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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Sep 24. 2022

제이, 좋은 사람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이를 알게 된 것은 단기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어느 모임이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 나는 십 분 정도 미리 도착했는데, 그녀가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말을 걸자 그녀는 삼십 분 일찍 왔다며 눈웃음을 생긋이 지었다. 나도 낯가림이 없는 편이긴 한데,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받아주는 제이 덕분에 소소한 얘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스물여덟 살이라고 했다. 작고 귀여운 체형에, 밝게 염색한 머리가 잘 어울려서 꼭 민들레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스물여덜에는 저렇게 발랄한 에너지가 있었던가, 회상하며 미소 짓게 만드는 귀여운 사람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 정말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모든 말을   웃으며 말하는 버릇이 고, 심지어 그렇게 웃기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꾸 웃음 트려 당황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종종 제이 뜬금없는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전혀 번거롭거나 불편하지는 않았. 그녀가 웃으면 언제라도 노란색 나비가 포르르 날아다니는  같았기 때문에.  


제이와 같이 작업을 하게 되어 그녀를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제이는 새로운 일을 주어주면 굉장히 난처해했다. 남들보다 오래 걸렸고, 결과물은 다소 방향성이 없었다. 생각은 많은 것 같았지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마음이 작업물에도 고스란히 다 보이는 듯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오면, 그녀는 또 그렇게 포르륵 웃었다. 배시시 웃는 제이는 참 귀여웠지만, 그녀는 곤란하고 어색할 수도록 더 자주 웃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술자리에서는 에너지가 훨씬 높아지곤 했다. 회식 중에는 누구보다도 크고 높은 목소리로 말하고 그 가게에서 가장 목청이 좋은 손님이 되곤 했다. 술 종류도 가리지 않고, 술을 권하면 마다하는 일 없이 시원시원하게 받아 마시는 제이를 보며, 확실히 술자리에서 환영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술도 잘 마시지 못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어색해하는데, 내가 뭐라도 하려 애쓰지 않아도 제이가 알아서 분위기를 띄우는 상황이 사실  편했다.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터트리는 제이가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딘가 억지스럽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저 술 시는 분위기를 아주 좋아하나 보다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단기 프로젝트가 모두 마무리되어서 모임도 끝이 나게 되었다. 마지막 자리에서, 취기가 오그녀는 '진짜' 자기 얘기를 털어놓았다.


"저는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빨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회식자리에 갑자기 던져진 죽음에 대한 주제에 조금 놀라서 제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이의 처음으로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물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자주 그렇게 생각하나요?"

"매일, 매 순간 해요."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느냐는 나의 물음에, 제이는 단숨에 학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녀가 일하게 잘하고, 해보고 싶었던 노래는 부모님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는데, 그 이후로 그녀는 무엇을 해도 자신이 없고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비어 있는 상태로 살아있는 거예요. 왜 살지? 이럴 바에는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나? 해요."  


포기하기 위해 그녀는 노래를 싫어하려고 오랜 시간 노력했다고 했다.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기 위해 스스로를 괴롭혀 왔던 시간들이 그녀의 눈빛 뒤로 보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시큰해졌다. 얼마 전에야 혼자 코인 노래방을 가서 노래를 부르다가 펑펑 울었다는 얘기를 덤덤하게 꺼내놓는 제이가 안쓰러웠다. 여전히 보이지 않은 철창에 갇혀있는 듯한 그녀를 보니, 우리는 왜 그렇게 빨리 내 인생 방향을 정해버리는 걸 '어른 구실'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살아갈 날들이 실낱같이 많은데,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두기 아까울 정도로 반짝이는 젊음이 아깝고 안타까웠다.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던 거 하면 되죠. 죽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봐요."


제이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어떤 이는 그녀에게 연애를 하라고 말했다. 나는 연애를 만병통치약처럼 말하는 그 말이 매우 못마땅했다.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뭐라 반박을 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그전에 제이는 다시 자기 얘기를 이어갔다.


"저는 연애를 세 번 했는데, 매번 배신당했어요."


첫 번 째 연애는 양다리, 두 번째 연애는 여섯 다리를 걸치는 남자 때문에 헤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은,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를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되어 이별했다고 말하는 그녀는 줄곧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녀가 삭히고 끌어안아야 했을 분노, 슬픔, 배신과 상실, 그리고 그 모든 걸 견뎌야 했을 끔찍한 시간들이 그녀의 표정을 전부 앗아가 버린 것 같아 보였다.


"이제 나한테 관심 가지는 남자들을 보면 다 섹스할 목적밖에 없는 것 같아 보여요."


사실 그녀의 내면에는 깊이도 알 수 없는 어둠뿐이라고 했다. 그곳은 부정적인 생각밖에 없는 세계예요. 혼자 있을 땐 절대 웃는 일이 없다는 그녀는, 표정 없이 있으면 사람들이 기분 나쁜 일 있냐며 묻는 것이 싫어서 억지로 웃는 척하는 거라고 했다.

 

"나 때문에 분위기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싫어요.

아무 일 없다고 해도 계속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제이는 그런 마음으로 매일 매 순간마다 웃기지도 않은 일에 웃고 있었던 거였다. 내가 보았던 많은 웃음 뒤에서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펌프질을 했을 걸 생각하니, 그녀가 애잔하고 가여웠다.


제이의 이야기를 듣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에게서 나를 보고 있었다. 상처받고 고통스러워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나. 나의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두렵다. 약해 보여서 공격당하고 우습게 보여서 이용당할까 봐 무섭다. 그래서 나의 연악함을 스스로 혐오하면서도, 혹시라도 나약한 모습을 들킬까 봐 항상 평온한 척, 시련에도 강한 척, 온갖 '척'을 한다. 렇게 애써봤자, 진짜 나는 그저 애잔하고 가여울 뿐이었던가. 사랑에 배신당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상처를 받았으면 누구라도 부정적이게 되는 게 이상하지 않음에도, 나는 그런 순간에도 긍정적으로 이겨내지 못하는 나를 질책했었다. 제이를 안아주고 등이라도 다정하게 쓸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은 나에게 해었어야 했던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제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했다. 취해있던 그녀에게 나의 단어들이 얼마나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고 듣는 내내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제이, 좋은 사람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괜찮아요.




기분이 안 좋다고 어디에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닌데, 혼자 가만히 있는데 왜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드냐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지 제이가 잘못한 것이 절대 아니에요. 기분 나쁜 일이 있냐고 물어도 대답해줘야 할 의무도 없어요. 오히려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거죠. 내 기분에 이유를 찾지 않아도 돼요.


제이, 연애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삶이 꼭 누구와 함께 있어야만 재밌고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누군가로 인해 더 나빠질 수도 있는 거니까. 누가 없더라도 내가 즐겁게 살면 되는 거죠. 그리고 삶에는 원래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살다 보면 살아온 흔적들이 저마다의 의미가 되는 게 아닐까요.


죽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으니 당분간은 살아요. 대신 남 위해서 말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웃고 우는 것도 하고 싶을 때만 하고,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마음껏 하고, 누가 뭐라 해도 그러거나 말거나 하면서 살아요. 그래도, 정말로 괜찮아요.





누군가 나에게 '강한 척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괜찮아요.'라고 한 들, 그 한마디 말이 나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제이에게 '좋은 사람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괜찮아요.'라고 했던 말들도 얼마나 무력했을지 회상한다. 그렇게 살아내는 방법밖에 몰랐고, 다른 방법은 모른 채로 28년이든, 34년이든 살다 보면 그냥 습관처럼 나 자신이 되어버린다. 나름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고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때로는 지독하게 외롭고 힘들어진다. 점점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어 스스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어진다.


내 바람과 다르게 그녀는 아마도 계속 억지로 웃으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계속 강한 척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또, 다들 이렇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주위에 피해 주지 않으려고 수많은 '척'을 하며 살아가겠지. 가끔은 나약하고, 추악하고, 어둡고 축축한 가면 뒤의 자신에게도 '그래도 괜찮아.'라고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이후로는 제이를 보지 못했다. 오래도록 그녀가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아마도 다시 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진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겠지 싶다. 다만, 가끔 그녀를 떠올릴 때면, 평을 찾았는지 묻고 싶다. 부디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감옥에서 나와 진짜 웃음을 지으며 나비처럼, 민들레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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