 가면 할머니댁에 가서 할머니와 어딘가에 놀러 갔다 온 친구들의 이야기, 할머니에게 선물을 받은 이야기 등등 할머니와 친하게 잘 지내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에겐 그저 놀라웠고 마냥 그림의 떡 같았다.
근데 사실 내가 먼저 할머니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할머니는 외가 쪽 식구들과 닮은 나의 얼굴을 아니꼬워했고, 그래서 나에게 못생겼다고 말했다.
어릴 적 나에게 썩은 멜론을 먹으라고 주셨다. 살아가면서, 멜론을 볼 때마다 늘 할머니가 내게 안겨주었던 시꺼먼 멜론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나빴다.
늘 할머니 집을 갈 때면 나는 눈치를 봤다. 그 집에 있는 내내 불편했다. 할머니는 나를 싫어했으니까.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나를 그리 대한다고 해서 크게 슬펐던 적은 없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할머니를 좋아한 적 없었으니까.그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이 세상에 없는 할머니를 떠올리면 화가 나 눈물이 흐르니까.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아이들처럼 나도 마음껏 할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게 안 돼서 참 마음이 상했고, 그걸 넘어서 상처받았다.
아빠도 이 사실을 다 안다. 할머니는 아빠 앞에서 나를 예쁘지 않다고 말했고, 할머니는 왜 매번 내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물어보냐고 말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빠는 이런 내 말에 공감하며 할머니의 태도에 화를 내준 적이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아빠를 싫어하게 시작된 원흉은 거슬러 올라가 보니 할머니였다.
어쩌면 나는 아빠를 늘 할머니와 한 묶음으로 봐왔다.
나 자신조차도 잘 모르는 판국에 아빠가 자신의 엄마인 할머니의 태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느 날 송장이 된 할머니
할머니는 장수를 하시고 100살이 되기 전 돌아가셨다. 아빠에겐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늘 우리 가족들에게 돈만 밝히고, 며느리인 엄마를 괴롭히고, 손녀인 내게 용돈 한번 주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할머니가 도대체 언제 가냐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그게 나쁜 마음이란 걸 뻔히 알지만, 그런 할머니에겐 그런 마음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스무 살 되던 해,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장례식장에서 본 차가운 송장이 된 할머니를 보고도 나는 아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눈물이 많은 내가, 정말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우리 아빠도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자식으로서 할머니에게 받은 것 하나 없어도 도리를 다하셨고, 엄마도 며느리로서 그 모진 시댁 살이를 다 감당하셨다. 그러니 후회도 미련도 없었을 테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을 제외하고 자식 도리를 하지 못한 못난 삼촌과 큰아빠 그리고 그 외 며느리들은다들 '아이고'소리를 내며 약속이라도 한 듯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아빠를 이해하고 나니 할머니와 아빠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분리해서 보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려고 보니 내 핸드폰에 사진 한 장 없는 할머니. 미워한다고 그리 여기지 않았지만 많이 미워했나 보다.한 장의 사진조차 남기지 않아 다시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