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 카페를 다시 찾아보다가 오후에 스콘과 티를 마실 동행을 구한다는 글에 관심이 갔다. 나와 동갑인 남성 이었는데, 일단 또래이고 카페에서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하니, 동행을 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나는 D에게 함께 할 의향이 있다고 오픈 카톡을 보냈고, 이후에 카톡으로 구체적인 일정을 정하는 과정은 깔끔했고, 동행 한 분이 더 합류할 것 같다고 그는 연락을 보내왔다.
Maison Bertaux. 스콘과 잉글리시 티를 파는 제과점인데,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약속 시간은 2시. 나는 1시 45분 정도에 근처에 도착했고, 바로 옆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다.
'저는 근처에 도착했어요.'
D에게 카톡을 남겨두었다. 1시 55분 정도에 가게 앞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고, 가게 앞으로 가 어렵지 않게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D는 체구는 나보다 조금 작았고, 차분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해 이름과 같거나 유사한 이름의 지인이나 유명인이 있으면, 자연스레 그와 연결시켜 첫 인상을 지레짐작하곤 한다. D의 경우 큰 체구로 유명한 운동 선수와 동명 이인이라서 나는 자연스레 그렇게 첫 인상을 상상했었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작은 그의 체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동행 한 분 더 온다고 했었는데, 연락이 안 되네요. 일단 저희끼리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잠수 타는 동행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정이 바뀌어서 못 간다고 미리 연락 한 번 남겨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내부는 두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우리는 빵과 계산대가 놓인 쪽의 구역으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입구는 두 개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두 구역의 끝으로 가면 빵과 음료를 만드는 주방으로 모두 닿아 있는 구조였다. 가게는 다소 비좁은 느낌이 있었는데, 자리들 사이에 나 있는 좁은 통로로 서빙하는 직원 한 명이 지나가면 꽉 찰 정도였다.
"메뉴는 어떤 걸로 시킬까요? 영국 와서 잉글리시 티를 못 먹어봐서 저는 그걸로 시키려구요."
D도 잉글리시 티를 시키겠다고 했고, 토핑이 서로 다른 스콘 2개도 같이 시켰다. 바로 옆 테이블도 한국 사람들인 것 같았는데, 우리가 한국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었는지 그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한국 분이세요? 혹시 ~~ 메뉴는 어떤 건지 아세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둘 다 여성이었고, 한 명은 20대 초반, 다른 한 명은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어보였는데, 대화를 잠깐 들어보니 둘은 서로 존칭을 쓰고 있었고, 친한 사이 같지는 않았다.
"혹시 유랑에서 동행 구해서 오신 거에요?"
나는 궁금증이 들어 물어보았다.
"그건 아니고, 둘 다 혼자 와서 즉석에서 합석했어요. 거기는 유랑 동행이세요?"
"네."
각자 혼자 왔는데 즉석에서 동행을 하는 경우도 있구나. 여행에는 생각보다 여러 형태의 동행이 있다. D와 다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잠수 타는 동행을 나도 겪었던 터라 자연스레 화제를 던졌다.
"혹시 오늘 온다고 했던 분처럼 동행을 할 것처럼 얘기하다가 연락이 갑자기 안 되었던 사람이 또 있었나요?"
"글쎄요. 몇 번 동행을 구해봤는데, 저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몇 번 있었거든요. 오늘 저녁 때 원래 웨스트햄 구단 경기를 동행과 함께 직관하기로 했는데, 런던 와서부터는 계속 카톡을 읽고 씹더라구요."
"그래요? 하하하하하. 그건 좀 이상하네요. 왜 연락을 굳이 씹는 거죠."
"그러게요. 일정이 바뀌었다고 연락을 남겨주면 될 텐데요.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아요. 어쨌든 저는 기다리게 되잖아요. 아무튼 그런 일을 겪고 보니, D가 오늘 제 시간에 나타나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네요."
"하하하하하. 그건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경우도 있군요."
D는 말 중간중간에 큰 웃음을 섞는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비웃음이나 냉소는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기분 좋아지는 웃음 쪽에 가까웠는데, 다만 그 웃음이 다소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도 나온다는 것이 조금 재미있는 지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한 분위기를 자연스레 풀어보려는 그만의 습관인 것 같기도 했다.
점원이 뜨거운 차가 담긴 주전자, 거름망, 작은 컵에 담긴 우유, 그리고 잼과 스콘을 가져다 주었다. D는 잉글리시 티를 마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실 컵 위에 거름망을 올리고 그 위에 주전자로 차를 적당한 양 따르면 된다, 그러면 차의 찌꺼기 같은 것이 걸러질 수 있다, 그대로 마셔도 되는데, 조금 맛이 쓸 수 있으니 우유를 조금 넣고, 필요하면 설탕도 넣어서 마시면 된다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우유와 설탕을 모두 적당히 넣었다. 우유가 섞여 약간은 카페 라떼의 느낌도 났고, 설탕을 조금 넣은 덕분에 맛이 쓰지 않았다. 평소에 스콘은 퍽퍽한 빵이라는 생각에 별로 먹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잉글리시 티와 같이 먹으니 조합이 괜찮았다. 딸기 잼을 조금 발라서 스콘을 같이 먹고 있는데, 계산대에 있던 머리가 희끗한 여성 점원이 주방으로 가는 길에 우리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스콘을 먹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스콘은 나이프로 이렇게 반으로 갈라요. 그리고 안 쪽으로 잼을 듬뿍 떠서 이렇게 쭉 펼쳐서 먹으면 돼요. 괜찮나요?"
"네 좋네요. 감사해요."
우리나라로 치면 시골 맛집을 운영하는 할머니가 자기네 가게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을 다소 거친 손짓과 말투로 손님들에게 알려주는 것과 비슷해보였다. 기분이 상한다기 보다는, 그저 식당의 개성 정도로 느껴지는 딱 그 정도의 거침이었다. 아무튼 그녀가 스콘에 잼을 잘 펴발라준 덕분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바로 먹으면 되었다.
"D는 이번 여행에서 영국 말고 다른 유럽 국가도 가실 계획인가요?"
"저는 독일에서 교환 학생 중이에요. 오늘 밤 비행기를 타고 영국을 떠나요."
"그러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뇨. 다시 독일 행이요. 지금 짧은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영국 여행을 와 있는 거에요. 독일은 학기가 한국과는 조금 달라요. 돌아가면 다시 수업을 듣고, 시험도 봐야 하죠. 하하하하하."
"그렇군요.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에서의 1학기는 애매하게 건너뛰게 되는 거네요."
"그렇죠. 타이밍이 좋지 못하죠. 하하하하하."
"유럽 교환 학생을 오면 주변 다른 국가들도 여행할 수 있어서 그건 좋아 보이네요."
"네, 유럽 내에서 이동하는 비행기는 가격도 저렴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짧은 방학 때 다른 근처 국가를 다녀오기 좋죠."
속으로는 그는 어떤 전공을 하는지, 독일 학교의 수업은 어떤지, 한국 대학과는 분위기가 어떻게 다른지 등을 캐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1시간 반 간의 짧은 만남에서 너무 개인적인 것을 많이 묻는 건 그다지 좋지는 않아 보였다. 여행과 관련하여 화제를 이어가는 게 더 적절해보였다.
"S.H는 영국 와서 뭘 하셨어요?"
"뮤지컬을 봤어요. 레 미제라블이요."
"오 아주 멋진 뮤지컬이죠. 축구는 안 보세요? 저는 며칠 전 토트넘 경기 직관을 다녀왔어요.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은 걸 보고 왔죠."
"아스널 경기를 펍에 가서 보고 왔어요. 오늘은 웨스트햄 구단의 경기장에 직관을 하러 가요."
"그게 아까 잠수 탄 동행이군요."
"네 그건 좀 아쉽게 됐죠. 그래도 경기장에 가는 건 기대가 되네요."
"새해 맞이 불꽃놀이는 보러 가셨나요? 소호 거리 쪽에서 했던 거요."
"저는 가지 않았어요. 런던에서 며칠 간 다녀 보니 사람 많은 번화한 거리는 제 취향은 아닌 거 같더라구요. 좀 쉬기도 하고, 공원 산책을 하거나 커피 마시고, 이런 일정들이 저는 좀 더 편안하게 좋았던 것 같아요."
"빡센 일정은 안 좋아하시는 군요! 하하하하하."
연말에 런던을 오는 관광객들 중 아마 대다수가 불꽃놀이를 보려고 할 것이며,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자리는 자리 잡기도 매우 어렵다고 한다. 내 친구들도 12월 31일에 불꽃놀이를 보며 새해를 맞으면 좋겠다고 추천을 해주었지만, 그 때도 썩 내키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소호 거리를 이틀 정도 걸어보니, 그 생각이 좀 더 강해졌다. D는 불꽃놀이를 안 가냐며 놀라며 반문하는 대신 특유의 웃음과 함께 나의 여행 스타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 우리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눴다. D는 런던 마지막 일정으로 오후에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방문할 계획이라고 했고, 나는 며칠 전에 테이트 모던에 다녀왔으며, 평소에 미술관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생각보다 작품과 설명을 둘러보는 게 재미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티와 스콘을 다 먹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우리가 만난 2시에는 대기열이 없었는데, 지금 밖을 보니 5팀 정도가 대기를 하려고 줄을 서 있었다.
"오늘 제 동행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좋은 티타임이었어요."
"저도 즐거운 동행 일정이었어요. 마지막 날도 잘 보내다 가세요."
본인이 올린 동행 일정에 함께 해주어 고맙다는 마지막 인사까지. D는 기본적인 매너를 갖추고 있었고, 처음 만나 대화했음에도 불편하지 않은 상대였다. 마지막까지 특유의 쾌활한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는 좀처럼 미리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축구 동행의 잠수로 약간은 심심할 수 있었던 오늘 하루였는데, 일부 일정을 좋은 동행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축구 경기 직관
웨스트햄 경기장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은 Stratford. 이곳은 아주 번화하다. 지하철 역이 커다란 백화점의 지하와 이어져있고, 백화점 2층에서 밖으로 나와 15분 정도 걸으면 웨스트햄의 홈 구장 London Stadium이 나온다. 아시안 푸드가 먹고 싶어 쌀국수 집을 찾아놓았는데, 와보니 백화점 푸드코트에 있는 식당인 것 같았다. 백화점 안은 아주 붐볐다. 웨스트햄의 홈 경기가 있는 날이라서 그런 걸까. 나는 소호 거리에서 필사적으로 호텔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던 것처럼, 두 손으로 구글 맵을 켠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 백화점 내의 인파를 뚫고 쌀국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푸드코트에도 빈 자리가 거의 없어보였는데, 다행히 서성이다가 빈 자리를 하나 발견해서 얼른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긴 직사각형 바 테이블이었고, 내 앞에는 아저씨와 그의 자녀들로 보이는 두 어린 형제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홈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도 같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원래 아는 사이인 것 같지는 않았고, 같은 축구 팀을 응원하는데 오늘 홈 경기가 있기도 하니 그걸 화제 삼아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자연스레 캐치할 정도로 내 영어 듣기 실력이 좋지는 않아서, 나는 그저 밥 먹는 데에 집중했다.
웨스트햄 구단의 official store를 목적지로 설정하려고 했는데,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고 나와 있었다. 지금은 5시 반이 조금 넘었다. 유니폼 등 기념품을 꼭 사고 싶었는데, 이건 너무 아쉬웠다. 더 일찍 왔어야 하는 걸까. 그래도 이 복잡한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경기장 근처로 가 있는 것이 나아 보였다. 백화점을 나와 조금 걸으니 멀리서 축구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옆 쪽으로는 Stratford 동네의 높은 건물들이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흔한 도시의 야경이었다. 소호 거리 쪽 런던 시내는 높은 건물이 많지는 않고, 5~6층 쯤 되는 상점 건물이나 백화점이 많이 늘어서 있는 식이었는데, Stratford는 높은 건물들이 많이 솟아 있었다. 지금까지 본 영국 동네 중에 가장 현대 도시, 또는 서울스러운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그 옆에 축구장이 있는 것이 뭔가 어울리기도 하면서, 아스날 경기장이 있는 하이베리 동네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하이베리는 아스날 클럽 그 자체가 동네의 상징인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Stratford라는 번화한 도시에 백화점, 높은 건물과 더불어 하나의 관광 거리로서 축구장이 있는 느낌이었다. 축구장 앞에서 사진을 한 컷 남기고 싶어서 잠깐 멈춰서서 가족 단위로 온 사람을 찾아 사진을 부탁했다. 혼자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의 조언은 사진을 부탁할 때는 가족 단위로 다니는 사람을 공략하라는 것이었다. 소매치기 당할 확률이 낮다는 것이었다.
Official store는 불이 켜져 있었고, 안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입구에 대기하는 줄도 조금 있었다. 퇴장하는 사람 수에 맞게 진행 요원이 입장을 시키고 있었다. 대략 10분 정도 기다리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홈 경기가 있는 날에 official store를 일찍 닫을 리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5시에 문을 닫는 것은 아마 평소 얘기인 것 같았다. EPL 구단들은 브랜드 가치가 기본적으로 있으니 현지 팬들, 외국인 관광객들이 경기장에 방문하면 official store에 들러서 굿즈까지 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홈 경기가 저녁에 있는 날은 official store가 굳이 문을 일찍 닫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평소에 쇼핑 욕심이 없는 나도 official store에 들어서니 이것저것 눈에 끌리는 것이 많았다. 우선 내가 입을 유니폼 디자인의 반팔 트레이닝 복을 하나 집었다. 러닝할 때 입으면 좋아 보였다. 그리고 축구장에 갈 때 흔히들 두르는 머플러 쪽으로 갔다. 웨스트햄이 지난 시즌 유럽 대륙 컵에서 우승을 했는데, 우승까지 가는 여정의 주요 경기를 기념하는 머플러가 몇 종류 있었다. 내가 쓸 것과 축구를 매우 좋아하는 친구 L.J에게 기념품으로 선물해 줄 것까지 두 개를 구입했다. 합해서 대략 9만원 정도 나왔다. 내가 쓸 머플러는 바로 포장을 뜯어 착용했다. 쇼핑을 마치고 나오니 줄이 훨씬 길게 늘어서 있었다. 최소 30분 정도는 대기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
아직 경기 시작까지는 1시간이 남았는데, 자리를 잡고 경기장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경기장 입구는 진행 요원들이 빼곡히 늘어서 통제를 하고 있었다. 출입구도 지하철 개찰구와 같은 게이트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온다고 해서, 먹을 간식을 사서 들어가기로 했다. 치킨 텐더와 감자 튀김, 탄산 음료를 샀고, 한국 축구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음료의 뚜껑은 모두 해체한 채로 들어가야 했다. 음료 뚜껑을 선수들에게 던지는 걸 막겠다는 안전 상의 의도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물론 안전이야 당연히 중요한 게 맞다만 음료수 뚜껑은 던져도 경기장까지 갈 것 같지도 않은데 이게 어쩌다 세계적으로 규제의 대상까지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경기는 생각보다 시시하고 지루하게 흘러갔다. 결과는 0대 0 무승부에, 주요 장면조차 거의 없는 경기였다. 그나마 원정팀 브라이튼이 몇 번 유효한 공격을 했는데, 이 때 웨스트햄 골키퍼가 선방을 잘 했다는 것 정도가 기억에 남는 경기 내용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보니 웨스트햄 골키퍼가 경기 MVP로 선정이 되어 있었다. 물론 구단 응원가를 다들 외워서 따라부르고, 90분 내내 응원을 열심히 하고, 6만 5천석이 만석이 되었다는 것에서 그들의 축구 열정을 볼 수 있었지만, 경기 내용 자체는 실망스러웠다. 펍에 가서 본 아스널 vs 풀럼 경기는 90분 내내 지루할 틈 없이 긴장감 있게 진행되었는데, 그에 반해 오늘 경기는 경기 내용으로만 따지면 최근에 상암월드컵경기장에 가서 본 FC 서울 vs 울산 현대의 경기가 더 재미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경기가 끝난 뒤 6만 5천 명의 인파가 일제히 진행 요원의 통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지하철 역까지 이동한 것이었다. 경기장에서 지하철 역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리는데, 차로는 통제해두고 갈림길에서는 진행 요원들이 한 쪽은 이동을 막고, 다른 한 쪽만 이동하도록 번갈아 통제하며 인간 신호등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들 통제에 순순히 따르며 이동했다. 덕분에 인파에 휩쓸리지 않고 안전하게 지하철 역까지 갈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축구 선진국으로서의 영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남겨준 부분은 경기장 안에서의 경기 내용보다는 경기 종료 후 이동 시의 질서와 안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