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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여행기 Day 3

by SH

* 유럽 여행기 시리즈는 매주 금요일 저녁 8시에 연재 예정입니다.


호텔

이틀 간의 공유 숙박이 끝나고, 집 주인 노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모두 챙겨 집을 나왔다. 다음 숙소인 C 호텔은 패딩턴 역 근처에 있어서 런던 시내를 다니기에 위치가 아주 좋고, 5성급이라고 되어 있었다. 가격은 1박에 한화로 약 25만원 조금 넘는데, 예약 당시에는 첫 2박을 보냈던 공유 숙박이 어떨지 불확실한 상태였으므로 4박은 돈을 많이 지불하더라도 시설이 어느 정도 보장된 숙소를 예약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내 호텔 객실은 1인실 (싱글룸)이었는데, 리뷰를 보면 몇 안 되는 단점이 싱글 룸은 몹시 좁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식은 미포함이었다.


체크인은 오후 2시부터인데, 오전 11시 쯤 호텔에 도착해서 데스크에 들러 짐만 맡기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데스크 직원은 가능하다며, 준비된 객실이 있으니 입실도 가능하다고 했다. 방 번호는 8XX호.


'이 건물 딱 봐도 8층짜리는 절대 안 되어 보이는데, 객실 번호를 어떻게 붙이는 거지.'


그는 엘리베이터로 G 버튼을 눌러 해당 층으로 이동하면 객실을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거기는 지하 1층이었다. 그제서야 호텔을 예약했던 H 앱에서 '나는 지하의 객실을 배정받았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리뷰가 있었음이 떠올랐다. 일단 찜찜한 마음에 객실로 이동했는데, 5성급 호텔인 만큼 시설 자체는 좋아보였다. 깔끔하고 공간이 제법 넓은 화장실. 온수도 잘 나오고, 냉장고 있고, 침대도 편안하고, 방 온도도 실내에서 조절이 가능했다. 다만 역시 리뷰대로 방의 크기는 좁았는데, 캐리어 하나를 펼쳐놓으면 침대에서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 발 디딜 틈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역시 지하라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커튼을 열면 지하로 이어져있는 건물의 외벽이 보이고, 대낮인데도 어둑하게 그늘이 진 모습이었다. 환기를 하는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생각해보니 1박에 25만원을 줬는데, 4일 동안 햇빛도 안 드는 지하 객실에 머무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다시 호텔 데스크로 가서 객실 변경을 물었다.


"지하 말고 지상 층의 객실은 없나요?"

"오늘 것은 없어요. 다만 원한다면 내일부터는 바로 바꿔드릴 수 있어요."

"그럼 내일부터 바꿔주세요. 내일 다시 데스크를 찾아오면 되나요?"

"내일 밖에서 볼 일을 보고 오후에 돌아오면 새로 바뀐 객실의 룸 키를 수령할 수 있어요. 캐리어만 챙겨놓으면 그건 우리가 직접 옮겨드립니다."


내가 객실을 바꿔달라고 하면, 컴퓨터에 뭘 새로 입력하든지 노트에 뭘 적든지 하는 모습이 보여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거 없이 그냥 내일부터 된다고 하는 것이 약간은 미심쩍었다. 이래놓고 내일 다른 데스크 직원이 와서 모른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을 이용해본 경험이 많이 없기도 했지만, 룸을 바꿀 때 내 캐리어를 직원이 대신 옮겨준다는 것도 의아했다. 일단은 알았다고 하고 객실로 돌아왔다.


라자냐

점심은 호텔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혼자 먹기로 했다. 각종 파스타, 피자, 리조또 종류를 팔았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라자냐가 먹고 싶었다. 나는 라자냐를 딱 한 번 먹어봤는데, 친한 친구 J가 몇 년 전 겨울에 서울 종각 부근의 한 식당에 나를 데려가서 이 메뉴를 권했다. 그는 자신이 유럽에 가서 먹어봤는데 맛있었다며, 라자냐는 파스타를 만드는 반죽을 세로로 겹겹이 쌓아올리고 치즈를 함께 두른 요리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 때는 맛있다는 느낌보다는 새로운 맛과 분위기가 좋은 식당이라는 기억 정도였는데, 여기서 라자냐를 보니 문득 반가워서 바로 그 메뉴를 주문했다.


식당에서는 공공 와이파이를 쓸 수 있어서 유튜브 영상이나 보면서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니 영국에 온 지 3일 만에 모처럼 혼자 여유롭게 하는 식사였다. 동행과 같이 다니면 심심하지 않고 게다가 Y는 지금까지 매우 좋은 동행이었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도 내게는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의 라자냐 점심 식사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미술관

Y는 내게 오늘 여행 계획을 공유하며 이 중에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본인 일정에 join 해서 함께 가도 좋다고 했고, 저녁 식사는 시내에서 같이 하기로 했다. Y는 여행 계획을 알차게 세우는 편이었다. 타워 브리지, 세인트폴 대성당, 테이트 모던, 박물관 등을 오늘 오후에 모두 둘러본다는 계획이었다. 이 중에 테이트 모던이라는 현대 미술관은 나도 갈 생각이었는데, Y가 테이트 모던에 몇 시에 들를지도 모르고, 미술관 내부를 다닐 때는 관심사에 따라 어차피 서로 흩어져서 다닐 것 같아서, 저녁 식사 전까지는 혼자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패딩턴 역에서 테이트 모던이 있는 근방으로 이동했다. 역시 패딩턴 역은 런던 시내의 주요 관광지를 다니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였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서 템스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 템스 강가를 따라 조금 걷다 보면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보인다. 템스 강은 풍경이 아주 좋았고,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이 템스 강 위로 한두 대 떠다니고 있었다. 테이트 모던을 가는 길에 벌써 스타벅스 매장이 두 개나 보였다.


'이 곳은 아주 시내 한복판이구나.'


한국에서는 스타벅스 매장의 밀도가 그 지역이 얼마나 번화하고 사람이 몰리는가를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서울 강남 일대나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주변으로는 분당 서현역 인근에서는 블럭을 하나 지날 때마다 스타벅스 매장이 최소 하나는 있고, 많게는 두세 개 이상이 있기도 하다. 영국도 한국과 비슷한 듯 싶었다. 어제까지 지내던 원즈워스 동네에서는 스타벅스 매장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미술관의 입구는 탁 트인 내리막길을 따라 널찍하게 옆으로 뻗어 있었다. 일부 유료 입장 전시관을 제외하고는 무료 입장이었고, 들어갈 때 간단히 가방 검사를 했다. 평소에 미술이라고는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관심도 없고 잘 모르지만, 런던에서 유명하다는 얘기에 한 번 와보게 되었다. 이 역시 뮤지컬을 추천해주었던 친구가 테이트 모던을 얘기해줬던 게 컸다. 물론 그 친구가 뮤지컬을 직접 안 봤다는 걸로 봐서 테이트 모던도 직접 가봤는지야 모르겠지만.


미디어 아트, 팝 아트, 아시아 아티스트들 작품 전시관 등을 둘러보았다. 미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나는 작품을 보는 시간보다 그 옆에 영어로 쓰인 작품 설명을 읽는 데 훨씬 시간을 많이 썼다. 예를 들어 미디어 아트 홀이면, 홀 입구에 미디어 아트와 그 홀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이 있고, 홀 내부의 각 작품 옆에는 작품이나 작가 소개 글이 쓰여 있었다. 모르는 단어가 꽤 많이 나와서 핸드폰으로 네이버 사전을 계속 찾아봐야 했다.


처음에는 미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소개 글을 읽는 것은 재미있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전공 원서와 전공 관련 논문만 읽다 보니, 글에 등장하는 단어의 범위가 한정적이고, 단어의 뜻을 모르거나 영어 해석이 안 되어서 글을 못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글이 어렵다면 대개는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거나 논리가 어렵다거나 하는 쪽이다. 그런데 미술관 작품 소개 글에서는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사전을 찾느라 중간중간 끊겼는데, 단어의 뜻을 찾은 뒤 문장의 뜻을 다시 이어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았다. 글의 주제도 매우 새로웠다. 이걸로 시험을 보거나 하는 게 아니라 내 흐름대로 읽고 싶은 만큼 원하는 속도로 읽으면 되니, 차근차근 단어를 찾으며 문장의 의미를 이해해보는 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팝 아트가 등장했는데, 이것은 광고 따위의 상업적인 이미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팝 아트는 대개 상업적 흐름에 편승하려 하기보다는 이러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는 의도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마치 수능 영어 영역의 독해 지문 또는 TEPS 시험의 reading 영역 지문에 나올 법한 내용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나'를 기점으로 글의 흐름이 뒤바뀌는 것까지. 항상 이러한 류의 영어 글은 제한 시간 내에 요점을 빠르게 파악해 문제를 풀어내야 할 대상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완전히 나의 흐름으로 읽어볼 수 있다는 게 약간은 신기했다.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참 다행이었고, 영어 글 읽기의 즐거움을 참 오랜만에,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느꼈다. 물론 요즘 기술이 워낙 발달했으니, 작품 설명을 사진으로 찍어서 번역기 앱에 넣으면 아마 단 수 초 이내에 한국어로 꽤 잘 번역을 해주리라. 그래도 그 나라의 언어로 직접 읽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를 보다 오롯이 체험해본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확실히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자들에게 자연스레 주어지는 하나의 특권이다. 또한 어떤 나라의 문화에 매력을 느껴 그 나라의 언어까지 배우게 되었다는 사람들의 말도 충분히 그럴 법하다고 이해를 하게 되었다. 예컨대 케이 팝을 너무 좋아해 한국어를 배운다는 외국인들처럼.


커피

미술관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있었다. 소호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Y와 이른 저녁을 먹기로 전까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면서 잠깐 쉴 생각이었다. 테이트 모던에서 템스 강 반대 방향으로 거리를 조금 걸으면 나오는 카페. 이곳은 와인 바를 겸한다. 영국에서는 카페 겸 와인 바 느낌의 가게가 생각보다 많다. 내 목적과는 맞지 않으니 패스. 구글 맵에 검색하니 다시 템스 강 쪽으로 걸어가서 템스 강가를 따라 나 있는 길을 조금 걷다보면 커피 숍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커피 원두나 커피 내리는 기구 등을 파는 상점, 다른 하나는 이미 만석. 결국 테이트 모던 인근의 커피 숍에 자리를 잡지 못했고, 일단 식당이 있는 소호 거리로 이동하기로 했다.


거리에는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렇게 가늘게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기도 하고, 우산을 꺼내 쓰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적게 내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를 그냥 맞고 다닌다. 나도 비를 그냥 맞기로 하고, 패딩 모자를 덮어 쓰고 다시 템스 강 위를 잇는 다리를 건너 지하철 역 쪽으로 향했다. 템스 강 위의 유람선은 관광객들을 태운 채 여전히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Tottenham Court Road 역. 런던에서 아주 번화한 소호 거리에 있는 지하철 역이다. 지하철 노선이 3개나 지나서 접근성도 좋고, 패딩턴 역에서는 Elizabeth line을 타고 두 정거장만 가면 되어서 내 숙소와도 가깝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조금 걸으면 어제 뮤지컬을 봤던 극장과 저녁을 먹었던 차이나 타운이 나온다. 오늘 스테이크를 먹기로 한 Flat Iron 이라는 식당도 이 거리에 있다. 어제 차이나 타운에서처럼 여전히 소호 거리는 사람들이 몹시 많았다.


나는 다시 카페를 탐색했고, Arro Coffee라는 커피 숍에 겨우 자리를 잡고 콜드 브루를 주문했다. 영국 카페에서는 주문 벨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전에 일본에 갔을 때도 그랬다. 아마도 매장 직원이 음료의 주문을 받고, 음료를 제조해서, 손님에게 건네는 것까지의 과정을 한 번에 다 한 뒤에서야 다음 손님의 주문을 받기 때문에 벨이 필요 없이 서빙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한국에서는 주문을 받는 줄이 늘어서 있으면 연이어 주문만 쫙 받은 뒤, 음료를 쭉 만들고, 음료를 내리다가 대기열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중간에 주문을 받으러 가기도 한다. 그러니 주문이 꼬이지 않기 위해 벨이나 번호표를 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 특유의 '빨리빨리'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콜드 브루의 맛은 약간 짰다. 예전에 한 번 친구들과 셋이서 카페에 갔는데, 콜드 브루를 signature로 내놓은 매장이라서 나와 친구 한 명은 콜드 브루를 시켰다. 다른 한 명은 커피를 잘 안 마시는 친구였는데, 콜드 브루에 대해 '간장 맛이 나는 음료 아니냐' 라고 해서 그 때는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이곳에서의 콜드 브루에 대해서는 그 표현이 꽤나 잘 들어맞는다. Self bar에서 설탕을 가져와서 많이 들이부었는데도 짠 맛이 느껴졌다. 카페의 자리도 그리 넓은 편이 아니고, 커피도 별로 맛이 없고, 공공 와이파이도 신호가 매우 약했다.


스테이크, 그리고 소호 거리

Y가 찾은 Flat Iron이라는 스테이크 집은 소호 거리 인근에만 세 곳이나 있는 체인점이다. 5시 조금 넘어서 방문했는데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적고 나왔다. 소호 거리를 약 한 시간 동안 이곳저곳 걷다가, 6시 15분 쯤 되어 우리는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에서 빈 자리를 잠깐 기다리는 동안 직원이 팝콘을 한 그릇 퍼서 주었다. 식당에는 무슨 외국 노래가 나오고 있었는데, Y는 식당 점원과 자연스레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 노래는 미국 노래 아녜요? 여기는 영국인데 미국 노래가 흘러나와 미국인 줄 알았잖아요."

"저도 너무 좋아하는 미국 노래에요. 지금만큼은 영국인인 제가 미국인이 된 기분인 걸요? 하하하."


Y가 자연스레 말을 건넨 것부터 이어지는 그들의 몇 마디 대화까지 모두 미국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 같았다. 우리는 스테이크와 몇 개의 small dish, 소스, 음료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옆 자리에서 한국어 대화가 들렸다. 나는 유심히 듣지는 않았는데, 아마 메뉴를 어떻게 정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나보다. Y는 웃으며 그들에게 또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저기 한국 분이시면 제가 메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려드려도 괜찮을까요?"

"어머! 네, 그럼 좋죠."

"아 이 가게의 스테이크는 ~ 종류가 있는데, 이게 ~하고 저건 ~에요. Small dish도 이 쪽에 있고, 소스는 ~한 것들이 있고... 저희도 조금 전에 직원한테 물어보고 왔어요."

"어머 감사해요!"


Y가 아니었으면 나는 한국어가 들렸을 때 속으로 조금 반가워하다가 말았으리라. 그런데 이것은 Y의 성격이 밝은 것도 있겠으나, 해외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국에서 식당에 갔는데 옆 사람이 메뉴를 추천해주겠다고 하면 '여기 사장님도 아니면서 왠 오지랖이냐' 하는 생각과 함께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겠으나, 만약 낯선 외국 식당에서 한국인이 메뉴에 대해 얘기해주겠다며 말을 걸어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만약 장소를 런던 대신 제주도나 강릉 같은 국내 여행지로 대입해보면 느낌이 제법 다를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보면 이건 확실히 해외 여행에서만 통하는 감성이다.


스테이크는 맛있었지만, small dish였던 시금치, 매쉬 포테이토 등은 양념이 강해 거의 입에 대지도 못했다. 배가 별로 안 고팠었던 탓도 있다. 점심도 일찍 먹고 거리도 좀 걸었는데 외국 음식에 적응이 잘 안된 건지 평소보다 소화가 느린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뒤 Y는 박물관을 한 군데 더 들렀다가 숙소로 간다고 했고, 나는 바로 숙소로 들어가서 쉴 생각이었다. 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다가 중간에 헤어지기로 했고, 사람이 몹시 붐비는 소호의 거리를 또 다시 걷게 되었다. Vegan shop 앞을 지나갈 때 Y는 내게 물었다.


"S.H는 비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Vegan shop은 처음 봤지만, 영국에 와서 식당의 메뉴나 마트의 제품마다 대부분 비건 여부가 표시되어 있는 것은 나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비건 이슈가 한국에서보다 좀 더 중요한가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일단 저는 비건이 아니에요. 고기를 좋아하죠. 그리고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고기도 적당히 먹어야 하니, 비건이 그리 좋은 식습관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식습관으로서 채식을 택한다면 오히려 그건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육식은 동물을 죽이는 거라며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비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 행태가 조금 과격할 때가 있어요. 고기 파는 식당에 다짜고짜 들어가서 육식은 폭력이라고 외치는 건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이 되는 거 아녜요."

"음 그쵸..."

"그리고 비건들이 먹는 아보카도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많은 벌들이 죽고,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하다잖아요. 이런 걸 보면 동물을 보호한다는 논리조차 맞지 않는 거구요."

"음 그렇네요..."

"최근에 식물성 대체육이 개발되었잖아요. 저는 굳이 비건들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면, 이런 방향이 맞다고 생각해요.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논리에 맞는 유의미한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겠죠."


지난 학기 문학 교양 수업에서 <채식주의자> 강의 시간에 식물성 대체육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어서 이 대목에서는 다행히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다. 런던 거리를 걷다 보면 가끔씩 성인 남성 둘이서 손을 잡고 가벼운 스킨십을 하며 걸어가는 것도 볼 수 있었는데, 우리는 동성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Y는 동성애자들이 굳이 거리 한복판에 몰려 나와 퀴어 축제를 펼치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며, 한 번은 자신이 한국에 갔을 때 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퀴어 축제 현장을 마주치게 되어 불쾌했다는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는 직접 본 적은 없고 매체로만 접했으니 아주 약간의 반감 정도만 가지고 있었으나, 역시 직접 뭔가를 경험하면 그것에 대한 생각이 훨씬 강해지는 법이다.


"Y는 미국에 있을 때 친구들과도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많이 하나요? 제 주변이 그런 걸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걸 민감한 topic이라고 생각해서 친구들이나 가족끼리 이야기를 잘 꺼내지는 않거든요."

"그럼요. 꽤 자주 해요. 다들 자기 생각을 말하고 논쟁하는 일도 많아요."

"그런데 만약 그러다가 반대 의견이 충돌해버리면 분위기가 좀 싸해지지 않나요?"

"그냥 논쟁도 대화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충돌이 너무 강하면 다음부터는 그 둘은 서로 잘 보지는 않겠죠."

"그렇군요. 한국에서는 예를 들어 젠더 갈등 관련된 얘기도 워낙 민감한 issue가 되었다보니, 이제는 대화의 주제로서 거의 금기시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럼 S.H는 친구들과 주로 무슨 얘기를 하나요?"


나는 여기서 잠깐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카페에 가서 친구들과 얘기하는 것이 하나의 취미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럼 그동안 그들과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던 걸까. 비건, 동성애, 젠더 갈등이 대화의 화제가 된 적은 아마 한 번도 없을 것 같다.


"음... 일단 일이나 공부 얘기를 좀 많이 하는 것 같구요."

"일 얘기라면 일에 대한 가치관, 워라밸 뭐 이런 얘기인가요?"

"네 그렇죠. 일에 대한 태도나 일을 하는 방법, 습관 같은 것들이요. 아니면 취미가 비슷한 친구들과는 취미와 관련된 얘기를 할 때도 많구요."

"혹시 그럼 제가 이런 얘기를 꺼낸 게 불편했나요?"

"아뇨 전혀요. 오히려 흥미로워서 좋았어요. 한국에서는 이런 주제로 얘기를 거의 못 해봤으니까요."


약 8시 쯤 되어 박물관 근처에 이르렀고, Y는 박물관이 다행히 아직 영업 중인 것 같다며 자신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가겠다고 했다.


"우리 인스타로 서로 소식을 앞으로... 아 참 인스타는 안 하신다고 하셨죠. 그럼 우리 카톡은 있으니 또 연락해요!"

"네, 즐거운 관람 되세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Y와 헤어졌고 나는 복잡한 소호 거리를 돌파해 얼른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걸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하철 역의 입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폐쇄되어 있었다. 약 15분을 걸어서 다른 지하철 역으로 가서 Elizabeth line을 타고 패딩턴으로 향했다. 밤인데다가 커튼을 치니 지하라는 사실이 약간은 감춰진 듯한 호텔 객실로 돌아왔다. 여행의 피로가 이제야 몰려오는 것 같았다. 영국과 한국은 9시간 시차가 나는데, 별다른 시차 적응 없이 첫 날부터 생활했었다. 내일은 좀 더 널널하게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Day 4, 5 이틀 동안은 동행을 미리 구하지 않았었고, 혼자 다닐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동행과 다니는 게 나름 신선한 재미가 있기도 하고, 또 하루 종일 혼자 있으면 조금 심심할 것 같기도 해서 동행 구하는 유랑 카페를 다시 뒤적거렸다.


'아스날 구장 근처 펍에서 EPL 경기 시청'


펍에서 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게 흥미로워 보였다. 축구는 같이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펍 이름이 The Gunners였는데, The Gunners는 아스날 구단의 애칭이다. 찾아보니 이 펍은 현지의 아스날 팬들이 모여서 경기를 다 같이 관람하는 장소였다. 동행이 어떤 사람이든 컨텐츠는 나름 보장된 일정이니,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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