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여행기 시리즈는 매주 금요일 저녁 8시에 연재 예정입니다.
인파로 가득찬 소호 거리에 약간은 질리기도 했고, 지하에 배정받은 호텔 객실을 내일 제대로 교체해줄지에 대한 고민도 조금 들었던 전날 밤이었지만, 오늘은 동행과의 일정도 오후인 만큼 좀 늦게까지 푹 자고 천천히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좋은 호텔이라 그런지 화장실은 확실히 깔끔하고 좋았다. 샤워기의 수압과 수온도 씻기에 아주 편안했다. 방 안의 온도도 직접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어 내가 편안한 온도로 맞춰놓고 잠을 잘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지하인 것만 뺀다면 단점은 없어 보였다. 호텔 데스크 직원이 캐리어만 다 챙겨서 방에 놓고 나가면 그걸 직접 새 객실에 미리 옮겨두겠다고 했다. 그냥 나가기에는 데스크 직원들이 약간은 미심쩍어 나가는 길에 다시 데스크에 들르기로 했다.
"저 오늘 객실을 바꾸겠다고 한 사람인데요. 제 방 번호는 8XX에요."
"캐리어는 다 챙겼죠?"
"네. 다 챙겼고, 그것은 제 방 안에 있어요. 저는 밖에 나갔다가 저녁 쯤에 다시 돌아올 예정이에요. 그 때 어떻게 하면 되죠?"
"단지 새 객실의 키를 받아가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호텔 전체 객실의 수가 적지 않음에도 그들은 조그마한 노트 한 장에 정보를 잘 기록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객실을 바꾸겠다고 한 사실, 내 방 번호를 모두 바로 알아차렸다. 오늘 돌아와서 새 키를 받으면 지상 층의 객실로 갈 수 있고, 거기에 내 캐리어가 놓여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고 밖에 나가기로 했다.
동행과는 The Gunners라는 펍에서 1시 반 쯤 만나 미리 자리를 잡고, 2시에 시작하는 풀럼 vs 아스널 경기를 같이 보기로 했다. 펍은 런던 시내 중심부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쯤 북부로 올라가면 나오는 하이베리라는 동네에 위치해 있는데, 바로 근처에 아스널 구단의 홈 경기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이 있다. 오늘 경기는 풀럼 홈에서 열리는 경기라서, 이 동네에 사람이 붐비지는 않아 보였다. 하이베리로 가는 길은 아주 맘에 들었다. 버스의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아 30분 동안 한산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확 풍기는 하이베리 동네의 풍경을 바라보며 펍으로 향했다.
펍에는 20대 중반의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남성이 2명 있었고, 각각 혼자 테이블을 잡고 앉아 있었다. 오픈 카톡으로 연락이 닿은 동행 Y.J에게 나도 도착했다고 카톡을 보낸 뒤 펍 문을 열고 들어가 고개를 기웃거리자, Y.J는 유랑 동행이냐며 반가워하는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Y.J는 키가 훤칠하게 컸고, 인사를 건네는 인상이 좋아 보였다. 펍은 아스널 클럽을 상징하는 빨간색으로 뒤덮인 인테리어였다. 경기 시작 30분 전인데, 펍은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직 한 끼도 먹지 않은 터라 점심 끼니를 해결할 겸 햄버거과 생맥주를 시켰다.
"제가 어제 다른 동행을 한 명 만났는데, 그 동행도 아스널 펍에 와서 같이 경기를 보기로 했어요. 괜찮죠?"
"그럼요."
Y.J는 같이 영국 여행을 온 친구가 토트넘 경기를 직관하러 가느라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되어 동행을 구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그가 축구를 안 좋아해서 친구랑 일정을 따로 보내는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그 둘은 축구, 그 중에서도 EPL을 정말 좋아했고, 다만 토트넘, 아스널이라는 서로 다른 구단을 좋아해서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구단 경기 시청에 시간을 쓰기 위해 일정을 따로 보내는 것이었다.
"Y.J는 직관은 안 가세요?"
"아... 직관을 가려고 했는데 티켓 사기를 당했어요. S 대행사를 통해 며칠 전에 있었던 아스널 홈 경기 티켓을 샀는데, 그게 이미 지난 티켓이었더라구요. 그래서 펍에라도 온 거에요."
"티켓 사기를 당하다니. 그건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겠는데요."
최소 10만원 이상을 날렸을 그의 상황에 공감하는 한편, 며칠 뒤에 직관을 가기로 한 웨스트햄 구단의 경기 티켓을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서 산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웨스트햄 구단은 멤버십 같은 거 상관없이 회원 가입만 하면 공식 홈페이지에서 티켓을 구매할 수 있고, 결제를 하면 메일로 입장 바코드를 보내준다. 아스널, 토트넘 같이 유명한 클럽들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티켓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지, 대행사를 통해 티켓을 샀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축구 경기 직관만 3번 이상 하는 영국 여행 일정을 잡았던 친구에게 티켓을 구하는 방법을 물어봤을 때, 모두 S 대행사를 통해 구매했다고 했다. 그 곳에서 티켓 사기를 당했다니. 잠깐 검색해봤을 때는 해외축구 티켓 대행사로 꽤나 유명한 업체인 듯한데, 아주 믿을 만한 곳은 못 되나 보다. 일단 10만원 이상의 큰 경제적 손실에 더해, 나처럼 축구를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도 축구 경기 직관 일정이 취소된다면 허탈하고 실망스러울텐데 아스널 클럽을 오래도록 좋아하던 한국인 팬에게 직관 일정 취소라면 상실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라 그런지, 그는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덤덤한 말투로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Y.J의 동행 한 명이 도착했고, 펍에 처음 들어왔을 때 보였던 한국인 한 명이 혹시 같이 join 해서 봐도 되냐고 물었다. 우리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자리를 더 넓은 테이블로 옮겼다. 경기 시작 직전에 아스널 머플러를 두른 또 한 명의 한국인이 펍에 왔고, 두리번거리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함께 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서 다섯 명이서 같이 경기를 보게 되었다. 이렇게 계획에 없는 동행들을 만나 잠깐의 시간이지만 자연스레 함께 하는 것. 이것은 여행이라서 그런 것에 더해 축구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더라도, 설령 성격이 조금 안 맞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저 축구 경기를 보는 2시간 동안 함께 축구에 관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고, 탄식과 함성, 박수 갈채를 함께 보낼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다들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이었고, 나를 빼고 나머지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아스널 구단의 팬이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세 명이나 아스널 구단의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이번 시즌 선수단 명단과 아스널의 최근 경기력은 당연히 다들 꿰고 있었고, 한 명은 몇 년 전에 있었던 경기들에서 일어났던 인상적인 주요 장면에 대해서 설명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경기는 아스널이 전반전 이른 시간 선제골을 넣었지만, 풀럼이 두 골을 연달아 득점하며 아쉽게 1:2로 패했다. 경기 시작 30분 전만 해도 거의 비어 있던 펍은 경기 시작한 후에는 테이블 없이 서서 맥주를 마시며 보는 사람들도 제법 있을 정도로 가득 찼다. 아스널 팬인 나의 친구 C에게 하이베리 펍에 아스널 경기를 보러 간다고 미리 말했더니,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나에게 '영국 아저씨들 축구에 엄청 진심일텐데 경기에서 패배해서 펍의 분위기가 험난하지는 않느냐'며 카톡을 보내왔다. 그는 예전에 자신이 EPL 경기장 직관을 갔을 때 아주 열성적인 (거의 극성에 가까운) 팬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적이 있다며, 라이벌 클럽을 헐뜯는 말을 혼자서 연신 하고서는 사라졌다는 일화를 덧붙였다. 아스널이 패배해서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욕이나 큰 소리가 들린다든지 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평소에 내가 아스널 팬은 아니라서 경기에서 진 것에 대해 특별히 아쉬울 것은 없었지만, 펍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아스널 팬이었을 테니 아스널이 이겨서 축제 분위기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함에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EPL이나 해외 축구를 즐겨보지는 않고, 대신 K리그 경기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가끔씩 시간 되면 가까운 경기장에 찾아갈 수 있어서이다. 그래서 먼 곳에 있는 해외 축구 팀의 열렬한 팬임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팬심을 유지하는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마주앉아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2시간 동안 함께 응원하고 때로는 함께 아쉬워하며 감정을 공유했다. 축구가 그 매개가 되어 주고, 그 중에서도 같은 클럽을 응원한다는 감정은 몰입감과 유대감을 증폭시켜준다. 어쩌면 그거면 아주 충분하다고, 그 이상의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국내에서 축구장을 직접 찾는 횟수는 1년에 손에 꼽을 만큼인 걸 생각해보면, K리그 클럽에 대한 나의 팬심이나 먼 곳에 있는 해외 리그 클럽에 대한 그들의 팬심이나 어찌 보면 큰 차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스널 홈 구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까지 걸어서 구경을 갔다가 다시 2층 버스를 타러 갔다. 경기나 훈련 같은 공식 일정도 없고, 주말의 약간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경기장은 조용했고, 생각보다 구경 거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고즈넉하고 한산한 분위기에 아스널 구단 경기장과 펍들이 풍기는 축구 동네라는 낭만까지. 하이베리는 그런 면에서 썩 맘에 드는 동네였다. 최소한 어제의 아주 시끄럽고 사람이 붐비는 소호 거리보다는 말이다. Y.J는 아스널 구단을 좋아해 아예 숙소까지 하이베리에 잡았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이곳을 숙소 위치로 잡는 것은 약간의 불편함을 동반할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아스널 관련 일정만 잡을 수는 없을 테니 교통 면에서도 그렇고, 식당이나 마트도 런던 시내보다는 제한적일 테니. 그런 면에서 런던 시내 교통의 요충지이면서, 호텔 인근이 아주 시끄럽지도 않은 내 숙소 위치가 괜찮은 것 같다고 스스로의 결정을 합리화하며, 맘에 들었던 하이베리 동네를 그렇게 뒤로 떠나보내며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도보 5분 거리에 마트가 있었는데, 여기서 저녁으로 먹을 것들을 사올 생각이었다. 다른 나라의 마트나 편의점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다. 한국에서 평소에 마트나 편의점에서 즉석 식품이나 간단 조리 제품을 구매해 끼니를 때우는 일이 종종 있음을 생각해보면, 식당에 가는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 나라의 일상을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이다. 먼저 샌드위치, 랩, 바게트 등이 냉장고에 진열되어 있는 코너를 둘러보다가 chicken shawarma wrap을 골랐다. 무난하게 햄 치즈를 고르기에는 아쉬워서 뭔가 새로운 걸 먹어보고 싶었는데, chicken이 들어간 것이면 실패 확률은 낮아보였다. 한국에서 챙겨온 컵라면을 먹을까 하다가, 그래도 영국에서 파는 컵라면을 먹어보려고 chicken noodle이라고 쓰인 컵라면을 골랐다. 밤에 야식으로 먹을 감자칩, 음료수 등까지 몇 개의 품목을 더 골라담은 뒤 장보기를 마쳤다.
호텔에 돌아와서는 5층에 위치한 새 객실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직원의 말대로 단지 데스크에서 새 객실의 키를 받아갔고, 나의 캐리어는 새 객실의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호텔 건물 앞이 내려다보였고, 왠지 방의 크기도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숙소 관련된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어 마음이 놓였다. 이제 여기서 편하게 3박을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트에서 사온 것들을 탁자에 늘어놓고, 탁자 한 켠에는 핸드폰을 놓아 유튜브를 켜고, 마치 한국에서 혼밥을 하는 것처럼 저녁 식사를 했다. 좋은 동행을 만나 식사를 같이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고 여행에서 큰 추억으로 남지만, 그 중간중간 이렇게 익숙함과 낯섦 그 사이 어딘가의 느낌을 받으며 혼자 밥을 먹는 것도 내게는 중요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