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살리아 Sep 10. 2017

#6. 바다가 어는 곳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빗살무늬의 연두색 좁은 통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백여 개의 조명이 천장 위에 줄을 맞춰 빛을 발하는 밝은 실내가 나온다. 로컬들만 찾아오는 일종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그곳 식당의 주 메뉴는 겉에는 허브가 뿌려져 있고 속에는 야채와 저민 고기가 들어가 있는 러시아식 만두와 닭 가슴살과 납작한 면만으로 깊은 맛을 우려낸 수프다.

 

“와! 이 수프는 다시 먹어도 일품이야!”


수트를 입은 두 명의 이방인 중 나이가 많은 남자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수프를 떠먹고 있다. 가운데 테이블을 두고 건너편에 앉은 4명의 러시아 인들은 탁자 위에서 카드게임을 하다 말고 두 명의 이방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남자의 과한 행동에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카일, 조용히 좀 하고 드시죠. 우리가 왔다고 동네방네 소문 낼 참이에요?”


“제이슨. 이렇게 완벽한 요리 앞에서는 감탄사를 내줘야 예의야!”


게걸스럽게 남은 국물을 들이켜던 카일에게 제이슨은 손에 든 안대를 펼쳐 보였다.


“아까 이 그림을 보고 이곳으로 오자고 한 거죠? 이 그림이 대체 뭡니까?”


카일은 완전하게 비워낸 수프 그릇을 내려놓고는 이번에는 포크를 들어 옆에 있던 만두를 입안 가득 구겨 넣기 시작했다.


“뭐긴 뭐야. 해골바가지가 욕조에서 변태처럼 둥둥 떠있는 거지.”


“아. 그건 저도 자세히 보니까 알겠어요. 그거 말고, 아까 분명히 이 그림을 보고는 마지막 안대라고 말한 거 같은데요.”


“아! 그래. 내가 그랬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또 마지막인 건 어떻게 안거고요? 그리고 왜 여기로 온 거죠?”


“아. 이 자식아 하나씩만 질문해!”


카일은 이제 굶주린 배를 채웠으니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때라고 생각한 듯했다. 안대의 그림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건 일종의 표식이야. 여기 이 해골의 갈비뼈가 몇 개지?”


“한 개뿐이네요.”


제이슨은 조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것에 개의치 않은 듯 카일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 지금 갈비뼈가 몇 개인지 세워봐!”


“안간의 갈비뼈는 24개죠. 척추는 26개, 머리 8개, 얼굴 14개, 인체에 있는 206개의 뼈를 다 말씀드려야 되나요?”


“로이는 자기만의 룰이 있어. 늘 한 번에 스물다섯 개의 안대를 가지고 있어. 안대에 새겨진 이 해골들의 갈비뼈 개수가 일종의 넘버링 같은 거지.”


“그러니까 갈비뼈가 다 있는 해골이 그려진 안대는 스물네 번째 안대일 테고 이건 갈비뼈가 한 개뿐이니 첫 번째 안대라는 말씀인 건가요?”


“아니, 그 반대. 갈비뼈가 한 개 남은 해골 그림이 마지막 번호야.”


“그렇군요. 그런데 갈비뼈는 총 스물네 개인데, 스물다섯 개의 안대라고 하셨죠? 마지막 번호가 24가 아니라 25라는 건가요?”


“그래. 첫 번째 안대는 좀 더 흉 한, 해골이 되기 전 시체 그림이거든. 사실 이게 검은색 펜으로 그린 그림이라 구분이 잘 안 가지만 욕조 속 물에 떠다니는 해골이 아니라, 피로 가득 찬 욕조 속 시체부터가 시작이야.”


“윽. 저는 보고 싶지 않은 그림이네요.”


“아무튼 아까 그 여자의 안대가 갈비뼈 한 개의 해골이었으니, 25번째 마지막 안대를 소진했을 테지. 약쟁이가 약이 떨어졌으면 약을 사러 가야 되고, 저격수가 총알이 떨어졌으면 총알을 구하러 가야 될 거 아니야.


“그렇다면, 그 총알을 가진 사람이 여기, 블라디보스톡에 사나 보군요.”




“드미트리!”


“이게 누구야! 로이! 오랜만에 나타났어!”


“잘 지냈어?”


“나야 뭐. 늘 그림 속에 파묻혀 지내지.”


로이와 반갑게 포옹한 남자는 흑발의 곱실거리는 단발머리를 하고, 검은색 뿔 테를 쓰고 있다. 코와 턱 밑은 덥수룩한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짙은 갈색의 그을린 피부에 온 몸에 문신이 가득 그려져 있어 온전한 피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손가락 마디마디까지도 빼곡히 그림이 차있었다. 로이는 자연스럽게 실내를 어슬렁거렸다.


“여긴 늘 두꺼운 코트를 껴입어도 추운 곳이야.”


“엄살 피우기에는 아직 일러. 아직 바다가 얼지 않았다고!”


“그래. 이런 추운 곳에서 살고 있는 넌 정말 대단해. 심지어 반팔을 입고 있다니!”


“보드카 없인 살 수 없는 곳이지.”


드미트리는 멀리 서 온 친구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아끼는 것을 건네 듯 반쯤 비워진 보드카를 내밀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 로이는 바로 넘겨받아 목구멍으로 그것을 단숨에 들이키며 말했다.

 

“이제야 반팔 입고 있는 네가 이해가 되네.”


“또 그걸 가지고 왔어?”


드미트리가 묻자, 로이는 그에게 미소를 띠며, 코트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호주산 립밤, 말보로 레드 한 갑, 독특한 대칭구조의 무늬가 새겨진 라이터, 라크롤 핑크 구아바 맛 캔디, 선글라스, 구겨진 종이 들, 한 뭉치의 회색 안대가 테이블 위를 금세 난장판으로 해 놓았다. 그중에 돌돌 말아진 안대를 드미트리에게 던졌다. 그는 잽 싸게 로이가 던진 것을 낙아 챘다. 그런 그에게 로이가 소리쳤다.


“일단 열 개만 먼저 그려줘.”


“나머진?”


“급하게 가볼 때가 있어서, 1시간 뒤에 다시 가지고 올게.”


로이는 다시 남은 물건들을 주섬주섬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곳에 있던 몇 장의 구겨진 종이들 중에 열차 티켓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해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오는 오늘 날짜의 2등석 티켓 두 장이었다.


“아직도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필요도 없는 티켓을 끊고 다니나?”


그걸 본 드리트리가 물었다.


“뭐. 굳이 패턴을 바꿀 이유가……”


“아이고. 그 패턴이야기는 지겨우니 집어치워. 그래서 이번엔 어떤 커플이 네 덕분에 8일간 단독 객실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지?”


“체리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숙녀.”


또 한 번 로이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트래블러: 죽음에는 차별이 없다





지금 몰입했다면, 구독하세요!



처음부터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5. 시베리아 횡단 열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