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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Sep 30. 2017

#15. 잊혀지는 것들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아. 배 터지겠어요.”


지훈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빈 접시들이 잔뜩 깔려있다.


“마지막 하나 더 남았어.”


카일은 제이슨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내 제이슨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행동이 사실은 두 시간 전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아. 진짜 괜찮아요. 진짜 세계 맛 기행을 한 것 같네요. 너무 배불러요.”


지훈은 배를 문지르며 힘겨운 표정을 내 비췄다. 두 시간 전, 돌아간다는 그를 카일이 억지로 앉혀놓고는 전 세계 대표 음식들을 하나씩 내왔다. 모로코의 타진, 멕시코의 타코, 헝가리 굴라쉬, 스페인 빠에야, 오스트리아 슈니첼, 태국 팟타이, 인도 탄두리, 터키 케밥, 중국 훠궈, 일본 스시까지 뷔페 같은 한 상차림이 지훈 앞에 순식간에 놓였다. 물론 제이슨이 직접 그 나라의 길거리에서, 상점에서, 레스토랑에서 하나씩 공수해 온걸 지훈은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음식?”


카일의 말에 지훈은 손사래를 쳤다.


“비빔밥? 갈비탕? 순댓국? 삼겹살? 어후. 더 이상 못 먹어요!”


지훈과 카일이 실랑이를 할 때 에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서 냄비를 꺼내왔다.


“설마 누나 거기다가 라면을 끓인다는 건 아니죠?”


그 사이 제이슨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다. 그가 에지가 들고 온 냄비에 콸콸 쏟아붓는 것은 갈비탕도 순댓국도 아니었다. 카일은 냄비 속 음식을 바라보며 흡족해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지막은 누룽지 가야지.”




배가 부른 네 남녀는 각자의 위치를 고수했다. 에지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고, 제이슨은 두 시간의 세계일주에 나른해졌는지 욕조에 몸을 담갔다. 거실에는 카일과 지훈이 남아있었다.


“들고 있는 그건 뭐지?”


카일은 지훈이 가지고 있던 안경에 관심을 보였다. 콜드플레이 공연장에서 에지가 쓰고 있었던 안경이다.


“사람을 식별하는 안경이에요. 아직 태양빛에만 작동해서 해가지면 별 쓸모가 없어요.”


“사람을 식별하는 안경이라……”


“몇 가지 조건을 입력해서 부합되는 것을 읽어 들여요. 최대 1.5Km 까지 스캔이 가능해요. 인간 시력 한계를 보안해주죠. 근데 아직 완벽하진 않아요.”


카일은 지훈에게 안경을 보여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지훈이 건 낸 안경을 받아 들고는 착용을 시도했다.


“지금은 그냥 평범한 안경이에요. 실내에서는 작동되지 않거든요.”


카일은 안경을 벗지 않은 채 지훈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안경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이건 왜 개발한 거지?”


“그냥 요. 별 뜻은 없어요. 예전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 싶으면 카메라에 담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찍힌 사진을 확인해보면 그때 눈으로 보고 느꼈던 감정들이 그 사진 속에는 담겨있지 않는 거예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인간의 망막을 카메라가 넘어설 수는 없겠구나. 그래서 카메라를 들이대기보다는 최대한 내 눈으로 그 순간을 담아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간이 늙으면 어쩔 수 없이 노환이 오는데, 그럼 결국 카메라가 넘지 못했던 망막의 위대한 여정이 끝나는 걸까? 인간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운명인가?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감내하라고 부여한 고통인 건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이걸 만들어봤어요. 인간에게 놓인 숙제와도 같은 숙명을 거슬러보자. 망막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뭐 그런 단순한 호기심 같은 거였죠. 뭐. 에지 누나처럼 누군가를 찾고자 하는 의뢰인이 꾸준히 생기면 돈벌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아. 그렇다고 이번에 누나한테는 돈을 받진 않았어요. 대신 공연을 보여주시긴 했죠. 뭐. 결국 이러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제 방 책상 서랍으로 들어가겠죠. 이런 게 사실 한 두 개가 아니거든요.”


지훈은 멋쩍은 듯 머리를 매만졌다. 카일은 안경을 벗어 지훈에게 건넸다.


“지훈이 너는 남극을 가봤나?”


“아니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 중 한 곳이긴 한데, 왜요? 가보셨어요?”


“인간이 언제 처음 남극점에 도달했는 줄 아나?”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19세기 위대한 누군가의 호기심과 모험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겠죠.”


“그랬지. 인간의 호기심과 모험심은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새로운 것에 확실한 동기부여가 돼지.”


“맞아요. 문제는 그런 호기심과 모험심이 나만 가지고 있진 않다는 거죠.”


“남극 탐험대는 두 남자의 라이벌 전이었어. 먼저 시도한 건 영국의 스콧 대령이었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위 90도 남극점에 최초 발을 디딘 사람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야. 아문센이 이끄는 탐험대가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에 남극점에 도달해. 그들이 도착했을 때 뭐가 보였을까?”


“쌓인 눈, 광활한 대지. 뭐 이런 것이 보였을까요? 아님 혹시 시체?”


“그들이 도착한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지. 특히나 사람의 흔적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어.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거야.”


“그럼 라이벌이었던 스콧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문센의 소식을 듣고 포기했을까요?”


“아니. 스콧 일행도 남극점 도달에 성공해.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펄럭이는 노르웨이 깃발을 봐야만 했지. 후세에 우리들은 남극을 정복한 아문센을 기억해. 스콧은 한순간에 잊혀졌어. 중요한 건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끝을 보는 사람이라는 거야.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깃발을 꽂은 아문센이야. 그러니 너도 아직 멈추지 마. 분명 네 뒤에, 어쩌면 너보다 더 앞서가는 누군가가 있을 거야. 그들보다 먼저 너의 깃발을 꽂아. 잊혀지는건 한 순간이야. 그전에 끝을 봐야지.”


카일의 두툼한 손이 지훈의 어깨를 다독였다.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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