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손잡이

2. 유리창

by 스테켈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정확히는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핸드폰 화면이 밝게 빛났다. 5시 47분. 알람은 6시에 맞췄지만, 그냥 눈이 떠졌다. 살짝 열린 암막커튼 사이로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아침 햇살이 환영받지 못한 채 들어오는 건 매일 있는 일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일 두 통, 카톡 열한 개. 그중 광고가 7개였다. 나머지는 답장을 나중에 해야지라고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한 걸음 움직였다. 어젯밤 테이블에 던져뒀던 편의점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날이 밝아져서야 다시 꺼낸 삼각김밥. 같이 있던 캔커피보다 더 딱딱하고 차가워진 것처럼 보인다. 결국 안 먹었다. 나중에 먹으려 했는데 나중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캔커피만 꺼내고 봉투째 쓰레기통에 던졌다.


다시 한 걸음. 옷장 앞에 섰다. 뭘 입을지 고민도 하기 전에 손이 뻗었다. 단정한 블라우스. 나중에 좋은 날 기분전환 겸 입어야지 했던 그 순간은 오지 않고 오직 회의만을 위해 꺼낸 옷.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씻고 나서 입으려고 침대 위에 던져뒀다.


또 한 걸음. 한 걸음 자그마한 문턱을 넘어 세면대 거울 속엔 지민의 얼굴이 보인다. 곧 지민의 얼굴이 아닌 김 대리의 얼굴이 올 그 순간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너무나 익숙해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김 대리의 얼굴이 완성되었다.


다시 돌아온 걸음들을 따라가며 마침내 김 대리가 된 지민은 침대 위에 던져뒀던 블라우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방을 들었다. 무거웠다. 항상 무거웠다. 뭐가 그리 필요한 것들이 많은지 어느덧 오른쪽 어깨는 그 무게를 견디기에 충분히 단단해졌다.


그러곤 익숙한 기계음이 들린다.


쿵. 띠— 띠— 띠리리.


오전 여덟 시. 탕비실이 가장 조용한 시간이다.


지민은 그 시간을 좋아했다. 좋아했다기보다 익숙했다. 스낵바에서 견과류와 단백질바를 챙긴 채 커피머신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른다. 아메리카노. 얼음은 깜빡했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얼음을 먼저 텀블러에 받지 않고 차가운 스테인리스 텀블러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담곤 한다. 아무렇지 않다. 기다리는 동안 창밖을 봤다. 신도림 빌딩들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유리 외벽이 반짝였다.


유리창을 통해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이고 발소리가 들렸다.


"김 대리는 항상 일찍 오네요."


최 과장이었다. 지민이 돌아봤다. 웃었다. 어렵지 않았다.


"아... 네..."


최 과장이 익숙한 듯 가벼이 목례를 하며 정수기로 갔다. 물을 받으면서 말했다.


"이따 회의실에서 봅시다."


그게 전부였다. 최 과장은 물을 들고 나갔다.

지민은 커피를 들고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남들은 출근 루틴이라고 말하는 이 모든 것들 견과류, 단백질바, 얼음 없는 아메리카노. 루틴과 습관이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매일 반복해왔는데. 그냥 몸이 먼저 아는 것들. 생각하기 전에 손이 먼저 가는 것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유리창에 보인 낯선 여성의 실루엣을 보며 정신을 차린다. 이 모든 것들이 습관처럼 익숙해졌는데도 거울 속 그 얼굴을 봐야만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이제 김지민에서 김 대리로 불려야 하는 시간이다. 최 과장과 함께 참여해야 하는 주간 보고, 아침에 못 본 척 지나간 고객사 답변 메일, 산더미처럼 쌓인 한글 문서들과 엑셀 데이터들. 이 모든 것들이 유리창 속 그 얼굴과 함께 떠올랐다.


지민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로 돌아갔다. 생각이 완성되기 전에 화면을 켰다.


오전에 메일이 두 통 더 왔다. 고객사 답변 메일은 오전 중으로 보내야 했다. 보냈다. 주간 보고 자료는 열한 시까지였다. 내 업무 일정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당연하게 날아온 메일들. 이제는 읽으면서 가벼운 한숨만 나올뿐 아무런 감정도 올라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당연해졌다. 완성했다.


점심은 팀 사람들과 먹었다. 뭘 먹을지 고민한 시간이 실제로 밥을 먹은 시간보다 길었다는 걸, 자리로 돌아와서야 알게 됐다. 배가 부른 건지 아닌 건지도 잘 몰랐다.


오후에 회의가 두 번이었다. 들어오는 사람은 다섯 명, 일곱 명.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지민이 두 번 다 제일 많이 말했다. 화이트보드엔 지민의 글씨가 가득했다. 첫 번째 회의가 끝나고 팀장이 말했다.


"역시 김 대리야."


웃음이 돌았다. 지민도 웃었다. 어렵지 않았다. 근데 오늘은 그 말이 귓속에서 잠깐 머물렀다. 보통은 그냥 흘러갔는데.


두 번째 회의가 끝날 때쯤 창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언제 어두워졌는지 몰랐다. 회의 내내 화이트보드만 봤으니까. 퇴근 준비를 하면서 핸드폰을 봤다. 단톡방 답장은 아직이었다. 나중에. 가방을 들었다. 오른쪽 어깨가 무게를 받아들였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항상 그래왔으니까라는 말이 오늘은 이상하게 한 번 더 머릿속을 지나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탔다. 닫혔다.


거울에 자신이 비쳤다. 형광등 불빛이 얼굴을 노랗게 만들었다. 지민은 그 얼굴을 잠깐 봤다. 웃고 있지 않았다. 웃을 필요가 없으니까. 아침에 탕비실 유리창에서 본 얼굴이었다. 같은 얼굴인데 아침보다 조금 더 낯선 것 같았다. 낯설다는 게 이상한 건지, 매일 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게 이상한 건지.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신도림역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면서 이어폰을 꽂았다. 플레이리스트는 아침과 같은 순서였다. 바꿀 이유가 없었다. 아니, 바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신곡들이 뭐가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았을 뿐이다.


플랫폼에 사람이 많았다. 스크린도어 앞에 섰다. 앞사람의 뒷모습을 봤다. 이어폰. 핸드폰. 이어폰. 핸드폰. 지민도 이어폰. 핸드폰을 꺼내려다가 안 꺼냈다. 꺼낼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스크린도어에 몸을 기댔다. 스크린도어 너머로 지하철 불빛이 보였다.


지하철이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쏟아졌다. 지민이 탔다.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이 손잡이를 오늘 몇 명이 잡았을까. 아침부터 지금까지. 출근하는 사람, 약속 있는 사람, 야근하고 돌아가는 사람. 다 잡았다가 다 놓았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갔다가 멈췄다. 더 이어가기가 귀찮았다. 아니, 귀찮다기보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출입문 닫힙니다. 출입문 닫힙니다.'


지하철 소리가 들렸다. 바퀴 구르는 소리. 누군가 기침하는 소리. 맞은편 사람 이어폰에서 새는 음악 소리. 지민은 그 소음 안에 그냥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하철이 터널로 들어갔다. 창밖이 어두워졌다.


유리창에 자신이 비쳤다. 터널 안 형광등 불빛이 노란 빛을 만들었다. 아침 탕비실 유리창에서 본 얼굴. 엘리베이터 거울에서 본 얼굴. 그리고 지금 이 얼굴.


세 번이었다.


세 번 다 같은 얼굴인데 볼 때마다 조금씩 더 낯설었다. 피곤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슬퍼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얼굴. 오늘 하루 제일 많이 말한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게, 이상한 건지 당연한 건지 판단할 기력도 없었다. 터널이 끝났다. 창밖이 다시 밝아졌다. 유리창 속 얼굴이 사라졌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지민은 손잡이를 잡은 손을 봤다. 오늘 하루 이 손으로 뭘 했나. 키보드를 쳤다. 마커를 잡았다. 가방 끈을 잡았다. 그리고 지금 이 손잡이를 잡고 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생각이 먼저 왔다. 회의에서 한 말들, 화이트보드에 쓴 글씨들.


지민이 아니어도 됐을 것 같았다.


근데 그게 직장 얘기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지하철 안에서도. 저 유리창 속에서도. 이 손잡이를 잡고 있는 지금도.내가 아니어도 되는 건가. 내가 없어도 되는 건가.


같은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대답이 없었다. 대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피곤했다. 이 생각도. 이 질문도. 오늘 하루도.


다 놓아버리고 싶은데 놓으면 뭐가 남는지 몰라서 그냥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손잡이도. 생각도. 그 생각이 이번엔 끝까지 완성됐다. 지워지지 않았다. 어제는 스쳐 지나갔는데. 오늘은 손잡이처럼 잡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려야 하는지 더 잡고 있어야 하는지.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서 있었다. 멍하니.


신림역이었다.


문이 열렸다. 지민이 내렸다. 손잡이에서 손을 놓았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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