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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Sep 13. 2017

#7. 타투이스트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검은 형체의 두 남자가 드미트리 앞에 마주 섰다. 그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어색하게 서있었다. 먼저 입을 뗀 건 드미트리였다.

 

“보드카?”


“사람을 찾고 있어요. 보드카를 원했다면 건너편에 있는 바를 찾았을 겁니다.”


카일이 정중하게 대꾸했다.


“난 또. 옷차림을 보아하니, 원하는 게 이건가 싶었지.”


드미트리는 들고 있던 보드카를 대신 들이켰다.


“그렇게 얇게 입고, 이 추위를 버티는 게 신기하네.”


드미트리가 넌지시 던진말에 제이슨은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빨리 수트 안쪽에 넣어 둔 회색의 안대를 드미트리에게 내보였다.


“이 그림을 알고 있나요?”


드미트리는 마시던 보드카에 입을 떼지 않고 젖혀진 고개를 그대로 둔 채 눈알을 아래로 굴렸다.

 

“여기 이 밑에 조그마한 그림입니다. 자세히 보셔야……”


제이슨은 노파심에 안대를 들어 드미트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보다 더 빠르게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찾는 건가요, 아니면 그 안대의 주인을 찾는 겁니까?”


드미트리는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보드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둘 .”


옆에 있던 카일이 대답했다.


“전자라면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요.”


“후자라면?”


“나도 모릅니다. 그 안대의 주인이 워낙 바람 같은 친구라. 어디서 지금 무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바람 같은 친구라...... 당신의 그 바람 같은 친구가 오늘 이곳을 왔다 가진 않았습니까?”


카일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구겨진 열차 티켓을 들어 보였다. 로이가 흘리고 간 오늘 날짜의 블라디보스톡행 2등석 열차 티켓이었다. 드미트리는 내려놓았던 보드카를 다시 손에 들고 마저 다 들이 켰다.


“그 열차 티켓의 주인을 왜 찾는 건가요?”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로 드미트리가 물었다. 카일은 차분한 어조로 대응했다.

 

“자세한 건 사정상 말씀드릴 수 없어 유감입니다. 우리 예상이 맞는다면 이 안대에 새겨진 그림을 당신이 그렸을 테지요. 그리고 안대의 주인은 오늘 이 곳을 다녀갔고.”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어요. 알고 있다고 해도 말할 수 없고, 물론 알지도 못하지만. 뭐. 이 말도 당신들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믿어요. 우리도 로이의 친구입니다. 물론 이 말을 그쪽이 믿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들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일었다. 드미트리는 두 남자와는 다르게 한 곳에 서있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그가 방금 전과는 다른 안정적인 음성으로 두 남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트래블러인가 보군요.”


“아…… 그.. 그렇죠. 나이 많은 형이랑 세계일주 하려니까 힘드네요. 하하.”


제이슨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참 못하네.”


“네?”


드미트리는 앞에 서 있는 두 남자의 옷차림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 복장으로 여행을 다닌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듯 제스처를 취했다. 당황한 제이슨은 변명에 단어들을 찾느라 애를 썼다.


“놀랄 것 없어요. 당신들 세계에서 말하는 트래블러가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으니까. 여권도 필요 없고, 굳이 비행기나 기차를 탈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 물론 택시를 탈 일도 없고.”


드미트리는 그들을 곧장 지나쳐 현관문 앞에서 섰다.


“그리고…… 문을 열 필요도 없겠지.”


드미트리는 닫혀있던 현관문을 열었다 닫았다. 문 위에 달려있던 방울모양의 장신구가 명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정체를 들켰다는 생각에 제이슨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들었다. 그와 다르게 계속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던 카일이 여전히 변함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때로는 택시를 잡아 타거나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아!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것이 당신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라는 것을 아니까요.”


“우리를 잘 아는 걸 봐서는 제대로 찾아온 것 같네요.”


“글쎄요. 제가 두 신사분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팔짱 낀 자세로 가슴을 잔뜩 웅크리고 서있던 제이슨이 좀 더 앞쪽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고 서있는 카일에게 물었다.


“로이가 나타날까요?”


“아마도.”


“…”


“그 타투 청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근데 어떻게 로이를 잡죠?”


“잡을 수 없지.”


“잡을 수 없다고요?”


“잠시 잡아 두는 거지.”


하늘은 어느새 어두운 빛깔로 물들었다. 그에 맞춰 졸로토이 다리의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 다리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가로등 불빛과 더불어 어두운 밤의 캔버스에 오렌지색으로 칠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채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황금 다리라고 불릴 만하네요.”


제이슨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단지 웅크렸던 상체가 조금은 펴졌다. 카일은 옆에 나란히 서있는 제이슨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블라디보스톡은 처음인가?”


“아뇨. 열일곱 살 때 처음 와봤어요. 그러니까 한 10년 전인 거 같네요.. 그때는 제가 서있는 곳이 러시아 땅인지도 모르고 돌아다녔죠. 트래블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거든요. 그때는 스스로 잘 컨트롤하지 못했어요. 저기 다리 너머에 있는 곳이었는데……”


“루스키 섬?”


“네! 루스키! 그때는 꿈을 계속 꾸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잠이 들었을 때 주로 트래블을 했었는데, 도착지점에서 눈이 떠지더라고요. 일종의 잠꼬대하듯 시작해서 몽유병 환자처럼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침대 위였거든요. 그러고 나면 드는 생각이 ‘아. 또 오늘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구나.’ 했죠.”


“꿈속이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다행이네.”


“하하. 그러게요. 근데, 그땐 저 졸로토이 다리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마. 네가 루스키 섬을 다녀간 후 다음 해에 짓기 시작해서 4년 뒤에 다리가 완공됐을 거야. APEC 정상 회담 개회에 맞춰서 건설됐으니까.”


“아, 그렇구나. 지구는 계속 진화하네요.”


“글쎄. 그게 진화 일지는…… 하지만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만은 확실해.”


“그럼, 우리 같은 트래블러들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진화… 아니 변해 있을까요?”


카일은 제이슨의 물음에 지난 일을 잠시 떠올렸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어느 한가한 오후 날이었다. 그와 같은 트래블러 여럿이 옥상에 모여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그곳에 있던 누군가가 지금의 제이슨과 같은 질문을 모두에게 던졌고, 그곳에 있던 모두는 그 화두 한 가지로 서로의 각기 다른 상상력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날을 회상하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모를 일이지.”


제이슨은 다리를 내려다보던 일을 멈추고 몸을 돌아섰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를 얼굴로 내비치고 있다. 더욱이 그 장소가 아주 춥고 바람이 부는 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듯이. 다른 주제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이 고역스러운 시간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인걸 깨달은 제이슨은 카일에게 로이에 대해 물었다.


“근데 로이는 언제부터 자신이 트래블러인지 각성하게 된 거죠?”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트래블러: 죽음에는 차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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