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질 듯한 아빠의 굉음이 온 집안을 퍼뜨린다. 익숙한 듯 학교 숙제를 하던 나는 방문을 닫고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간다. 현관 앞에서 집을 나가겠다며 난리 피우는 아빠의 목소리가 어느새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냥 셋이 살아! 이혼해! 나 이렇게는 더 이상 못 살아!
찢어질 듯한 아빠의 굉음이 메아리치듯 산 전체를 휘감는다. 묵묵히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나는 뒤돌아선다. 그리고 아빠를 향해 소리쳤다.
"아빠는 맨날 그런 식이야! 뭐만 하면 엄마한테 이혼하자 그래! 이혼이 장난이야? 아빠가 이혼하재서 이혼했으면 이미 1년에 12번도 더 했겠다!"
스무 살이 된 나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악에 받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아득바득 소리를 질렀다. 내가 뭐라고 쏘아붙이는지는 나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서럽다는 건 잘 알겠다.
미운 오십여덟, 아빠도 내 말에 지지 않았다. 모처럼 주말에 가족 다 같이 등산을 하며 산 정상을 찍는 날이었는데 나는 산 정상 그 직전에 엄마, 아빠를 등지고 산에서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뿔싸 길을 모른다. 눈물이 눈앞을 가리고 마스크는 눈물로 흠뻑 젖어만 간다. 다른 등산객들이 오고 가며 행여나 나의 눈물을 볼까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서러운 와중에 이거 신경 쓰랴, 저거 신경 쓰랴. 가뜩이나 길도 모르는데... 한참을 헤매다 집에 도착한 그 후로 아빠와 한 달을 집에서 모른 체하며 지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딘가 모르게 아빠에게는 엄마와 달리 불편하고 서운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명절마다 친할머니 댁에 가면 나는 늘 할머니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막내 손녀였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사랑받지 못했다. 내게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지 않는, 날 좋아하지 않는 돈만 밝히는 할머니가 미웠다.
그런 할머니의 아들인 우리 아빠는 엄마와 심하게 다툴 때면 얘들 대학만 보내면, 내가 퇴직만 하면, 집을 나가겠다 이혼하자, 등등 막가는 말을 했다. 내가 커갈수록 그 말의 빈도수는 늘어갔다. '술, 담배, 바람, 실직' 결혼생활 25년 내내 이 중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은 남부러울 것 없는 신랑감 이었던 우리 아빠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나에게 아빠의 유일한 단점은 내 마음의 상처였다. 엄마만큼 아빠와 친하진 않지만 무난하게 크게 대든 적 한 번 없었고 나름 화목한 가정이라 자부했는데, 아빠의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공들여 쌓았던 탑이 무너지듯 억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릴 땐 진짜 부모님이 이혼할까 봐 두려웠고 커서는 엄마에게 전하는 아빠의 그 말이 내게 상처가 되었고 더 나아가 정말 지긋지긋했다.
표현이 서툴고 엄마처럼 내 말을 잘 들어주며 공감해 주지 않는 무뚝뚝한 아빠와는 이혼하자는 그 말에 대든 후로 더 멀어졌다. 사춘기 이후로 서서히 멀어져 갔던 아빠와의 마음의 거리가 이 사건 이후로 쳐다볼 수 없는 해와 달만큼 멀어지고 말았다. 갈등의 쟁점만 바라보고 대화로 풀어나가지 않고 화가 나면 극단적인 단어를 내뱉어 회피하는 아빠를 성인이 된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25년을 참고 산 엄마에게 나는 잘난 엄마가 뭘 참고 사냐고 말했다.
"엄마! 나였으면 당장 이혼하고도 남았어."
그렇게, 스무 살 성인이 된 나는 일 년에 열두 번도 넘게 이혼하는 부모와 한 지붕아래 동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