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해방촌
나도 술맛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달고 상큼한 음료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맛도 없고 쓰기까지 한 보리 탄산음료를 왜 먹는지 이해를 못했었다. 내가 맥주를 좋아하고 맛을 알아버린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독일 출장에서였다.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독일 베를린을 갔었고, 일 끝나고 감독님들과 함께 독일에서 유명하다는 펍에 갔다.
그곳은 독일식 족발인 슈바이네 학센이 유명한 맛집이었고, 겉바속촉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슈바이네 학센을 시켰다. 족발엔 맥주가 빠질 수 없다. 그리고 여긴 맛있는 맥주가 많다는 독일이었다. 맥주 종류가 다양했기에 어떤 것을 시켜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샘플 맥주가 있어서 그걸 주문하면 여러 종류의 맥주를 조금씩 맛볼 수 있었다. 다 맛을 보고 자기와 맞는 맥주를 고르면 된다. 그곳에서 난 헤페바이젠과 사랑에 빠졌다. 헤페바이젠은 바나나향이 나면서 부드러운 맛이 나는 밀맥주이다.
독일을 다녀와서 밀맥주를 파는 곳이 있으면 난 주저 없이 들어갔고, 맥주를 마셨다. 그 이후 밀맥주 탐험에 나서면서 여러 맥주 회사를 알게 되었고, 회사마다 다 맛이 다르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곳이 이태원 근처여서 다행이었다. 다른 곳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마시는 맥주가 가장 맛있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주말 낮에 낭창하게 앉아 마시는 맥주이다. 날씨 좋은 날 야외에서 쨍한 햇빛을 벗 삼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밤에 마시는 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풍경이 어색해도 이곳은 해방촌이기에, 그리고 경리단이기에 낮에 술을 마신다는 게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맥주는 병맥주랑 생맥주 두 종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나! 맥주의 맛을 탐험하며 마시기 시작하면서 맥주의 종류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아갔다. IPA가 뭔지 라거, 에일, 헤페는 또 무엇인지에 대해 말이다. 비록 맥주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이 커질수록 소비와 함께 뱃살이 늘어났지만, 행복한 기분 또한 늘어났기에 괜찮았다. 그 와중에 내가 만세를 불렀던 순간이 있다면 맥주 수입 제한이 풀렸을 때이다. 이태원 바에서 만날 수 있었던 맥주를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었을 때 나는 아주 많이 기뻤다.
술을 마실 때 나만의 원칙이 있다. 절대 빈 속에 술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원칙이 생기게 된 계기는 첫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남자 친구와 50일 기념일이 되었을 때 술을 마시게 됐는데, 너무 떨려서 내가 빈 속에 술을 마신 것이다. 그리고 집에 가다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이후 술을 먹을 때는 뭐라고 꼭 먹고 먹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야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필름이 끊겨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술에 취해도 주사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기억도 못하는 주사를 한 껏 부리고, 필름이 끊겨 통편집된 사건이 발생했다.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난 바에 들러 어떤 사람과 대화를 했고, 바 문을 일찍 닫아서 그 사람의 집에 가서 또 술을 마셨다. 어떻게 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짓을 한 것이다. 겁도 없이 남자의 집에는 왜 따라갔을까. 그 와중에 다행인 건 일어나 보니 내 집에서 얌전히 자고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런데 난 그 어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겨 봤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래 본 적은 없다. 역사를 쓴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MP3가 없어졌다. 난 어제 만난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MP3는 걷다가 떨어뜨려서 그 남자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내가 온갖 진상짓은 다 했다고. 자신은 끝까지 나를 지켜줬다고 한다. 진상짓을 했을 때는 차라리 기억에 나지 않는 게 더 좋을지 모른다. 그런 기억이 떠오른다면 얼마나 자신이 싫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생각해보니 20대 때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겁도 없이 술을 마시면서 놀 수 있었던 것은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혼자였다면 절대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 이래 봬도 나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사람이라고.
어떤 경험이든 직접 해 봐야 느끼는 게 확실해진다. 난 술을 통해서 술을 배웠다. 그리고 나를 알게 되었다. 맥주라면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갈 거라고 자신하던 나는 내가 술이 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술을 마시고 몇 번의 흑역사를 쓰고, 삶을 살아가야겠기에 이젠 술을 좀 멀리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