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없는 책, 똘끼 가득찬 천재가 쓴 책
1. 블라인드의 살 때문에 A의 실루엣은 수평의 조각들로 잘린다. 그러나 이제는 침실의 창 뒤로 사라지고 없다 (p 29)
2. 그 미소 속에는 신뢰와 우롱이 동시에 깃들어 있고, 어떻게 보면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p 30)
3. 십자형 창살이 차의실루엣을 크기가 같은덩어리 두 개로 수평분할하고 있다 (p 64)
4. 오른손이 빵을 집어 입에 가져간다. 오른손이 빵을 식탁보 위에 다시 높고 나이프를 잡는다. 왼손이 포크를 잡는다. 포크가 고기를 찌른다. 나이프는 고기를 자른다. 오른손이 나이프를식탁보 위에 높는다. 왼손이 포크를 오른손에 넘긴다. 포크는 고기 조각을 찔러 입으로 가져간다. 입은 오므렸다 폈다 하는 동작으로 씹기 시작한다. 그 동작은 얼굴 전체, 광대뼈, 눈, 그리고 귀에까지 미친다. 그동안 오른손은 다시 포크를 잡아 왼손에 건네주고, 빵을 잡고, 나이프를 잡고 다시 포크를...(p 75)
5. 과거 속에서 멀어짐에 따라 진실성도 멀어진다 (p. 113)
6. A는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있다. 맞은편 골짜기에서 태양이 수평으로 경작지 위쪽의 미개간지에 드문드문 있는 나무들을 비춘다. 나무의 아주 긴 그림자가 굵은 평행선으로 땅 위에 횡선들을 긋고 있다 (p 143)
이건 도대체...나는 글자를 보고 있는 건지, 문장을 읽고 있는 건지 ...
이런 충격적인 책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이후로 처음이다.
이건 묘사가 아니라 관찰을 뜯어보는 것이다. 이러다가 원자 수준의 미시 세계까지 볼 것 같은 느낌...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의 '질투'.
프랑스 식민지 아프리카가 배경이다. 화자는 (아마도) 남자일 것이며 사실상 아무런 내용이 없다. 그저 그가 아내 A와 이웃집 남자 프랑크, 이 두 사람을 관찰하는 것만 150여 페이지.
방 벽의 묘사, 햇볕이 들어오는 방향, 창틀의 기하학적인 구조를 아주 집요하고 변태적으로 풀이되어있다. A와 프랑크는 식사도 같이하며 서로 책도 빌린다. 지네를 발견해서 프랑크는 지네를 죽인다.
감정도, 화려한 수식도 배제된 묘사.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있지만 사실 가장 '덜' 객관적인 관찰이 아닌가 싶다. 질투하는 화자의 시선은, 눈 먼 장님과 같이 아내와 프랑크의 사소한 행동만으로 과대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집중이 안되었던 책. 그래서 마지막 20-30장은 그냥 대충 넘겼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그게 바로 작가가 노렸던 것일까? 화자의 질투 섞인 고통을 독자도 느끼게 하려는 의도 말이다. '똘끼' 가득차보였던 작가가 사실상 천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