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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May 05. 2023

빗소리, 밀크티 그리고 엽서


폭우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알면서도 외출을 했다. 비옷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고서. 새로 산 비옷은 가볍고 편해서 마음이 흡족했다. 옷이 사락거리는 소리와 빗소리가 잘 어우러졌다.


궂은 날의 외출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집에 있기 싫은 휴일이었다. 마음이 무거워 아무 계획도 없이 맞이한 연휴였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했다. 일은 바쁜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답답해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왜 이거밖에 안되지, 더 잘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하지, 그런 습관적인 자책들.


예보했던 것처럼 폭우는 아니었지만 봄비치고는 비가 많이 내렸다. 장마가 벌써 시작되려나. 이상기후가 워낙 빈번하니 5월의 장마는 놀랄 일도 아니다. 비가 오는 골목에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아스팔트를 타고 흐르는 빗물이 꽤나 힘찼다. 나는 혼자 좀 걸었다.


걷는 길에 귀여운 엽서를 하나 사고, 좋아하는 홍차가게에 들러 밀크티 주문했다. 따듯하게 데워진 찻잔 스콘이 내 앞에 놓였다. 부드러운 밀크티가 흘러 들어가니 비어있던 속이 훈훈하게 채워졌다. 나는 마침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 사이에 빗 줄기는 더 굵어졌다. 창문에, 나뭇잎에, 길에 부딪혀 튀기는 빗소리가 분주하다.  


가끔 마음에도 장마가 찾아온다. 마음의 장마는 예보도 없이 시작되곤 한다. 금방 지나갈 봄비인 줄 알았는데 그치질 않는 것이다. 비옷도 우산도 없이 나왔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처마 밑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애초에 외출하지 않았으면 될 것을, 일기예보를 확인할 것을, 우산을 가지고 나올 것을. 내 탓을 해보지만 비는 그치지 않는다. 내가 비옷까지 챙겨 입고 나왔어도 내릴 비는 내리기 마련이고, 그저 비를 뚫고 가던가 그치길 기다리던가 하는 수밖에. 덕분에 향긋한 밀크티도 한 잔 마실 시간도 생기고. 수신인 없는 편지를 적을 여유도 생긱고. 생각하기 나름. 비로소 기다리는 이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장마는 그저 무심히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계절은 흐르고, 상처는 아물고, 엽서는 채워지고, 밀크티의 향도 은은하게 사라져 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건 슬프지만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픈 일이다. 꽃이 지는 계절이지만 또 새로운 꽃이 피어나고, 축축한 이 시간들 조차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계절로 남기를.


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잦아들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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