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생활을 청산하다

어쩌다, 해방촌

by 조헌주

어느 곳에서나 살 수 있는 가벼운 상태를 만들어 놓는 것. 나의 삶의 모토였다. 나는 미니멀리즘의 삶을 지향해왔다. 캐리어 하나로 어디든 살 수 있는 삶을 추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떠나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삶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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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에서 살면서 난 틈나는 대로 해외여행을 다녔다. 짧은 기간을 다녀온 여행도 있었고, 긴 시간 동안 타지에서 살아보기도 했다. 여행을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처음엔 못 살 거 같이 느껴진 환경에서도 어느 순간 적응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경험한 것에 따라 삶을 대하는 습관과 태도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해외여행, 그리고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 등이 아쉽지 않다. 어쩌면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들을 써 놓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하나씩 실천해서일 것이다.

물건을 살 때 마음에 들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냥 사는 사람이 있다. 나는 뭘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자료 조사를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비교를 해 보고, 내가 가장 마음에 들 만한 것을 고른다. 그렇게 신중함을 발휘하다 가끔 앞뒤 재지 않고 크게 저지르는 일도 있다.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서 나는 나를 알아갔다. 전에 내가 그렇게 자꾸 바깥 세계에 눈을 돌려 여행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나를 제대로 몰라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에 대한 만족이 없어서. 이제 많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없어졌다. 이런 갈망이 없어졌을 때 나는 일상으로 눈을 돌렸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는 삶,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노매드 생활은 스펙터클하기는 하다. 하지만 하나의 습관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이제는 익숙함과 항상성을 통해 나의 삶을 꾸려 나가야 할 때이다. 그래서 하나씩 습관을 만들어 지속하기로 했다. 처음엔 글쓰기 습관을 들였다. 그동안의 노매드 생활의 경험을 정리하게 됐고, 더불어 나와 베스트 프랜드가 되어갔다. 그동안의 경험들 덕에 난 아직 쓸 거리가 차고 넘치긴 한다.


또 하나,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식물 키우기였다. 사실 난 매일같이 들여다 봐줘야 하고 정을 줘야 하는 것을 잘하진 못한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엔 항상 화분이 많았다. 엄마가 화분 키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화분이 자리만 차지한다는 생각을 했고, 손이 많이 가는 것 같아 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그냥 깔끔한 환경이었으니까.


어느 날, 아래층에서 파를 화분에 기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도 화분을 한번 키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상용으로 키우는 화분이 아닌 다분히 실용적인 마인드로 접근했다. 사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야채들을 많이 사면 처치곤란인 경우가 많았다. 어떤 식물을 키우면 좋을까 알아보기 시작했고, 화분을 사고 흙을 사고, 씨앗을 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종을 심으면 더 빨리 자란다는 것을 몰랐다.


화분에 흙을 담고 씨를 뿌렸다. 그 작은 씨앗이 설마 자랄까 하는 반신반의한 생각으로 뿌리고 물을 주었는데, 일주일 후부터 녹색 잎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식물이 있는 녹색 환경은 당연하게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아무것도 없는 흙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하루하루 살펴보면서 조금씩 피어나는 잎들을 보면서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난 아침에 식물에 인사하며 물을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식물에게 말 거는 방법을 터득했고, 이 작은 행동은 나의 항상성에 첫 발을 내딛게 만들었다. 그리고 난 화분을 더 사서 상추, 방울토마토, 허브 등을 심으며 함께 사는 나의 친구들을 늘려갔다.


자신에게 기분 좋은 책임감이 부여될 때 그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계속할 수 있는 힘, 항상성을 갖게 한다. 그 힘으로 일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가지고, 자신과 주변에 정을 붙이고 살아가게 된다.


어떤 자리에 갔는데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는 건 그 자리에 적응을 못하고 있다는 뜻일 거다. 어디론가 자꾸 떠나고 싶다는 건 지금의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아 벗어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마음이 든다면, 바로 그곳을 떠나려고 하기보다는 좋아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정성을 들여보면 어떨까.


처음에 해방촌 집을 계약했을 때 난 내가 이렇게 오래 이곳에서 살게 될지 몰랐다. 전에 살던 사람처럼 결혼을 해서 떠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곳은 나의 두 번째 고향과도 같다.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를 수 있었던 건 해방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상에서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 어쩌면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만큼 이곳도 날 좋아하기에 날 놓아주지 않는 게 아닐까.


나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아마 이곳에서 살 거 같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다며, 이곳에서 진정으로 나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며.. 이 곳이니까 여행을 가지 않아도 몇 년을 버티며 살 수 있다며.. 그렇게 나를 합리화하는 곳. 이곳 해방촌에서 항상성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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