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의 죽음을 바라보는 나에게

4부 - 선택

by 스테켈

변호사는 떨리는 손으로 첫 번째 봉투를 뜯었다.

작은 종이가 나왔다. 손글씨였다.


'변호사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행히 변호사님 없어도 저희는 잘 지내고 있어요.'

변호사는 숨을 들이마셨다.


두 번째 봉투.


'제빈아, 요즘 연락도 안 되고. 건강해라.'


세 번째 봉투. 손이 더 떨렸다.


'아들, 엄마야. 요즘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 엄마가 뭘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미안해.'


네 번째.


'갑자기 이런 연락와서 불편하기 했어.왜 나한테 이런걸 물어보는지도 모르겠고, 다신 연락 안했으면 좋겠어'


다섯 번째.


'윤 변호사, 능력은 인정해요. 근데 같이 일하기 너무 힘들어요. 솔직히 다른 팀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여섯 번째 봉투를 뜯었다. 비어있었다. 변호사는 쪽지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손이 떨렸다.


'역시...'


'역시 그랬구나.'


입관재판에서 본 자신의 모습. 이기적인가, 선한가. 결론은 '평범한 사람'. 발인재판에서 본 자신의 삶. 새벽에 산 책 12권. 보내지 못한 메시지 7개. 혼자 먹은 도시락들. 화장재판에서 본 타인의 평가. 노랑, 빨강, 파랑, 검정, 흰색. 회색빛 흰색. 그리고 지금 이 쪽지들.


'나는... 아무에게도 필요 없었어.'


변호사는 천천히 일어섰다. 유리틀 속 항아리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윤제빈 1998.04.24 - 2026.01.25'


자신의 이름. 자신의 생년월일. 오늘 날짜. 납골당을 나왔다. 복도에 다른 참가자들이 앉아 있었다. 사십 대 여성이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쪽지들을 바닥에 흩뿌려놓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오십 대 남성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한 눈빛.


"그냥 사라지고 싶다."


삼십 대 남성이 쪽지를 찢고 있었다. 갈기갈기. 한 여성이 화장실로 뛰어갔다.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윤 변호사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진행자가 나타났다. 3일간 판사 역할을 했던 그 사람.


"여러분."


그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쪽지를 다 읽으셨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진행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어떠셨습니까?"


한 참가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 범벅.


"이게... 우리가 원했던 건가요?"


"이 프로그램을 신청하실 때,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사십 대 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그리워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네."


오십 대 남성이 입을 열었다.


"저는... 최소한 가족들은 슬퍼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쪽지에는 '이제 편해졌다'고 써있더라고요."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유는 모두 같습니다.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로 필요 없는 사람인지."


침묵.


"그리고 확인했습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낮았다.


"여러분의 쪽지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각색하거나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지인들이 쓴 그대로를 전달했습니다."


한 참가자가 흐느꼈다.


"그럼... 정말로... 우리는..."


"하지만."


진행자가 손을 들었다.


"혹시 봉투를 다 세어보셨습니까?"


윤 변호사는 멈췄다.


바닥에 떨어진 쪽지들. 1, 2, 3, 4, 5...


5개?


6번째는 비어있었고.


"신청하실 때 몇 명에게 쪽지를 요청하셨습니까?"


윤 변호사는 신청서를 떠올렸다.


'쪽지를 받고 싶은 사람: 5명'


5명.


그럼 6번째 비어있던 봉투는?


그리고... 7번째?


진행자가 말했다.


"7번째 봉투를 열어보십시오."


윤 변호사는 고개를 들었다.


"7번째요?"


"네. 바닥을 확인해보십시오."


윤 변호사는 바닥에 떨어진 봉투들을 다시 세었다.


1, 2, 3, 4, 5, 6... 6번째는 비어있던 봉투.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다.

7번째 봉투. 언제 있었던 건지 몰랐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진행자가 말했다.


"그걸 열어보십시오."


윤 변호사는 7번째 봉투를 집어 들었다. 무거웠다. 다른 봉투들보다 훨씬.

천천히 뜯었다. 안에 종이 한 장. 펼쳤다.


---

[당신은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당신이 읽은 쪽지들은 진실입니다.

사람들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당신이 없어도 괜찮다고, 오히려 편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쪽지에서 한 문장을 삭제했습니다.

모든 쪽지의 마지막 문장.

"그래도 당신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이 문장을 삭제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것을.

당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이 외롭다는 것을.

그래서 죽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죽어야 할 이유는 아닙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힘들게 해도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외로워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왼쪽: 종료

오른쪽: 시작

왼쪽을 선택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오른쪽을 선택하면, 우리는 6개월간 당신을 돕습니다.

하지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삶입니다.


당신이 선택하십시오.

---


윤 변호사는 종이를 꽉 쥐었다.


"그래도 당신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어머니도? 후배도? 친구도? 힘들다고 했던 그들도? 진행자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복도 끝.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두 개의 문이 나타났다.


왼쪽 문은 검은색. 문 위에 '종료'라고 쓰여 있었다.

오른쪽 문은 흰색. 문 위에 '시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왼쪽 문을 선택하시면, 이 프로그램은 여기서 종료됩니다. 여러분을 보내드립니다. 그 후의 선택은 오롯이 여러분의 몫입니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낮았다.


"오른쪽 문을 선택하시면, 6개월간의 사후 상담 프로그램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하지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참가자들이 두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긴 침묵.


한 참가자가 일어섰다. 사십 대 여성. 천천히 왼쪽 문으로 걸어갔다. 손을 문손잡이에 올렸다.


멈췄다.


뒤돌아보았다.


"저는..."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녀가 문손잡이에서 손을 뺐다. 복도 중간에 섰다. 두 문 사이. 다른 참가자가 일어섰다. 오십 대 남성.

그는 오른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었다. 밖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는... 다시 해볼래요."


그가 문 밖으로 나갔다. 한 명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오른쪽으로. 어떤 이는 왼쪽 문 앞에서 멈춰 섰다가 돌아섰다. 어떤 이는 두 문 사이에서 서성였다. 윤 변호사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7번째 쪽지를 손에 쥐고. 진행자가 윤 변호사 옆에 앉았다.


"윤 변호사님."


"..."


"3일간 자신의 장례식을 보셨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윤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관재판에서 자신의 본질을 보셨고, 발인재판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셨고, 화장재판에서 타인의 평가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쪽지를 읽으셨고요."


"...예상했던 대로였어요."


"어떤 부분이?"


"다들... 저를 힘들어했다는 거요. 저 없어도 괜찮다는 거."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 신청하셨습니까? 확인하고 싶어서?"


윤 변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네. 정말로 아무도 날 원하지 않는지."


"확인했습니다."


"...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침묵.


진행자가 7번째 쪽지를 가리켰다.


"'그래도 살아있기를 바란다'는 문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을 수 없어요. 쪽지에는 분명 저 없어도 괜찮다고..."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진행자가 윤 변호사의 핸드폰을 꺼냈다. 프로그램 시작 전에 맡겨두었던 것.


화면을 켰다.

부재중 전화 11개.


'엄마 (5)' '친구 (3)' '후배 (2)' '팀장 (1)'


문자 메시지.


'엄마: 제빈아 어디야? 연락 좀 해. 엄마 걱정돼.' '친구: 야 3일째 연락 안 되는데 괜찮아? 전화해.' '후배: 변호사님 괜찮으세요? 회의 때 안 계셔서 걱정됐어요.'


윤 변호사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3일 동안 여러 사람이 당신을 찾았습니다. 프로그램 참가 전 '3일간 연락 두절될 수 있다'고 미리 알렸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냥 걱정한 거겠죠."


"그게 뭐가 다릅니까? 걱정하는 것도 관심입니다. 당신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윤 변호사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윤 변호사님, 질문 하나만 하겠습니다."


"..."


"3일간 자신의 장례식을 보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윤 변호사는 잠시 침묵했다.


"...무서웠어요."


"무엇이?"


"정말 이렇게... 끝날 수도 있다는 게."


목소리가 떨렸다.


"회색빛 흰색. 중층 남쪽. 평범한 사람. 그렇게 기억되고... 그냥 끝나는 게."


"그게 싫으십니까?"


"...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윤 변호사는 7번째 쪽지를 다시 펼쳤다.


'그래도 당신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모르겠어요."


"모른다는 건, 아직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진행자가 일어섰다.


"이 프로그램은 끝났습니다. 이제 선택하십시오. 이대로 끝낼 것인가, 다시 시작할 것인가."


윤 변호사는 천천히 일어섰다.


두 문을 바라보았다.


왼쪽 문. 종료.


오른쪽 문. 시작.


3일간의 재판이 떠올랐다.

입관재판. "피고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소나무 관. 평범한 사람.

발인재판. "내 삶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새벽에 산 책들. 보내지 못한 메시지들. 3일간의 운구.

화장재판. "나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타들어가는 물건들. 회색빛 흰색 불꽃. 중층 남쪽.

그리고 쪽지들.


'그래도 살아있기를 바란다.'


윤 변호사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부재중 전화 11개.


'엄마 (5)'


어머니가 5번이나 전화했다.


3일 동안. 쪽지에는 '뭘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써있었지만. 그래도 5번이나 전화했다. 윤 변호사는 오른쪽 문을 향해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문 앞에 섰다.


손을 문손잡이에 올렸다.


차가운 금속 감촉.


뒤를 돌아보았다. 납골당이 보였다. 중층 남쪽. 자신의 이름이 적힌 유리틀.


'윤제빈 1998.04.24 - 2026.01.25'


만약 지금 왼쪽 문을 선택하면, 저렇게 될 것이다.


회색빛 흰색 불꽃.


평범한 평가.


하지만 만약 오른쪽 문을 선택하면?


윤 변호사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밖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한 걸음 내디뎠다. 문 밖으로.


1주일 후


윤 변호사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창가 자리.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임시보관함.


'엄마에게: 미안해요. 주말에 갈게요.'


전송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3일간 본 것들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던진 도시락 용기. 모든 색의 불꽃.

쪽지. '뭘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미안해.'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래도 살아있기를 바란다.'


부재중 전화 5개.


윤 변호사는 숨을 들이마셨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전송됨'


10초 후,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


"아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주말에 온다고?"


"네, 엄마. 가고 싶어서요."


"그래, 그래! 뭐 먹고 싶어?"


"엄마가 해주는 거 다 좋아요."


잠시 침묵.


"엄마."


"응?"


"사랑해요."


전화 너머로 어머니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도 사랑한다, 아들아. 그동안... 괜찮았어?"


"아뇨. 안 괜찮았어요."


"..."


"근데 이제... 괜찮아지고 싶어요."


전화를 끊었다. 윤 변호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하지만 살아가는 사람들.


윤 변호사는 가방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7번째 쪽지.


'그래도 당신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지갑에 넣었다.


평생 간직할 것이다.


핸드폰을 다시 봤다.

전송.

전송.

하나씩, 천천히.

보내지 못했던 말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


횡단보도 앞에 섰다. 초록불이 켜졌다. 윤 변호사는 천천히 걸었다.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 앞. 문이 닫히려는 순간, 누군가 뛰어왔다. 윤 변호사는 문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젊은 여성이 숨을 헐떡이며 탔다. 윤 변호사는 미소 지었다.

복도를 걸었다. 후배가 보였다.


"점심 같이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후배의 눈이 커졌다.


"네? 진짜요?"


"네. 그리고 앞으로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후배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책상에 앉았다. 서랍을 열었다. 7번째 쪽지가 들어있었다. 그 옆에 메모지 한 장. 오늘 아침에 쓴 것.


'다시 살기. 오늘부터.'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오전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다르게 보였다.


살아있다는 것.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바꿀 수 있다는 것.


윤 변호사는 컴퓨터를 켰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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