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프지 않으니까 너도 아프지 않은 건가?
계속해보겠습니다 - 관계의 파편, 생명의 징후, 그리고 재생의 서사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머릿속에 분명한 형체를 잡아내기 어려웠다. 소라, 나나, 나기, 애자, 복자, 모세.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이 쏟아졌고, 각각의 삶은 균열 난 도자기처럼 미묘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두 번째 읽기에 접어들자, 나는 이 인물들이 겹치는 지점, 서로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부분, 삶과 죽음, 상실과 복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모습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걸 느꼈다. 이 책은 쉽지 않은 문체로 쓰인 복잡한 서사를, 오히려 단순하고 투명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지만, 그 혼란의 틈새로 의미의 씨앗들이 파고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라는 애자의 첫째 딸이다. 그녀는 건설사무소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이 단단한 이름 ‘소라’ 속에는 묘하게 바람 한 점 스며들 여유가 없다. 메말라 보이는 그녀의 삶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어릴 적, 애자가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키던 날을 잊지 않는다. 그 날 소라는 너무 무서워서 달리고 또 달렸다. 누군가를 향해 달리는 것인지,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 모를 그 신경질적인 전력질주 속에, 소라는 애자라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있었다.
애자는 남편을 잃은 뒤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러나 이 무너짐은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에 가까웠다. 삶이란 때로는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완전함에 도달한다. 애자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조각들을 빗자루로 쓸어 모으듯, 파편을 긁어 한데 모았다. 그 결과물은 남들 눈엔 무너짐으로 보일지언정, 그녀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완성된 자신’ 이었다는 역설이 느껴진다.
그런 어머니 아래에서 소라는 자라났고, 동생 나나와 함께 몸을 부비며 살았다. 특히 인상적인 건 소라가 나나의 임신을 먼저 눈치챘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나나는 말해주지 않을까? 소라는 분노한다. 그것이 마치 배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곧 그 분노의 이면에는 애잔함이 스며든다. 동생이, 혹은 언니가(관계 설정에 있어 독자가 스스로 유추하게 만드는 책의 전략을 떠올리며), 자기보다 먼저 ‘생명’을 품었다는 사실은 왠지 모르게 두렵다. 소라는 애자처럼 살기 싫다고 중얼거린다. 다시 말해, 그녀는 어머니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결국 피할 수 없는가? 부모의 그림자는 피하려고 할수록 더욱 길게 드리우는 법이다.
나나는 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나가 보여준 행동들은 기묘하다. 작은 것들을 괴롭히는 잔혹함, 그리고 그 사실을 나기에게 들켰을 때 당한 구타. 나기는 나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때렸으니까 너는 아파.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아.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돼.” 이 문장은 마치 오래된 회중시계처럼 머릿속에서 똑딱똑딱 울린다. 폭력의 문제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고 기억하는 데서 인간성이 결정된다는 이 명제는 이 작품의 심장을 관통한다.
나나는 결국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잦은 태몽이다. 단풍잎, 복숭아, 조개, 고추, 사슴… 끝없이 변하는 이미지들은 마치 이 세상으로 나오려는 생명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태몽은 일종의 문장 없는 언어, 태아가 모태 너머로 보내는 모스 부호 같은 것이다. 나나는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나오려는 아이가 있다면, 이 세상이 아무리 잔혹해도 한번 품어보겠다고. 그 용기 속에는 나기가 때리며 주었던 교훈도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나는 어쩌면 더 깊은 인간성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기는 삵(이라는 음심점)을 운영한다. 그리고 어릴 적 이 반지하 방으로 소라, 나나 가족이 이사 온 뒤부터 셋은 하나처럼 엮여 왔다. 나기에게도 마음속에 오래 새겨진 상처가 있다. 어릴 적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것은 혐오였다. 긴 시간이 지나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나기는 기뻤지만 곧 충격적인 입맞춤과 폭력에 뒤덮였다. 그 뒤 그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사랑과 혐오, 소망과 실망이 얽힌 이 장면은 참으로 난해하다. 왜 이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서로를 밀쳐낼까? 책을 다시 읽으며 느낀 건, 이 이야기 안에서는 ‘순수한 관계’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관계는 상흔을 안고 있고, 그 상흔이 캐릭터들의 영혼에 선명한 문신을 새겨 넣는다. 나기에게 그 친구는 혼란스럽지만 지울 수 없는 문신, 선명한 고통의 기억이다. 이 고통이 나기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나기도 나나나 소라처럼 ‘계속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아닐까?
애자는 왜 ‘너희만 행복하려 하냐’며 불평했을까? 이 문장은 읽을 때마다 서늘하다. 상실로 다져진 삶 속에서 애자는 아이들에게,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속 울분을 토하고 있는 듯하다. 너희는 왜 내가 허물어지는 동안에도, 너희만의 행복을 좇는 거냐고. 이 불평은 단순한 원망인가, 아니면 고통의 연대를 요구하는 비명인가?
복자, 모세 같은 주변 인물들의 등장도 흥미롭다. 특히 모세는 요강 쓰는 아버지와 그걸 치우는 어머니를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일까? 이 책 속 세계에서 ‘이상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어쩌면 모세는 인간의 삶이란 서로의 불편함을 치워주며 흘러가는 것이라 믿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불편함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외면할 것인가, 맞서서 치울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두 번째 독서는 더욱 쓴맛이 났다. 마치 처음엔 맹물인 줄 알았던 컵에 서서히 녹아들어갈수록, 그 안에 짠맛, 쓴맛, 단맛이 뒤섞여 있음을 깨닫는 기분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 ‘이상하게 불쾌하고, 동시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이었다면, 두 번째에는 그 불쾌함 너머의 층위들을 발견했다. 이 책은 상처받은 인물들이 어떻게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또 그 그림자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결국 삶을 계속해나가는지에 대한 기록 같다.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제목은 “그래도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들린다. 누군가는 서서히 무너지고, 누군가는 어떤 완성에 이른다. 누군가는 아이를 품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정지하지 않는다. 마치 숨 막히는 여름 오후처럼, 폭염과 땀, 숨 막힘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듯 이들도 흘러간다.
나나가 아기를 낳으려는 결심, 소라가 애자처럼 살기 싫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애자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 나기가 폭력적인 사랑의 파편을 가슴에 안고 삵이라는 가게에서 사람들을 맞는 풍경... 이 모든 것은 ‘고통 속에서도 이어지는 삶’ 이라는 테마를 응시하게 한다.
나기가 나나를 때리며 했던 말은 두 번째 독서에서 더욱 깊게 박힌다. “이걸 잊어버리면 너는 남의 고통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야.” 이 문장은 마치 주인공들을 넘어 독자에게도 던지는 경고 같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남의 아픔을 잊고 살아가는가? 얼마나 자주 우리는 누구의 상실 위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지어올리는가?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 책이 그것을 ‘악’이라고 단순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저 누군가는 상처를 주고, 누군가는 받으며, 누군가는 그 상처를 마치 실타래 풀듯 풀어헤쳐보려 애쓴다. 이런 복잡한 얽힘 속에서도 출산을 결심하는 나나처럼, 삶을 계속하는 방식을 찾으려는 이들이 있다. 이 지점이 이 작품이 품은 희망이자, 동시에 그 희망의 씁쓸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처음 읽었을 때 놓쳤던 감정들이, 두 번째 읽기엔 지표를 갖춘다. 예를 들어 소라가 나나의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분노는 단지 ‘네가 왜 내게 말 안 해?’라는 서운함이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애자의 부서진 삶을 대물림할까 두려워하는 절망과, 생명을 품은 동생에게 서투른 질투를 느끼는 인간적 연약함이 섞여 있다. 두 번 읽으면 그 농도가 짙어진다. 책을 덮는 순간,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문장이 그냥 작중 인물의 다짐이 아니라 독자 자신을 향한 권유처럼 들린다. "계속 읽어보시겠습니까? 계속 삶을 이어가보시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의 생에 개입한다. 한 번 읽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펼쳐 읽는 과정 속에서 독자가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게 만든다. 그 사이에 어떤 깨달음이 피어나고, 어떤 상처가 다시 뒤집힐지 모른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삶을 경신하듯, 독자도 이 책과의 재회 속에서 무언가를 갈고닦게 된다.
결국 이 소설 속 사람들은 모두 불완전하다. 부서진 애자, 마음이 메말라가는 소라, 이상한 폭력 속에 성장해가는 나나, 잃은 사랑 앞에 흔들리는 나기, 그리고 그 밖의 인물들... 모두가 자기만의 파편을 안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에게 파편 하나씩을 건네며 이어나간다. 이 연결을 통해 탄생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나는 출산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우리 앞에 놓는다. 세상이 잔인하고 이상하더라도, 태몽 속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것은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에 맞서 더 넓은 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애자는 무너짐 속에서 완성에 이르고, 소라는 애자의 삶을 되새김질하며 자기 길을 찾는다. 나기는 혐오하는 이를 바라보았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며 현재를 견딘다. 이렇듯 인물들은 무너지고 다시 서며, 무언가를 놓치면서도 또 다른 것을 움켜쥐는 반복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이 책을 블로그에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다.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두 번째 읽으면 달라질 겁니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인간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나기의 말처럼, 이 책은 독자를 사람이게끔 하는 질문들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독자가 각자의 삶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더 읽고, 더 생각하며, ‘계속해보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되뇌게 된다.
중요 포인트 정리
애자의 붕괴와 완성: 상실 후의 무너짐이 오히려 어떤 의미에선 완성으로 읽힘
나나의 출산 결심: 태몽을 통한 생명의 의지, 폭력 속에서 되새기는 타인의 고통
나기의 경고: 남의 아픔을 잊으면 괴물이 된다는 인상적인 메시지
두 번째 독서의 의미: 한 번 읽어서는 잡히지 않는 의미를 재독을 통해 발견
인물들의 연쇄적 상처와 연결: 모두가 불완전하며,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이 섞여서, 이 책은 단순하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계속 살아갈 것인가, 계속 읽어볼 것인가, 계속해보겠다는 다짐 속에 어떤 희망이 깃들어 있는가? 그 답변은 아마 각 독자의 몫으로 남을 테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책은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고, 재차 펼쳐들 수록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다. 이들의 상처와 희망을 따라가며, 나 또한 계속해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