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아 Jul 20. 2022

파혼을 받아들이는 방법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다치지 않게


그와 파혼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문득, 그에게서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할까,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너는 내가 그렇게 우습냐고, 이제 와서 붙잡으면 다고 할 병신으로 알았냐며 침이라도 퉤 뱉어줄까, 아니면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나는 네가 떠나 준 덕분에 너무 잘 살고 있는데 넌 뭐가 좀 아쉬웠나 보라고 비아냥 대줄까. 그도 아니면, 그냥 못 이기는 척 나도 그리웠다며 얼싸안을까. 그러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참 쓸모없는 생각이다. 내가 아는 그는 절대로 재회를 생각할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 사람을 다 이해하지 못해서 파혼하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했었던 그는, 결정을 번복하거나 뒤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명료하고 추진력 있던 그는 그저 다른 업무를 다루듯이 나와의 결혼도 하지 않기로 정했고, 이에 대해 두 번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별의 순간을 회상하면, 여전히 그에게 서운함이 든다. 평생을 사랑할 거라던 우리의 관계에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그렇게 손바닥 뒤집 듯 서둘러 정리해야만 했는지, 나와 대화하기가 그렇게 싫었는지, 깔끔하게 안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라도 되는 사람처럼 그토록 냉정하게 굴어야만 했는지... 하지만 쉬운 감정이 남은 것과는 별개로, 그의 방어 기제를 이해한다. 자존심과 가족이 가장 중요하게 살아온 그에게 나는 영원히 1순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해서 사랑했고, 사랑해서 이해했다. 처음부터 그가 나와 비슷한 사고의 흐름을 가지고 있어서 끌렸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별에 대해 곱씹어 생각하 것도, 마음에서 보내기 위한 성찰일 뿐, 나 또한 미련을 견디지 못해서 재회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점까지 닮았으니, 그와 나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것도 20대 때나 하던 '젊음 과소비'였다는 생각을 한다. 30대 중반인 나에게는 소비할 젊음이 그리 많지 않아서, 쓸데없는 데에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는 건 사치처럼 느껴진다. 아마 그 나와의 결혼을 '쓸데없다'라고 생각했 것 같아서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파혼 후에 오롯이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인 사이의 헤어짐은, 상대가 내 인생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오직 하나뿐이고 대체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였던 사람은, 한 순간에 남보다도 먼 사람이 되어버린다. 마음의 중심이 뻥 뚫리며 생긴 상실감은, 지진처럼 '나'라는 세계를 처참하게 무너트린다. 이번에 파혼이라는 대지진을 겪으며, 나름대로 믿고 있던 나의 내진 설계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여실히 알게 되었다. 어리고 재생능력 좋던 시절의 나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신 님을 위해 진달래꽃을 왜 뿌려? 꽃 다 지기 전에 맛있는 화전이라도 부쳐먹어야지."라며 툴툴 털고 일어났었는데. 지금 이렇게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뿌릴 기력도 없이 낡고 지쳐 건 더 이상 어리지 않은 나이 때문일까. 슬픔에 게 빠졌다가 바닥을 찍고 올라는 것도 력과 회복 탄력성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나는 둘 중 무엇도 없어서 상실이라는 지진을 받아내기가 버거운 느낌이다. 

 


애도의 다섯 가지 단계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며
마지막 단계를 거쳐야지만 비로소 극복된다.



생각보다 첫 단계에서 네 번째 단계까지는 급류를 타듯 빠르게 흘러갔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도 자연스레 도달할 거라 기대했었다. 이 부정적인 김정들을 빨리 털어버리고 극복해버리고 싶은 욕심이다. 그러나 바람과는 다르게 아무 절제 없이 먹기만 하고, 자책하는 시간을 보내 '우울'의 과정에 한 동안 고여 있었다. 자기 파괴만 계속하는 날들이 계속될수록 점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도 활력이 부족한 편인데 이별 후에는 몸도 마음도 무거워서 금세 피로해지곤 했다. 


"체중은 정상인근육이 적어서 경도비만이네요. 

근력 운동 일주일에 몇 번 정도 하세요?"


정기 건강검진받으러 갔다가 주기적인 근력 운동을 할 것을 권고받았다. 근육이 부족하면 피로감도 쉽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나의 피로는 너무 많은 체지방 때문이었을까.  비련의 여주인공은 울다 지쳐 쓰러지던데, 눈물 대신 폭식을 선택한 나는 경도비만 30대 여성이 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을 해야겠어. 섬광처럼 꽂힌 의지가 사라질까 봐 그 자리에서 서둘러 PT샵을 알아보고 상담을 받으러 갔다. 



내 인생을 비극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내 인생의 주인공을
더 이상 망가지게 둘 수는 없어.

  





트레이너 선생님은 이전에는 어떤 운동들을 했었는지, 어떤 운동을 좋아하는지 물다.


"PT는 전에 잠깐 받아봤었는데, 재미가 없어서 오래는 하지 못했어요. 재미있는 운동 해보려고 이것저것 했었는데 특별히 잘하는 건 없어요."


"근력운동은 원래 재미없어요. 앞으로도 재미는 없을 거예요. 그만하고 싶을 정도로 힘도 들 거고요.

그래도 근력운동을 하면 지금 하는 운동들을 훨씬 더 잘할 수 있게 될 거예요. "

          

첫 수업은 기초 체력 테스트였다. 나의 최대 수행능력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 수 있다고 했다. 시작하기 전에 희망하는 운동 강도가 있다면 강, 중, 약으로 말해보라 했다. 나는 이 우울함을 떨쳐버릴 정도로 나를 몰아붙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차피 에너지의 방향이 나를 갉아먹는 쪽이라면 차리 육체적으로 괴롭게 해서 건강이라도 되찾고 싶었다. '가능하면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싶다'며 호기롭게 말했더니, 트레이너는 일단 테스트를 해보고 다시 물어보겠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시작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매트에 누운 채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가쁜 숨을 쉬면서  풀린 동공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내 옆에, 트레이너 선생님이 쭈그리고 앉아서 물었다.


"지금 한 게 '강'이고 생각하시면 돼요. 하실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나와서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의욕만 넘쳤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내 주제에 무슨 고강도 운동을 하겠다고 설쳤을까...!


"제가 너무 한심하네요... 이게 이렇게 힘들 줄은..."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을 사용하는 거니 당연한 겁니다.

이런 걸로 자기반성하지 마세요. '자책은 금지'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내가 약한 것 마저도 내 탓이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파혼 후에 그를 미워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속으로는 끊임없이 나를 책망할 거리만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몇 번의 연애와 이별을 경험했다고 해도, 함께 결혼을 준비한 사람과의 이별은 단련한 적 없었으니 큰 타격을 받은 건 너무나 당연한 건데. 나를 제대로 돌보고 위로하기보다는, 이별 처음 해본 사람처럼 힘들어하는 나를 꾸짖고 망가트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소중하고 아낀다고 하면서도 정작 나에게 자애를 베풀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나 자신에게도 관대하지 못하면서 그를 감히 이해하고 용서하여 '수용'의 단계에 이르고 싶어 했으니,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그대로 두었다면, 진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극복의 답을 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내가 운동 능력은 나쁘지 않은데 근지력이 약하 당장 웨이트를 하기엔 무리라고 했다. 그리고 예전에 다친 적이 있는 오른쪽 어깨가 눈으로 보기에도 틀어져 있었다. 선생님이 알려 준  가지 스트레칭을 하고 나니 덜그럭거리는 것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뻣뻣했다. 앞으로 약한 부위를 단련하고 기초 지구력을 높여서 혼자서 웨이트도 할 수 있도록 목표를 잡기로 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스트레칭으로 좋아진 걸 보면 회복 가능성이 있단 얘기죠.  

한 번 다친 부위가 완전히 돌아올 수는 없어요. 하지만 꾸준히 단련하면 99%는 회복할 수 있어요.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치지 않게 해 봐요."


다리에 감각이 없어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겨우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근래에는 뭔가를 먹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은 시간에는 항상 자기비판적인 생각에 빠져들고는 했는데 그날은 너무 힘이 들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잡생각이 들 때는 혹시 근력운동이 부족하않은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쉽게 끝내자는 결정을 내렸던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별의 슬픔을 빨리 해치워 버리려고만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서둘러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두르면 무리하게 되고, 무리하다 보면 어긋나게 된다. 그와 나도 뭐든 빨리 결정해서 결혼을 밀어붙이려 했기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는 생각이 든다. 무게를 치기에는 우리의 연이 너무 약했는데, 근력은 파악도 안 하고 바로 고강도 웨이트를 하겠다며 덤벼든 꼴이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많은 대화를 해가며 여유롭게 풀어갔으면 달랐을 수도 있다. 론 어떻게 해도 안될 일은  안됐겠지만, 될 일이었다면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가 노력하지 않아서, 내가 더 적극적으로 매달리지 않아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의 연은 여기까지였다. 소소한 부분까지도 잘 맞고,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서로가 이해되는 사이라고 '착각'한 나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서로 다른 부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질 정도의 연약한 사이였을 뿐이다.


그는 관계에 대한 지구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근지구력이 없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쉽게 포기해버린 과거의 나처럼, 그는 작은 갈등에도 너무 쉽게 피로감을 느꼈고, 금방 그만둬버렸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의 인생을 합치는 것은 재미없는 근력 운동 같은 것이었는데, 결혼은 커녕 결혼식 준비도 견디지 못할 연약함이었으니, 만약 덮어두고 결혼했어도 그 후에 펼쳐질 크고 작은 문제들을 극복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그리고 이별은, 그보다도 훨씬 재미가 없다. 이별을 감당하기엔 버거웠으면서, 괜찮다며 웃고, 별거 아니라며 외면했다. 그렇게 무리하면서 나를 채찍질하면 이 상실감도 극복 가능한 사람이 될 줄 알았나 보다. 왜 빨리 강해지지 않으냐고 나를 책망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스트레칭부터 한 단계씩 단련했다면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다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애도의 마지막 단계인 '수용'은
당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던히 애를 써야 되는 것이다.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은 실로 즐거 일이 아니다. 덮어두면 어찌 되었든 아물긴 하겠지만 오래도록 흉이 남을 것이다. 당장은 귀찮고 손이 많이 가더라도 정성껏 치료한다면, 상처 자리를 메우는 새 살은 전보다 더 튼튼하고 매끈할 거라 믿는다. 마치 근력 운동처럼, 너 급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견딜  있는 만큼 조해가며,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당장은 기초 체력 테스트에도 걷지 못정도로 녹초가 되었지만, 조금씩 단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무게를 얹어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날이 올 테니까. 다친 부위 99% 회복 양쪽 어깨의 균형을 맞춰 바로 는 내가 될  있도록 꾸준히 해보려고 한다. 언젠가는 나의 근력으로 마음의 찌꺼기를 인생에서 완전하게 밀어내기 위해서.

이전 06화 서른넷 생일에는 새빨간 비키니를 입겠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