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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Oct 09. 2017

#18. 만남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로이는 비치체어에 몸을 뉘었다. 선글라스를 통해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지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하늘의 색을 볼 수 있는 순간이다. 고요한 인피니티 풀장 너머의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태양은 조금씩 얼굴을 숨겼다.


세렝게티 중심에 위치한 이 호텔은 로이가 탄자니아에 올 때마다 머무는 곳이다.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자연과 가장 가까이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만끽하며, 자연과 동화되는 경험을 투숙객들에게 선물하기로 정평이 난, 호텔 체인이다. 여기 이 곳 세렝게티 초원 중심을 향해 버기 로드를 따라 달리면,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5성급 호텔을 만날 수 있다.


“유레카! 드디어 찾았네!”


호텔 가운을 걸친 늘씬한 한 여자가 로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맨발의 그녀는 마치 먹이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앞다리가 긴 암컷 하이에나 같았다. 로이는 노을빛에 취해 그녀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던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가운을 벗었다.


위아래로 화이트 칼라에 심플한 디자인의 비키니 차림이다. 볼륨 있는 봉긋한 가슴에, 길고 곧게 뻗은 다리, 탄탄한 힙라인은 화이트칼라의 비키니와 잘 어울렸다. 분명 주목할 만한 몸매의 소유자였으나 그녀의 먹잇감은 여전히 노을을 감상하며 풍류에 젖어 있을 뿐이다. 여자는 아무도 없던 고요한 풀장에 몸을 던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제야 로이가 고개를 돌렸다.


‘뭐지?’


풀장으로 뛰어든 여자는 잠영을 했다. 로이의 시선이 그녀의 곡선을 끝까지 따라갔다. 인피니티 풀장 끝 선까지 한 숨에 흘러간 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깊은숨이 터져 나왔다. 로이는 그녀의 뒤통수를 보았다. 그제야 선글라스를 벗고 자리에 일어섰다. 그녀가 남기고 간 물살이 노을빛에 반짝였다. 여자도 한 참을 풀장 안에서 저물어가는 태양을 감상했다.


로이가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캐치한 암컷 하이에나는 다시 얼굴을 담가 물속으로 숨어버렸다. 처음 점프했던 지점으로 움직였다. 로이도 풀장 밖에서 그 움직임을 천천히 따라갔다. 여자가 벗어던진 가운이 그곳에 있었다. 로이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잡았다. 다시 허리를 피려던 순간 풀장 안에서 물기둥이 일었다. 깜짝 놀란 로이가 순간적으로 뒷걸음 질 쳤다. 풀장 안을 두리번 거렸으나 여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고요해진 풀장, 아무도 없던 비치체어, 완전히 얼굴을 감춘 태양. 호텔에서 밝힌 조명만이 그 공간에 정말 로이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로이는 손에 든 가운을 바라보았다.


“그거 이리 줄래?”


로이가 서있던 뒤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에지?”


“천하에 바람둥이가 이렇게 감을 잃어서야.”


에지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놀랬잖아!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감성 팔이 멘트나 날릴 거면 집어치워. 가운이나 이리 줘.”


“어? 어. 그래. 미안. 여기……”


로이가 가운을 펼쳐 에지의 몸에 둘렀다. 두 남녀가 가까이 몸이 붙자 로이의 시선이 젖은 에지의 가슴골에 꽂혔다.


“에지. 뭐야.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날 꼬시려고 일부러 흰색을…… 미리 언질을 줬으면 내가 준비라도……”


로이가 능글맞은 웃음으로 농담을 흘렸다. 에지는 뒷걸음치며 가운을 제대로 입었다. 그녀가 허리끈을 묶을 때까지 로이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가있었다.


“야! 그만 좀 쳐다볼래?”


“에지. 그 가운……”


로이의 시선이 머문 에지의 가슴 부근에 호텔 이름이 적혀있었다.


“……킬리만자로?”


에지가 얼른 몸을 돌려,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로이가 그런 그녀 뒤를 따랐다.


“그 가운 여기 호텔 거 아니지? 킬리만자로에서 오는 길이야? 날 찾으려고? 혹시 잔지바르나 다르에스살람도 갔었어? 에지!”


로이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어깨에 손을 둘렀다. 에지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속삭였다.


“방으로 가자. 보여줄 게 있어.”




“빔을 쏠만한 곳이 없네.”


에지는 로이가 묵고 있던 객실로 넘어왔다.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용 미니 빔 프로젝터를 꺼내 들고는 주변을 이십 분째 두리번거리고 있다. 넓은 객실 어디에도 흰색의 벽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서있던 로이가 에지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네가 찾는 거라면 침실에 있어.”


사각의 캐노피가 쳐져 있는 침대가 침실 한가운데에 가득 차 있었다. 하늘거리는 흰색의 커튼을 들춰 로이가 벌러덩 누웠다.


“로이. 장난치지 마.”


에지가 짜증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를 로이가 힐끗 쳐다보더니, 자신의 빈 옆자리에 손바닥을 쳤다.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야. 로이.”


구겨진 미간을 하고는 에지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로이가 손가락으로 침대 바로 위 천장을 가리켰다.




“오웬은 3년 전부터 나자르를 만나왔던 거 같아.”


로이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에지가 가져온 사진이 그가 누워있던 천장 위에 확대되어 보였다. 에지는 화장대에 몸을 기대고 서서 준비한 말들을 쏟아냈다. 로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에지의 말을 경청했다.


“줄리의 죽음에 어쩌면……”


에지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그녀도 내뱉기 힘든 말이었다. 잠깐의 공백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로이는 왼팔을 들어 그의 눈을 가렸다. 에지는 천장을 쏘고 있던 프로젝터의 전원을 껐다.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에지의 동공이 어둠에 익숙해져 로이의 형체가 보일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에지. 오웬한테는 네가 전부였어.”


가만히 누워 있던 로이가 꺼낸, 첫마디였다.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트래블러: 죽음에는 차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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