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친구 T는 패션 공부를 하러 가겠다며 몇 년 전부터 영국 유학을 준비했고, 여러 노력 끝에 런던 소재의 한 패션 전문 대학교에 합격했다. 그가 유학 생활을 한 지 약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다고 해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그를 동네에서 만났다. 그는 영국은 물가가 비싸 월세를 한국에 있을 때보다 2~3배를 내야 하고, 음식은 별 게 없이 감자 요리를 하도 먹어서 그런 건 벌써 질렸다며, 영국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를 향해 런던으로 놀러오라고 했다.
"얘들아, 이번 겨울에 런던으로 놀러 와. 런던이 원래 숙소 물가 비싼데,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 그럼 숙소비는 아낄 수 있잖아."
"야, 그거 좋은데? 숙소비 아껴서 유럽 여행 가면 엄청 좋은 거지. 나는 EPL 경기 진짜 좋아하는데, 너네도 축구 보러 갈 생각 있나?"
축구를 좋아하는 L.J는 자신이 응원하는 EPL 클럽 팀의 경기를 보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여행의 의미, 심지어는 인생의 의미를 다한 것이라며 반겼다. 한편, 나는 최근에 친구들로부터 호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으며, 남반구에 위치해 있어 겨울에 따뜻할 호주로 여행을 가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해외 여행에 대한 로망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학교 졸업을 하는 시기를 맞아 스스로 기념할 겸 이번 겨울에는 조금 오랜 기간 해외 여행을 가봐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원래 호주를 갈까 했는데. 그럼 너희들도 다 겨울에 유럽 여행을 갈 생각이 있는 거야?"
"그럼. 이번에야말로 유럽을 가봐야지. 마침 숙소 제공해줄 친구도 있는 거 아냐, 하하하."
T 앞이라서 그런 건지, 진짜 갈 마음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같이 만난 친구 둘은 모두 갈 것처럼 이야기했고, L.J는 바로 일정을 잡자고 권했다.
"야, 그러면 바로 일정 잡자. 너네 언제 될 것 같아? T, 너는 방학이 언제야?"
"음. 대략 1월 쯤 오면 너희들을 영국에서 맞아줄 수 있을 것 같아. 영국에 왔다가 같이 다른 유럽 나라들도 같이 여행 하면 좋을 것 같은데."
"S.H, 너도 그럼 갈 거지?"
"음, 글쎄. 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일정은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네."
괜히 간다고 했다가 나중에 뒤엎는 거보다는 신중하게 얘기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 답변을 얼버무렸다. 그날 유럽 여행에 대해 결론 내려진 것은 없었고, 다들 겨울에 갈 수도 있다는 식의 마음만 갖고 헤어졌다.
며칠 동안 생각을 조금 해보니 영국 여행을 떠나는 것이 괜찮아 보였다. 일단 많이들 가는 여행지이니 첫 유럽 여행 국가로서 무난할 것 같기도 했고, 나도 축구 보는 것을 어느 정도 좋아하니 EPL 경기를 직관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T가 숙소 제공까지는 설령 못 해주더라도, 같이 다닐 친구가 한 명은 확실히 있는 셈이니 그런 점에서도 영국은 괜찮은 여행지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여행지를 고를 때 여행지에서의 구체적인 컨텐츠나 장소를 여러 개 나열해놓기보다는 '가고 싶다'는 즉흥적인 느낌에 이끌리는 편이다. 아직 별로 알아본 것은 없지만, EPL, 많이들 가는 여행지, 친구 T의 존재, 이 정도의 이유만으로 '한 번 가볼 만 하겠다'는 느낌이 꽤 강하게 일었다. 항공권은 일찍 구매할 수록 저렴하기도 하고, 마침 찾아보니 K 항공사의 항공권이 할인 중이어서, 바로 런던행 비행기를 결제했다.
T와 만난 그날 이후 나머지 두 친구의 의중을 슬쩍 물어보았으나, 둘 모두 확실히 겨울에 영국을 가겠다는 것보다는 한 번 가볼 의향이 있다는 정도였다. 유럽을 가려면 최소 2주 정도는 비워두어야 하는데, 6개월 뒤의 일정을 미리 빼두는 게 쉽지도 않고, 여럿이서 일정을 맞춰서 빼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혼자 가는 것으로 생각해서 비행기 표를 먼저 끊어둔 것이다.
그런데 막상 표를 끊고 보니, 혼자 가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T도 런던에서 본인의 일정이 있을 테니 여행을 같이 한다기보다는 중간에 몇 번 만나는 식이 될 것이었다. 유럽도 처음인데, 혼자 여행도 처음이라니. 그러다가 유럽 여행을 혼자 다녀온 친구들에게 여행 동행에 대해 듣게 되었다.
"난 축구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니까, 축구 여행 해야지 하면서 혼자 유럽으로 떠났어. 기본적으로는 혼자 다녔는데, 중간에 밥 먹거나 축구 볼 때는 그때그때 동행을 구해서 같이 다녔어."
내가 유럽을 혼자 갈 계획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친구 J.G가 몇 년 전 군대 가기 전에 홀로 유럽을 다녀온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나는 동행을 즉석에서 구해서 같이 다니는 여행의 형태를 비로소 처음 듣게 되었다. J.G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러면 그 동행은 어떻게 구하게 되는 거야? 동행이면 밥 한 끼만 먹고 헤어져도 되는 거야?"
"응, 그 네이버 카페 유랑이라고 찾아 봐. 거기에 여행 장소, 동행을 하고 싶은 날짜, 동행을 구해서 같이 하고 싶은 것 정도를 게시글에 작성하면, 관심 있는 사람이 연락 올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들 게시글을 보고 너가 답을 남겨도 되고. 동행의 형태는 다양해. 아예 숙소까지 같이 잡고 여행 같이 다닐 사람을 구하는 경우도 있고, 하루 정도 같이 보내는 경우도 있고, 서로 부담을 많이 안 주게 반나절, 아니면 식사만 동행을 구하는 경우도 있어. 너무 미리 잡을 필요도 없고, 그때 가서 네이버 카페 들어가보면 게시글이 꽤 올라올 거야."
"동행을 했던 사람들은 괜찮았어? 한국 와서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람도 있어?"
"전반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었어. 당시에 만나서는 재밌기는 했는데, 그 뒤로는 서로 인스타 정도 교환하고 그걸로 소식 가끔 확인하는 정도지. 한국에 와서까지 따로 만난 사람은 없어."
평소에 가벼운 관계는 그리 내키지 않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혼자 하는 유럽 여행 중 동행과 가끔 같이 다니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았다. 여행 때만 보고 다시 안 볼 관계일 지라도. 아니면 설령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만나도 밥이야 어차피 먹는 거고, 한 번 밥 먹고 헤어지면 될 일이니, 맘에 그다지 들지 않는 동행을 만난다고 해도 위험 부담도 그리 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숙소까지 동행을 구할 생각은 없어서, 스스로 숙소를 이곳저곳 알아보며 예약을 마쳤다. 첫 2일은 에어비앤비의 공유 숙박 형태로 묵기로 했는데, 런던의 비싼 숙소 물가 대비 비교적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소개글을 봤을 때는 영국의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서, 방 하나와 화장실 하나를 빌려주는 형식이었다. 보통은 화장실도 공유를 하는데, 이 집은 화장실 하나를 게스트 전용으로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중간 4일은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에어비앤비 숙소가 가성비는 있어도, 혹시라도 잠을 자는 거나 씻는 게 불편할 수도 있으니, 며칠은 돈을 좀 비싸게 주더라도 좋은 곳에서 지내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는데, 친구 T의 집에서 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T와 만났을 때는 며칠 정도 본인 집에서 자라고 얘기를 해주었지만, 서로 부담이 되지 않을 선에서 1박 2일의 일정과 숙박 정도를 같이 하자고 마지막 날짜를 제안했고, 그는 좋다고 했다. 그가 혼자 사는 집은 아니었고, 총 3명이서 같이 살고 있는데, 각자의 방이 하나씩 있고, 화장실과 거실을 공용 공간으로 사용하는 식이었다. 그가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는 공용 공간이 제법 넓어보였고, 집이 전반적으로 깔끔해 보였다. 처음에 월세가 매우 비싼 걸 듣고 놀랐는데, 위치나 집의 퀄리티를 보고 아주 말이 안 되는 가격까지는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래도 비싸긴 하지만.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여행을 가기 1달 전, T가 갑자기 연락이 왔다.
"S.H, 진짜 미안하지만 내가 그때 한국에 있을 것 같아. 원래 그 직전에 영국에 도착해 학기를 준비할 계획이었는데, 런던행 항공권을 못 구해서 며칠 늦게 런던으로 들어가게 되었거든."
처음에는 약속이 틀어진 느낌이 들어 아쉽기도 하고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유학생이다 보니 사정이야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이번 기회에 혼자 가는 여행 컨셉을 제대로 잡고 다녀오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유럽 여행이자, 혼자 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