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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Jul 28. 2022

그에게 받았던 기프티콘은 연장해야 하는가

처치 곤란한 기억들과 함께 살기


정리정돈은 내겐 오랜 습관이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나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면 마음이 영 불편하.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취미 삼아서 필요 없는 것, 버릴 것을 골라내곤 한다. 원하는 사람에게 팔거나 주고, 기증하거나, 못쓰게 생긴 건 버린다. '미니멀리스트'라고는 할 수 없지만, 되도록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고 필요 없어진 건 가지고 있지 않으니, '미니멀하게 살고자 한다'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라이프 스타일이 옳고 그르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관리를 벗어난 물건이 많아지면 스트레스를 받는 나의 피곤한 성격 탓이다. 파혼 후에 마음이 괴로운 이유에는 감정적인 충격도 있었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 상황과 내 취향대로 정리할 수 없는 기억들 때문이라고, 자가진단을 내려보았다.



기억은 참 곤란하다.



간직하고 싶은 건 쉽게 상해버리거나 휘발되어 버리고, 정작 버리고 싶은 건 떨어지지도 않고 질기게 붙어 다닌다. 오며 가며 볼 때마다 신경에 거슬리는 흉물스러운 인테리어 소품 같달까?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시간이 지나 닳아 없어지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꼴 보기 싫어서 창고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썩어서 벌레가 꼬일 것 같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끌어안고 지내고 있다. 


그에게 기 위해 정성 들여 고르고 골랐던 나의 마음들이 모두 진심이었어서, 너무 순진하게도 그의 달달한 말들도 전부 '진짜'라고 믿었었다. 우리 둘이 500살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내가 1년 더 살면서 뒷정리하고 따라 갈게.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은 편 할게. 좋은 남편이 될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우리 지금처럼 이렇게 손잡고 걷자... 유치하고 실없는 농담 같은 대사이지만, 평소에는 우스개 소리도 할 줄 모르는 진지한 사람이 내 손을 꼭 잡고 하던 말들에, 나는 감히 내 인생을 그에게 모두 걸겠다고 다짐했었다.


"행동보다 말을 더 믿었구나."


넋두리하듯 그의 말들을 되뇌는 나에게 친구 C는, 말보다 행동을 믿어야 한다고 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엽고 사랑스러웠던 말들을 회상하면 아직도 눈가가 뜨거워지는데, 의 마음 깊이 들어왔던 그 단어들이 전부 거짓이었던가? 단순히 말을 믿은 것이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던 '그'라는 사람 자체 분명하게 보 있고 생각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을까? 나는 이제 사람을 무엇으로 믿어야 하는 걸까. 사람, 사랑, 그리고  자신까지도 애초에 믿서는 안 될 대상이었나? 풀리지 않는 물음표 사이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내 삶에서 자기 확신이 가장 낮은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면서 나에 대한 믿음도 처참히 무너졌다.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전부 버 그를 알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적어도 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만큼은 믿을 수 있었던 때로.




그에게 일방적인 파혼을 통보받고 멍하니 혼자 돌아오던 길에 카톡 알람을 받았었다. 그 공유 캘린더의 일정을 보란 듯이 취소한 것이었다. SNS를 확인해보니 이미 그팔로우를 끊은 상태였다. 내가 그와 함께 있던 자리를 떠나고 5분도 안된 시간이었다. 그는 내가 순순히 떨어져 주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삶에서 나를 빠르게 도려내 버렸다. 나는 인생에 어려움이 있더라그와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그의 인생에는 내가 유일한 어려움이었나 보다. 나만 없으면 훨훨 날 것 같 지체 없이 당장에 없애버려야 했을 테지.


나도 그와 관련된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와 주고받았던 편지, 선물 등등 눈에 보이는 것부터 싹 다 버렸다. 연애를 하면 뭘 그리도 부지런히 주고받는다. 말로만 표현하기엔 내 사랑의 크기가 다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 열을 다해 고르고 준비하고 포장했었다. 내가 가진 가장 예쁜 마음들만 모아서 그에게 줬었고, 그가 귀히 여겨주는 것만으로도 감동해서 눈시울이 뜨거운 날들이었다. 그종종 손 편지를 써주곤 했었다. 기념일에는 그동안 같이 찍은 사진 뒤에 추억 어린 글귀를 적어서 앨범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 같이 고맙고 기뻐서,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꼭 보여주고 싶었다. 아빠, 엄마가 이렇게 사랑했었노라고, 너는 이런 사랑 가운데에서 태어난 축복이라고 말해줘야지 했었다. 참으로 찍하고 부질없는 계획이었지만, 덕분에 편지들이 상자에 곱게 정리되어 있어서 통째로 버리기엔 꽤 편리했다. 가정용 파쇄기에 한 장씩 갈아버리다가 괜히 음이 적해지는 것이 답답해서 뭉텅이 째로 구겨 넣었더니 파쇄기가 고장 났을 땐 무척 짜증 나긴 했지만. 


서랍 정리를 하다가 그와 함께 샀던 복권이 몇 장 나왔. 당첨되면 신혼집을 사자고 했었다. 우리가 함 살면 너무 좋겠다고. 입에 스치는 말들은 이렇게나 무력하고 공허하다. 천 원에 당첨된 이 있길래 새 복권으로 꿔서 긁어보았다. 역시나 죄다 꽝이다. 더 튼튼하고 좋은 파쇄기를 살만한 금액 정도라도 당첨되면 좋으련만.


웨딩홀 예약도 플래너 전화번호도, 각종 업체, 임장 리스트도 싹 다 취소하고 버렸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준비를 하기 전이라서 간단한 편이었다. 청첩장까지 돌려놓고 파혼을 수습했을 상상을 하면, 차라리 일찍이 잘라줘서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우리 집에 사 왔던 꽃다발은 파혼 소식이 알려진 날 엄마에게 무참히 꺾여 버려졌다. 조금이라도 오래가라고 매일 물을 갈아주고 밤에는 시원한 데에 두면서 관리하던 수고가 우습고 무색하다. 그가 들고 왔던 홍삼세트도 버리하시 말렸다. 홍삼은 죄가 없지. 내가 다 먹고 건강해질 테다. 내가 그의 부모님께 선물했던 난은 버려졌을까? 고급스럽고 좋은 난 화분을 구하겠다며 온 가족이 발품 팔고 설쳤던 걸 생각하면 촌극이 따로 없다. 가족들이 받은 상처가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또 홀로 앓았다.





내 인생까지 걸었던 사람을 삭제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간단하고 쉽다니.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평소에 정리를 잘해놓은 덕에 전부 치우는 데에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너무 싹 다 버리고 나니 그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이 한 톨도 없었다. 물건이 정리되면 깔끔한 기분일 줄 알았는데 묘하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학창 시절에 쓰던 필기노트까지도 소중히 하는 그를 위해, 신혼집에는 크고 튼튼한 책장을 맞춰주고 싶었다. 그의 물건이 많으면, 내 물건을 더 많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잡동사니는 쌓아두고 살면서, 나를 치워버리는 건 어쩜 그렇게 신속할 수 있었을까.


헤어졌다는 소식에 좀 기다봐라, 다시 연락 올 수도 있잖아, 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절대 아닐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꼈던 것은  착각일  있지만, 내가 그를 사랑했던 건 착각일 수 없으니까. 내가 사랑던 그는 절대로 뒤돌아보거나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애초에 미련 가질 정도로 나를 사랑했다면 3일 만에 일방적으로 파혼을 결정하지 않았을 거다. 게 나는 다른 어느 물건들보다도 버리기 쉬운, 가치 없는 재였다는 것, 그것이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내가 주었던 선물들도 나를 버리듯 그리 쉽게 버렸을까? 버리기 어려운 것들로만 선물할 걸. 버리지도 못하고 고민하면서 내 생각이나 한번 더 하도록.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정리하고 나니 그에 대한 나의 마음도 꽤 정리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움과 자책 때문에 혹시라도 그를 추억할 만한 물건이 남아있지는 않은지 괜히 빈 서랍을 열어보기도 했지만. 깔끔하게 비워진 서랍을 보면 다시 결심하게 된다. 그래, 그냥 전부 잊자. 그라는 사람이 원래 내 인생이 없었던 것처럼. 그가 나를 쉽게 버렸던 것처럼, 모도 없고 아깝지도 않아서 처분한 물건들처럼, 나도 그를 남김없이 내버리자.


리고 며칠 지나서 카톡 알림이 왔다. 그가 오래전에 냈었던 기프티콘 유효기간이 30남았다는 메시지였다. 와, 이런 게 남아었을 줄은 생각 못했는데? 억은 또 지워지지 못하고 식간에 다시 그때로 나를 소환다. 한창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날 때, 유난히 힘들고 피곤했던 날, 그런 나와 함 수 없음에 마음 아파하고 타까워하며 보내주었던 음료 기프티콘.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내게는 귀하고 아까워서 뭔가 기념이 될만할 때 사용하고 아껴두었다. 새삼 그때 생각이 나서 사랑을 느꼈다는 유치하고 달달한 말도 해주려고 계속 연장하고 있었 기프티콘이었다.



아무리 갖다 버려도 잊을 만하면 이렇게 불쑥, 그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예상도 못한 곳에서 지겹게 튀어나온다. 사용하기도 싫고 환불받기도 싫은 기프티콘은, 꼭 곤란한 내 안의 기억들을 닮았다. 앞으로도 필요 없을 것 같고 굳이 꺼내어 보기도 싫은데 없던 것으로 치자니 어쩐지 아쉽다. 잊고 있으면 30일, 15일, 7일마다 존재감을 드러내고, 그때마다 미련 같은 나약한 마음에 사로잡혀 '장하기' 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그렇게 기프티콘은 계속 선물함에 망령처럼 아남아서 저걸 언젠가 써야 되는데, 하는 숙제가 되어버린다.


처치 곤란하다고 여기지 않고 그저 물 주고받았던 그 당시의 선의와 고마움만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걸 쓰던가, 버리던가 하지 않으면 가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죄 없는 선물을 짐덩어리처럼 지고 있구나, 싶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해도, 그와 함께하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고양감에 행복했었으니까.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그거면 다고. 보답받지 못했지만 충분히 행복했었고, 영원히 함께 하자던 약속은 깨어졌지만 충분히 고마웠다고. 기억에 그런 이름표들만 붙여 놓으면 공연히 꼴 보기 싫거나 곤란하지 않는 날이 오려나.  


기프티콘을 연장하지는 않을 거다. 환불지 않으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기프티콘을 보냈었는지, 보냈던 것을 기억은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과거의 나는 이 작은 선물에도 행복을 느꼈었으니 그걸로 가치는 다했다. 용도를 다 했으니 환불받을 것도 없다. 그래서 그냥 두려고 한다. 영영 사라질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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