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arti 아띠 Aug 08. 2019

[책] 김영하 산문 말하다

작가 김영하 소설은 한번도 읽지 않은 사람의 후기

작가 김영하의 소설은 읽어본적이 없다. 그 이유가 웃기다.

너무나도 대중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좋아하거나 좇는 그 모든 것들은 난 회피한다.

김영하가 쓴 글이라곤 오직 그의 신간 에세이 「여행의 이유」만 읽었다. 이건 그냥 내가 여행을 너무 가고 싶었고, 여행에 관련한 책으로 어떻게든 대리만족을 하고싶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이유」를 읽고 나서 김영하의 필력에 놀랐다.

괜히 유명한건 아니었다. 그래서 김영하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 그의 산문 「말하다」를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김영하가 이제껏 강연한 내용들과 인터뷰가 집약되어 있다.

그는 전업 작가이며 회사를 다녀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작가가 아니나다를까, 그럼에도 다수가 회사원인 우리나라의 '현실'을 통찰력있게 바라본다. 어떻게보면 그가 회사를 다닌적이 없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다. 때론 그 현실 '안'에서보다는 '밖'에서 봐야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애인과 헤어진 누군가 그랬다: "헤어지고 나니 그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곁에 있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단점이 부각된다. 남남이 되어야 '객관적'으로 그 사람을 볼 수 있어 장점까지 보이기 시작하며 그게 바로 실상일수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바람은 늘 그런 식이기 때문입니다. 대학만 들어가라, 졸업만 해라, 결혼만 해라, 아이만 하나 낳아라, 그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지만 아무 조건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날'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p.18)"


김영하가 20대 시절 본인 아버지의 꿈이라던 ROTC를 중도 포기한 부분이다. 정말 조건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다는 부분에 격하게 공감했다. 나도 어쩌면 이제껏 부모님의 바람이 없어지길 기대하며

'아직도' 어느 정도의 나에대한 희망하는 모습이 있다는 점을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부모님도 20-30년 나와 우리 오빠를 치열하게 양육했고 그런 부모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주라고 요구하는 것 또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닐까.





"비관적 현실주의는 인상을 쓰고 침울하게 살아가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관적 현실주의에는 개인주의가 필수적입니다. 집단은 어딘가로 쏠리게 마련입니다. (p.24)"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려면 남과 다르게 사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면도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다수였을까요? 아닙니다. 대부분 수감자들은 헛된 소문들에 휩쓸려다녔습니다.(p.26)"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p.28)"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엄친아나 엄친딸 같은 말도 의미를 잃을 것입니다. 자기만의 감각과 경험으로 충만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그것도 인정하게 됩니다.(p.35)"


김영하는 우리에게 독립된 정신과 강한 내면을 갖도록 요청한다. 그러면서 그는 예술을 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소위 '감성근육'을 발달시키는 독립적인 개인이 되려고 노력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시적인 쾌락이 아닌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위한 방법이며 난 그의 주장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앞서 언급했지만, 난 보통 대중이나 다수가 좇는 그 모든 것에 한발자국 물러선다, 고의적으로. 아주 작은 예를 들자면 초등학교 CA시간에 비즈공예나 한지공예를 했었는데, 난 의도적으로 선생님이 시키는 것과 다른 작품을 내놨다. 그게 괴기스럽고 이상하더라도 그저 남들과 똑같은 게 싫었던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회문제에 대해 대부분 시위현장에 나가더라도 난 일부러 집에 머물렀다. 과연 지금 당장, 시위하는 행동이 가장 현명할까 고민부터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변화를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더 낫지 않을까 말이다. 이와 같이 어렸을 적부터 가졌던 이러한 나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성이 김영하가 말하는 개인주의와 어느정도 일상통하다는 점이 내심 좋았다.


또한 김영하가 말하는 예술가로서의 역할도 꽤 하는 것 같다. 연기와 글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특정한 '끼 있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모두 예술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 김영하가 말하는 마음 속에 꼭꼭 숨어있는 '어린 예술가'를 구해야 자기 본성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자기 본성에 충실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우며 오히려 예술성을 발휘하는 행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아닌가 싶다.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미래는 우리 모두가 다중의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 중의 하나는 예술가였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뉴욕에서 택시를 탔더니 좌석 앞에 웬 배우 프로필이 붙어 있더군요. 알고 보니 그 택시 기사는 연극배우였습니다. 무슨 배역을 연기했었느냐고 묻자 당당하게 리어 왕이라고 말하더군요. 리어 왕의 명대사가 생각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택시 기사이면서 연극배우, 은행원이면서 화가, 골프선수이면서 작가인 세상이 제가 그리고 있는 미래입니다. (p.77)"


작가 김영하는 작가이면서 강연자라고 할 수 있으려나? 김영하나, 그 뉴욕의 택시기사/배우나 다중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부럽고, 그 정체성 중 하나라도 예술 영역에 속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삶일 것이다.


뭐 어쨌거나, 이 책에서는 대부분 작가 김영하로서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김영하에게 작가란 "지독하게 나쁜 기억도 문학적 자산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신적 연금술사"라고 한다. 하지만 연금술사인 그가 막상 소설 창작할 때 '작가의 의도'라는 건 본인도 모른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가 말하길, "제가 전지전능한 신이고 인물들이 제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인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저는 얼른 가서 문을 열어줘야 되는 거죠 (p.91)"라고 고백했다. 처음 글쓰는 행위는 작가가 시작하지만, 쓰다보면 스토리가 '저절로,' 마치 살아는 생명체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아직 김영하 소설을 안읽었지만, 그 의 책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던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꼭 읽어 그의 스토리에 푹 빠지고 싶은 동기가 생겼다.




[그 외 기억하고 싶은 독서 소설 글쓰기와 관련된 그의 말]


"자기 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에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조용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 소박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자기 침대에 누워 어제 읽던 책을 이어서 읽는 삶. 자기 서재와 마음속에서만큼은 아무도 못 말리는 정신적 바람둥이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세상이 제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입니다. (p.181)"
"소설을 통해서 획득한 타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실제의 인간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p.172)"
"역사상 수많은 걸작들이 본래 금서였다. (p.136)"
"자기 내면의 어떤 억압들, 부모로부터의 억압, 학교로부터의 억압, 성적인 억압, 이런 것들을 토로하고 폭로하는 과정에서 글쓰기의 진정한 기쁨이 나온다. (p.136)"
"소설의 '비경제성의 경제성'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영화가 정말 경제성만으로 이루어진 군살 없는 매체라며느 소설에는 그것과는 다른 '비경제성의 경제성'이 요구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불필요한 것들, 우회나 잉여가 야기하는 효과인 거지요. 그런 것을 잘 구사하기 위해서라도 서사적 리듬에 대한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어떻게 늦출 수 있는지도 알게 되니까요. 영화의 경제성이 갖는 한계와 달리 소설이 허용하는 잉여,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게 되는 거지요. 이거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중요한 장점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하게 됩니다. 소설에서는 꼭 필요한 부분과 꼭 필요하지 않은 이런 잉여들을 어떤 리듬으로 엮어야 하는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습니다.(p. 97)"
"하나의 블록을 복사하여(CTRL+C) 한없이 따붙인(CTRL+V) 것 같은 단지의 구조는 어린아이들이 길을 잃기에 딱 좋았습니다. 똑같은 놀이터, 똑같은 가로수, 똑같은 건물.(p. 96)"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들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굴복을 거부하는 자들이니까요.(p. 56)"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 우리 자신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기 전까지 몰랐던 것들, 외면했던 것들을 직면하게 됩니다.(p. 57)"
"글쓰기를 통해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바로 대면하기 시작(p. 57)"
"소설을 많이, 깊이 읽는 사람은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다양한 인물을 알고 있는 사람, 겪어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그러지 않은 이들보다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뉴욕 뉴스쿨 대학 심리학과의 연구에 따르면, 소설 중에서도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보다 인물 묘사에 집중한 소설을 읽는 이들이 훨씬 더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의도를 잘 읽어낸다고 합니다. (p.158)"
"진짜 깊은 수준의 소통은요, 대화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인간과 인간이 정말 깊은 수준의 교감과 공감을 하게 해줍니다. 먼저 작품 속 인물들과 소통하는 거예요. 제가 겪은 가장 깊은 소통은 동료 작가와의 만남에서 경험한 적도 없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경험한 적도 없어요. 고요이 혼자 집에서 읽은 책의 내용과 거기 나오는 인물들, 그러니까 책 자체와 소통했던 순간이었어요. (p.17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