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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Jan 19. 2023

어린 생명을 돌볼 때

화려했던 날들이여, 이제 안녕.



생후 13개월.

우리는 이제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하비(할아버지), 함미(할머니), 아가,
지지, 찌찌, 안돼, 됐다, 아냐, 녜(네), 까꿍, 맘마, 빠방(자동차),
빵, 짹(책), 물, 행퐁(핸드폰), 이유(우유), 찌즈(치즈), 삐(머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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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몸이 술을 잘 안 받는다. 평생 마실 술을 20대 때 다 소진해 버린 것 같다.

내 별명은 ‘술미’였다. 밤새도록 참 잘도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도 다음 날 아침이면 멀쩡하게 일어나 그날의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해 냈다.

그야말로 무한 체력이었다.

극단 신입 단원 시절, 회식 2차 장소로 가는 길에 동기가 이렇게 외쳤다.


술미야! 가자! 하늘을 찢어서 해를 꺼내야지!


동이 틀 때까지 마시자는 시적인 표현이었다.

난 그 애가 좋았다.

우리는 매우 자주 하늘을 부욱 찢어 주황빛 해를 덥석 끄집어냈다.

귀가 후 거실에서 아침 신문을 읽고 있는 엄마와 마주치면 명랑하게 인사를 건넨 후, 화장을 지우고, 이를 닦고, 두 시간 정도 잠을 청하곤, 다시 벌떡 일어나 이를 닦고, 화장을 하고, 나를 위해 펼쳐져있는 것만 같은 세상을 향해 또 나아갔다.


*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한참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무서웠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내 몸이 알코올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아이를 재우고 시원한 맥주가 너무도 고파서 컵에 조금 덜어 마셔봤는데,

순식간에 팽그르르 돌며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다음 날은 내내 피곤했다.  


천방지축 자유분방 화려했던 날들이여, 이제 안녕.

원 없이 마시고, 떠들썩하게 놀았으니

더는 미련이 없다.




삐그덕 거리는 낯선 몸에 영혼을 싣고,

어린 생명을 돌보는 나날은 모든 것이 새롭다.

매 순간 잔잔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오전 낮잠을 재울 때 마주 보고 누워 한참 동안 서로 눈을 맞췄다.

어미는 새끼에게 취해서 실실 웃고 있었을 것이다.  

아기가 미소를 짓더니

내 머리를 끌어안아다 자기 얼굴에 부비며 흥얼거렸다.

나는 왠지 울컥했다.


오후 늦은 낮잠에 들었을 때

오래 잘 까봐 일부러 거실 매트에 눕혔다.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마를, 볼을, 턱을, 눈두덩을 입술로 더듬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아기 얼굴에 부비고 또 부볐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못 배기는 순간이었다.

‘행복’, ‘사랑’이라는 대단한 단어들 조차

그 순간의 내 감정을 다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어떤 언어도 힘을 잃는다.

아기가 깨서 칭얼대기 전까지

저릿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


걷기에 좋은 계절이다.

하루에 산책 두 번, 혹은 세 번,

두 시간 반에서 네 시간 정도를 걷는다.

흙, 잔디, 나무 벤치, 시멘트 땅이 신기해서

쪼그려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고 더듬더듬 만져본다.

풀잎과 꽃들에게 이쁘다며 인사한다.

지나가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탄한다.

아기의 인사를 받은 풀잎과 꽃들과 개미가

나를 응원한다.

엎드려서 계단을 오르고,

어딘가에 걸터앉는 걸 좋아한다.

흙을 파다가 나오는 조그마한 돌을

자연스럽게 입에 넣는다.

깜짝 놀란 내가 “지지!”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움찔, 하더니 다시 넣는다.

어린것과 실랑이를 벌인다.

몇 번 더 해보다 맛이 없는지 그만둔다.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걸어오면 무서운 모양이다.

앞장서 걷다가 뒤돌아 나를 찾으며

두 팔 벌리고 눈물을 글썽인다.

가여워라. 품에 안아 토닥인다.

잘 놀다가 자꾸만 넘어지는 건 졸음이 올 때라는 걸

친정엄마에게 배웠다.

집에 들어가 보송한 이불에 함께 눕는다.

이 계절은 늘 서둘러 지나간다.

걷다가 간식을 먹고,

걷다가 낮잠을 자고,

걷다가 맘마를 먹으면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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