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공포증과 트라우마 극복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자의 플랜B

by 애론

나는 운이 좋게도(좋은건지 모르겠으나), 회사에서 맡은 업무가 경영지원 스태프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출장을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현재의 회사로 이직하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스태프처럼 국내에서의 지원업무만 하였으나, 세계로 뻗어나가고 싶어하는(?) 현재의 회사로 이직하고 난 후, 해외 출장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대규모 워크샵을 위한 답사, 진행, 해외 법인의 지원, 설립, 부동산 서칭, 공사진행 등 여러 기회를 통해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도시로 출장을 다녔었고,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즐겼다. 공항이 주는 설렘, 뭔가 여행이 아닌 프로페셔널한 느낌의 비행, 낯선 도시의 풍경과 냄새, 사람들. 오랫동안 스태프를 하던 나였기에, '나, 성공했나봐...' 라는 쓸데없는 망상을 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해외에서의 비즈니스가 적어지고, 맡은 업무가 달라져 해외 출장의 기회가 없었다. 대신 본사가 제주에 있는 특성상, 한 달에 한 번씩은 제주로 출장을 가고 있다. 지인들은 부럽다고 하지만, 사실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한국의 한 도시를 가는 것이고, 오피스도 업무단지에 있기에, 별다른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느끼는 제주에 대한 환상이 잦은 출장으로 인해 소모되고, '제주 = 오피스'라는 드라이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항을 가면 설렌다. 비록 인천공항같이 화려한 면세점을 즐길 수는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 비행 전의 설렘은 내 기분 업 시킨다.


그러나, 나의 비행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렇다. 난 비행공포증을 갖고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여러 출장과 여행 등으로 나는 비행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오히려 색다른 즐거움으로 여겼었다. 어린 시절, 해외에서 공부하는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오는 서글픈 상황에서도, 정말 한심하게도 비행은 즐거웠었다.


그렇다면 갑자기 왜 없었던 비행공포증이 생겼을까? 전말은 다음과 같다.


재작년, 안식휴가를 갖고 가족들과 여행을 갔다. 지금까지 너무나 바쁘게 에너지를 소진하고 살았기에,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다. 물론 프로젝트 진행 중이어서, 하루에 30분씩 일을 하긴 했지만, 그냥 나가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휴양지를 돌아다니면서, 이른바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했고, 여러 도시를 거치면서 즐거운 한 달을 보냈다.


그렇게 즐겁게 보내고 돌아오는 날, 방콕에서 인천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개인적으로 이 정도 거리는 LCC를 타도 된다는 생각으로, 국내 E항공사를 탔다. 가족들이 있었기에 저렴한 가격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한창을 대기하다,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피곤에 지친 우리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했다. 이륙 직후 5분 정도 지났을까, 비행기가 갑자기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승객들은 갑자기 발생한 상황에 비명을 지르고, 나 또한 겁에 질렸다. '비행기는 이륙할 때랑 착륙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데', '이거 떨어지기 시작하면 어떻게하지?' 수없이 많은 터뷸런스를 경험해봤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너무나 당황했다.


다행히도 수초 간 크게 흔들렸던 기체가 안정이 되고 계속 고도를 높여, 정상적으로 순항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무엇이었는지? 심각한 기체 결함이 발생한 건 아닌지?하는 불안과 걱정으로 4시간을 뜬눈으로 보냈고, 안정적으로 내렸을 때는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흔들렸던 이유에 대하여서는 착륙할 때 즈음, 랜딩 방송에서 기장이 설명을 해주었다. 방콕 공항에서 여러 비행기가 밀려서 이륙하던 중, 앞서가던 비행기의 라인을 뒤따라가서, 기류가 급변해서 크게 흔들렸다고. 그걸 왜 이제서야 착륙 직전에 얘기하냐라고 욕을 해주고 싶었던걸 겨우 참고, 힘들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농담처럼 하마터면 죽을뻔했다고 얘기를 하면서, 기억 속에 그 일을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주 출장을 가게 되었고, 그래도 종종 있는 출장였기에 큰 생각 없이 탑승을 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고 조금씩 뜨는 기분이 느껴졌다. 그 순간,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공포가 떠오른 것이었다. 평소에 트라우마를 운운하며, 경험해보지 못한 단어를 쉽게 썼었는데 실제로 그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한 시간 동안 팔걸이를 꼭 붙잡고 불안에 떨며 비행을 했다. 살짝 흔들리거나, 방향을 잡기 위해 선회를 할 때에는 마치 떨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창밖은 쳐다볼 생각조차 못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난 계속 비행 공포증을 안고 살고 있다. 공포증이 생긴 이후에 지금까지 거의 스무번이 되도록 비행을 하고 있지만, 살짝 나아지긴 했어도 비행에 대한 부담 자체가 줄어들진 않았다.


극복을 위한 팁으로, 김포로 돌아오는 비행기의 오른쪽 창가 야경이 예쁘다는 얘기를 듣고, 그쪽에 앉아서 야경을 바라보면서 온 적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그 모습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이었을 것이다. 멋진 야경의 감상보다는 '저기로 떨어지진 않겠지?' 하는 의심만 들었다. 그만큼 나에게 창밖을 보는 건 용기가 필요했고, 그 한 시간의 야경 감상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발버둥의 시간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어려웠던 일들은 상황에 따른 경중은 있겠지만, 결국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특정한 상황, 특정한 공간, 특정한 관계 등등, 이런 나에게 부담이 되었던 특정한 모든 것들은 결국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부담을 주는, 피하고 싶은 것들이 되지 않나 싶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무리하게 부딪혀 이겨내려는 동안 그때의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덧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스무번이란 비행 동안 괴롭게 노력한 것의 결과를 생각해보니, 더더욱 그 극복은 어렵게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이겨내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비행기를 못 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많이 불편할 뿐. 하지만 그 불편은 너무나 괴로운 시간을 여러번 버티면서, 나 자신을 몰아붙이면서 극복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고통보다는, 회피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번 달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못 간 제주 출장을 다시 가야한다. 도무지 제주는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김포로 돌아오는 밤 비행기의 오른쪽 창가는 앉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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