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무계획 동유럽 여행기 06

5일 차 : 혼자서도 잘 놀아요,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by 잔물결

CAMERA : Rollei Prego90

FILM : Kodak Colorplus 200


벨베데레에서 전시를 보고 빈 유명 관광지를 돌아다녔는데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도시, 빈.


호텔에서 잠시 쉬다가 호텔 안에만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어디를 갈지 검색을 해보았다. 후보를 세 가지로 정했다. 첫 번째 후보, 레오폴트 미술관. 더 다양한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그림을 접할 수 있음. 두 번째 후보, 알베르티나 미술관. <비포 선라이즈>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고 알짜배기 미술관이라는 평이 있음. 세 번째 후보, 프라타 공원. 어제 구름이 많이 껴서 노을을 못 본 것이 아쉬움.


일단 트램을 타고 가면서 그때 감정에 선택을 맡기기로 했다.


사실 호텔에서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친구에게 '레오폴트에서 그림 보고 있을 테니 저녁 먹으러 나올 때 연락해'라고 했었는데 막상 트램을 타고 가다 보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폴 시냑의 그림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갔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3.jpg #혼자_하는_여행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왜인지 긴장이 됐다. 심지어 좀 전까지 지나쳤던 곳이었는데도 많이 떨렸다. 친구가 있다가 없어서 그런 걸까. 익숙해진다는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해서 여행은 거의 늘 혼자서 다녔었는데 며칠 새에 친구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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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릉이의_도시

알베르티나 미술관을 가기 전에 주변을 정처 없이 걸었다. 그리고 따릉이를 발견했다. 따릉이를 보니 빈이 새삼 친숙하게 느껴졌다. 서울과 비슷한 도시구나. 괜히 긴장을 할 필요가 없구나. 따릉이 타고 빈의 구석구석을 달려볼까 싶었지만 미술관이 언제 문 닫을지 모르기 때문에 참았다.



0.jpg #알베르티나미술관_들어가기_전

구글맵이 알려주는 대로 알베르티나 미술관을 향해 왔는데 입구가 어딘지를 못 찾겠더라. 새삼 나 진짜 길치가 맞는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가는 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왔는데 이 사람들이 뷰를 찍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인지,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일단 동상의 뒷모습을 걸고 사진을 하나 찍고 건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어떤 중년의 남성이 문을 열어주면서 티켓을 소지했는지 물었다. 그래서 없다고 했더니 친절하게 저쪽 줄에서 기다렸다가 티켓을 사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여행 5일 차, 만난 사람 중 제일 친절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첫인상이 너무 좋았다.


17.9유로나 하는 입장권을 사서 4층(그들의 층수 개념으로는 2층)으로 이동을 했다. 제일 위층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는 것이 제일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기대되는 폴 시냑의 작품이 4층에 있을 것 같았다. 4층에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60명 정도 수용 가능한 엘리베이터 속 나 혼자만 동양인이었다. 조금 떨렸다. 혹시나 인종 차별당하면 어떻게 대응하지라며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시뮬레이션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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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시냑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폴 시냑 작품이 있었다. 이게 사진으로는 잘 표현이 안되는데 점 하나하나가 멋진 그림을 만들어냈다. 되게 감동적이었다. '아 내가 이 그림을 지금 실제로 보는 것이 맞는 걸까' 싶을 정도로 감동받았다.



8.jpg #에밀놀데

그리고 전시를 보다가 시선을 끄는 작품을 만났다. 처음 알게 된 에밀 놀데라는 작가의 작품인데 색이 빠져들고 싶을 정도로 강했다. 벨베데레에서 모네의 그림에 빠져 있었다면 알베르티나에서는 이 작가의 그림에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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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정리했다. 새삼 저렇게 표현하는 그들의 능력이 부러웠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미술관이 구역별로 1/3 층씩 내려갈 수 있게 만들어졌는데 나는 그렇게 내려가다 보면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따라가다 보니 다시 올라갈 수 있게 계단이 나오는 게 아닌가. 일단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았다. 처음에는 그게 잘못된 것인지도 몰랐다. 작품을 보니 아까 처음에 봤던 폴 시냑 그림이 또 보이길래 '이게 뭐지' 싶더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돌았다. '뭐 작품 여러 번 보면 좋지'라고 자기 합리화하면서 두 바퀴째 돌다 보니 조금 두려워졌다. 이렇게 여기에 갇히는 건가.


그러던 중 <뭉크, 샤갈, 피카소> 전시관 옆에 <a passion for drawing>이라는 전시관을 발견했다. 이왕 길 못 찾은 김에 드로잉 전시나 보자 하고 갔더니 그 전시관 옆에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아니 비상구 같은 표시 좀 해주시라고요. 안도 겸 어이없어서 웃음이 계속 났다. 이런 불친절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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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_읽는지_모르는_전시

3층에서는 <ALBRECHT DURER>, <PRUNKRAUME> 전시가 있었다. 읽는 방법조차 모르는 전시였다. 전반적으로 중세시대의 그림들 같아 보였다. 작년이었나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하던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 전과 비슷한 느낌의 전시였다. 4층과 다르게 여기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다들 이 전시를 보기 위해 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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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눌프라이너

개인적으로 한국 화가 중에 '윤형근 화백'을 좋아한다. 작년 여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윤형근> 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그림에 반해서 여러 번 방문했었다. 빛과 어둠으로 본인이 가진 단단함을 표현한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 2층에서 만난 아르눌프 라이너의 작품은 윤형근 작가를 떠오르게 했다. 그림 위에 강한 색을 덧칠하면서 그 속에 있는 단단함을 보여주는 느낌을 받았다. 단단함, 갈망, 자유 그런 키워드가 잘 어울리는,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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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티나미술관의밤

작품을 다 보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다 졌다.


친구에게 밥 먹으러 가자고 연락을 하고 친구가 올 때까지 미술관 주변을 서성였다. 비포 선라이즈 촬영지여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인생 사진을 찍으러 온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는 인생 샷을 남기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인생 샷보다는 무언가로 내 내면을 채우는 것이 좋은 여행 같다. 남들에게 보이는 나보다 나 스스로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좀 더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닐까' 음. 나는 남에게가 아닌 나에게 더 사랑받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살아가고 싶다.



19.JPG #혼자_걷는_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걷다 보면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잘하고 있는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머릿 속이 가득했는데 걷다 보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더라.


좋아하는 음악과 좋은 풍경이 함께라면 몇 시간이든지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20.JPG #이번_여행_베스트컷

친구가 출발했다고 해서 트램 정류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램 들어오는 거나 한 컷 찍어볼까 하고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는데 사진 속 남자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셔터를 누르면서 제발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바랬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내가 생각한 의도대로 안 나올 때가 많다. 실망스러울 때도 많지만 생각보다 더 좋게 나올 때도 있다. 그런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그러나 그것이 더 좋게 올 수도 있는 것. 마치 이 사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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