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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Apr 02. 2024

내 아기의 첫 사람

할아버지를 기억해.

내가 아기를 낳고 대학 병원에 실려가

저승사자와 독대를 하고 있을 때,

브런치북 [죽음을 명상하는 엄마입니다.]

남편과 친정엄마는 이성과 냉철함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아빠는 수술실 앞에 나동그라져 있다시피 한 엄마와 남편을 보고

생수를 사서 한 병 씩 건넨 후,

태어나자마자 홀로 신생아실에 남겨진 아기를 찾아갔다.

아빠는 침착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만 병원 건물에 도착한 아빠는 엘리베이터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7층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고 했다.


내가 산송장에서 인간으로 소생하던 3주라는 시간 동안

아빠는 매일매일

하루 세 번, 세 시간씩

신생아실에 들러

아기를 안아주고, 만져주고, 분유를 먹이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신생아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해 두었다.

아직 시력이 완전하지 않은 신생아가 익숙한 사람이 찾아왔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매일 똑같이 초록색 체크 난방을 입었고,

휴게실에서의 접견 시간 동안 조명의 조도를 낮추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엄마가 좀 아프다고. 곧 건강해져서 더 많은 사랑을 줄 거라고. 그때까지 잘 지내야 한다고.


너무나 작고 여린 생명체를 대할 때마다

아빠가 얼마나 매번 긴장하고 조심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그렇게 아기를 만나고 내가 입원한 병동의 저녁 면회 시간에 카메라를 가져와 보여줬다.

동영상 속 아기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고,

자다가도 할아버지가 부르면 눈을 떠보려고 애를 썼다.

내가 아기 옆에 없음이 한스럽고 비통했지만

아빠의 품에서 편안해하는 아기를 보며 깊이 안도했다.


퇴원 후 아기가 100일이 될 때까지 친정에서 함께 아기를 돌봤다.

그때에도 아기는 할아버지 품에서 온순하게 잠들었고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면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친정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2주 정도 지났을 때

아기의 낮잠과 수유 패턴에 변화가 생기고, 낯가림이 시작되며 울음이 잦아졌다.

종일 홀로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에 감당하기 어려웠던 나는 다시 엄마에게 S.O.S를 청했고,

엄마가 나와 아기를 데리러 왔다.

아기는 2주 만에 만나는 할머니를 보고 마치 귀신이라도 마주친 듯 발작적으로 울어댔다.

할아버지도 기억 못 하려나?

아빠가 친정집 안방에서 나와 “한별이(태명) 왔어?”라며 우리를 맞아줬을 때,

할아버지를 발견한 아기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오! 여기 있었군요! 찾고 있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


아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표정으로 두 팔을 할아버지 쪽으로 뻗어 얼른 품에 안겼다.

나는 안심했지만 약간 질투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지민은 엄마와 할머니를 제일 좋아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난 최초의 사람, 최초의 지극한 보살핌이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됐음을 꼭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자주 이야기해 줄 것이다. 




***아빠는 후에 매일 같이 신생아실에 들러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었던 건 다 나를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에미가 빨리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어?
새끼를 보여주는 게 제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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