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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Mar 09. 2024

촌스럽게 꽃밭 구경

더 자주,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면

같이 코스모스 구경 가실래요?


처음엔 시큰둥했다.

촌스럽게 꽃밭 구경이라니.

나는 꽃을 보며 감탄하는 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예쁘다, 는 정도의 생각은 하지만

감탄을 한 적은 없었다.


꽃놀이를 제안한 사람은

하루 세 번씩 동네 산책을 할 때 오가며 마주쳤던,

지민보다 한 달 빨리 태어난 ‘한준’이라는 아이의 엄마였다.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로 휘적휘적 걸으며

버겁게 아이의 뒤를 쫓던 나와 달리,

15개월이 지나도록 모유수유를 하고 있다는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어느 정도 꾸민 상태였으며

생기가 넘쳐 보였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넸고,

확실히 안면을 텄다 싶은 즈음엔

은근슬쩍 반말을 섞어가며 말했다.


“저렇게 기운 좋고 발랄한 사람은 육아도 잘하겠지?”


나는 그를 볼 때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산책 중 그가 보이면 은근슬쩍 다른 길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그와 꽃구경이라니.


“그래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그 당시 나는 지독하게 외로웠으므로

덜 외로운 반나절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작은 소망에서였다.


코스모스 꽃밭은 우리 집에서 도보로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각 각 유아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길을 나섰다.

가는 도중 아이들이 유아차에서 내리겠다며 떼쓰지 않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밖을 나서면

엄마의 시야는 좁아진다.

아이의 반경 3미터 거리에

튀어나오거나 울퉁불퉁한 장애물이 없는지

수시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직립 보행 경력이 짧은 아이들은

납작한 잡지책을 밟고도 넘어지기 일쑤다.

이것은 유아차를 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잠깐 경계를 낮췄다가

무심히 버려져있던 쓰레기에 한쪽 바퀴가 걸려서,

혹은 살짝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서

아이를 태운 유아차가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땐 그 쓰레기가, 그 보도블록이

그 자리에 그렇게 있도록 만든 이 세상을 원망하며

욕을 내지르고 싶어졌다.


그날도 유아차가 지나갈 길의 바닥만을 집중해서 살피며 나아가고 있었다.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아이들의 낮잠 시간, 밤잠 시간, 이유식 따위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운전을 해서 종종 교외에 나가 또래 엄마와 시간을 보내다 온다는 한준 엄마는

붙임성 있는 성격답게 “언니도 같이 가요! 나갔다 와야 하루가 빨리 지나요.”라고 했지만,

갓 돌을 넘긴 통제 안 되는 어린애와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라니

나로선 상상만으로도 기가 빨리고 피곤한 일이이었다.

꽃밭에 도착하기도 전에 피로감이 느껴져 

다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을 때,

한준 엄마가 외쳤다.


“저기예요!”


그제야 처음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하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드넓은 땅에 

코스모스가 한가득 피어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내 뺨을 스쳐서  

꽃들에게 달려갔을 때

동글동글한 핑크빛, 자줏빛, 하얀빛이

일제히 넘실거렸다.


어서 오라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온몸으로 환영해 주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와! 너무 예뻐요!”


더 근사한 표현을 찾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그것이었다.

말문이 막혀서

그저 입을 헤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맞죠? 예쁘죠?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한준 엄마가 내 얼굴을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 사람의 미소가 이렇게도 아름다웠던가.


“고마워요. 진짜 좋다. “


흙과 꽃뿐이었던 꽃밭은 한눈에 보기에도 안전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유아차에서 내려놓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꽃들을 감상했다.


감당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서러워지는 건가.


나는 자꾸 울컥하며 치솟는 눈물의 영문을 모르고

그것이 주르륵 흐를 것 같을 때마다

공연히 아이에게 조심하라 일렀다.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꽃밭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빙글빙글 돌며 꽃들의 찬란함을 황홀하게 감상했다.

아기들은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코스모스 사이를 아장거렸고,

풋풋한 연인들은 셀카봉을 들고 완벽한 각도를 찾고 있었다.

친정엄마 또래의 어머님들이 달뜬 얼굴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나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지민의 모습을 담고 싶은 마음에 카메라를 꺼냈다.


아이를 쫓아다니며 사진을 몇 장 찍다가

다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멍하니 꽃밭 전체를 바라봤다.


그 순간,

나는 그저 꽃들이고 싶었다.

넓은 땅에서 함께 어울려 자유로이 바람 따라 춤추는 코스모스.


다시 센티해지려고 할 때,

한쪽 귓가에 보드라운 촉감이 느껴졌다.

왠지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조심스러움이 느껴져 눈동자만 굴려서 그쪽을 봤다.


한준 엄마였다.

자신의 귓가에 코스모스 한 송이를 꽃은 한준 엄마가

나에게도 꽃을 꽂아주려 하고 있었다.

온순한 아이가 된 것처럼, 

스스로는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을 한준 엄마의 손길에 맡겼다.


“언니, 예뻐요!”

“고마워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하늘하늘 웃고 있는

코스모스들 같았다.

머리에 꽃을 꽂은 엄마를 발견한 아이들도

꽃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


우리는 아이를 안고 꽃을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몇 장 찍어준 뒤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준 엄마는 이곳에 남편과 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편은 쉬는 날엔 집에만 있고 싶어 한다고 털어놨다.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있었다.   


“남편 대신 저랑 지민이를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영광이네요!”


라고 말하자,

그는 서운함 따위는 저 멀리 날려버릴 듯 화통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보다 장시간 바깥에 있다 돌아왔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다.

도리어 힘이 솟아오르고 마음이 밝아져서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나 꽃 좋아했네.


*


이후 우린 생각보다 자주 만나지 못했다.

또 만나자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엄마들은 함부로 약속하지 않는다.

아이들 개월 수, 컨디션에 따라 하루 루틴이 다르므로

우리는 약속을 확정 짓지 못한다.

아이들의 낮잠 시간을 중심으로 정해지는 사소한 루틴이 한 번이라도 어긋나면

며칠간 더 많은 체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한준네는 머지않아 이사를 갔다.


*


평일 낮 시간.

철저히 타인의 요구에 맞춰진

고되고, 지루하고, 씁쓸한 육아 노동의 시간 중

등 뒤로 다가와 다정하게 안아주는 위로의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을 선사하는 건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기도,

듬직하고 자상한 남편도 아닌,

나와 같은 엄마들.


우리는 서로를 찾으려 할 때마다

가슴으로 연결되고,

눈빛으로 나누고,

묵묵히 아픔을 보듬었다.


그 연대감을

더 자주,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면

그 시절 내가 덜 고단했을까.


하루 중 혼자만의 시간이 일정 수준 반드시 확보돼야 하는 타입의 내향형 인간인 나는

넉살 좋게 아무 하고나 금방 친해지고, 무례하지 않게 반말을 구사하는 기술은

40이 넘은 아직까지도 습득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시절 산책길에 만났던 엄마들,

언니들, 동생들로부터 배운 것들은

나를 안에서부터 완전히 바꿔놓았다.


판단하지 말며
더불어 실컷 웃고, 더불어 실컷 울고,
대신해서 불 같이 화내주기.


우리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스스로를 용서하고,
지금, 이 찬란한 순간을 더 많이 사랑하기.


내 아이뿐 아니라, 그들의 아이를 향해서도
한달음에 달려가 끌어안을 수 있는
보편적인 엄마가 되는 것.


이 원대한 배움의 여정 초입에 있었던 한준 엄마야,

이름에 ‘송’ 자가 들어간다는 것 외에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정말 미안해.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어.


어디에서든

씩씩하고 기운 찬 엄마로 행복하길.

그리고 ‘송’ 자를 포함한 자기 이름 세 글자로 당당히 빛나는 여성이길.

진심을 다해 응원하는 내 마음이

봄바람을 타고 전해지길.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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