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아 May 24. 2023

내가 쉴 곳은 괌이 아니었음을

「괌 여행기-Ep.07」 용서할 결심

생일에 괌 여행을 하게 된 원인은 나의 파혼이었다. 2개월 전만 해도 결혼 준비 중이었고 생일에 프러포즈받기를 기대하며 꾸고 있던 단꿈은 파혼과 함께 깨어지고 부서졌다. 파혼하고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S가 새빨간 비키니를 선물하면서 괌 여행 계획이 시작되었다.


두 달 후 네 생일에 괌 가서 비키니 입는 거야.
세상에 즐거운 일은 얼마든지 있어.



프러포즈 대신 태평양에서 맥주 마시며 보내게 된 생일은 꽤나 멋졌지만 마음속은 아직도 폭풍 속이었다. 파혼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중 우리 부모님이 그에게 했던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나에게 '네 부모님은 딸을 시집보낼 준비가 안되신 것 같다'라고 했다. 물론 돌이켜 보면 그의 자격지심과 나의 부족함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모든 걸 부모님의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했던 말 때문에 그가 돌아섰노라고 말해서 그분들의 마음에 짐을 얹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말을 모르시는 부모님은 나를 탓하셨다. 그래도 나는 참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지는 못했다. 부모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파혼의 충격은 다시금 떠올랐고 원망의 말이 와르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몇 개월 째 부모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일부러 늦게 퇴근하고 아침 일찍 출근했고 주말에는 약속이 없어도 눈 뜨면 집 밖으로 나가곤 했다.  나에게 집은 지옥 같았고 더 이상 쉬는 곳이 아니었다. 서른세 번의 생일을 가족과 보냈었지만 이번 생일만큼은 부모님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나 여행가."

"어디를?"

"괌."

"언제?"

"00일."

"네 생일에?"

"응."


파혼 소식을 알리고 두 달 만에 나눈 대화이자 괌으로 떠나오기 전 마지막 대화는 이게 전부. 여행 와서도 단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S와 K는 여행 틈틈이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고, 가족들을 위한 기념품을 정성 들여 골랐다. 둘 다 장녀라서 살뜰한 편이다. 나는 연락할 가족도 기념품을 줄 사람도 없어서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숙소에 돌아와서 면세점에서 사 온 양주에 기념품 가게에서 구매한 마카다미아를 곁들여 술상을 차렸다. 장녀들이 모이다 보니 부모님 얘기가 나왔다. S와 K의 부모님은 작년과 금년에 회갑이셔서 S는 해외여행을 보내드렸고 K는 친척들을 불러 잔치를 한다고 했다. 나는 부모님 환갑이실 때 학생이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보냈다. 잔치가 중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은 하나뿐인 자식이 결혼도 깨고 밖으로만 나가 돌고 있으니 또 얼마나 애가 타실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과 어떻게 말을 섞었는지도 어색하게 느껴져서 이제 무슨 말로 다시 시작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생일에 부모님께 연락했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파혼 후에 부모님과 대화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S는 "그놈 때문이지 너네 부모님 때문이 아니야." 라며 열을 올렸고 K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어찌 됐건 너에게 필요한 건 마음 누일 곳이야.



비로소 스스로 마음 누일 곳을 없애고 낯선 섬에서 쉴 곳을 찾고 있는 내가 보였다. 원망과 괴로움에 마음이 가려서 나진정 내가 다리 뻗을 자리를 잃고 있었구나. 에 와서야 나와 내 족을 용서할 결심이 들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disengagement


이전 07화 삼시쇼핑 수영세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