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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여행기 Day 5

by SH

* 유럽 여행기 시리즈는 매주 금요일 저녁 8시에 연재 예정입니다.


익명의 비매너

네이버 카페 '유랑'에서 동행을 구하는 방식은 대략 이러하다. 작성자는 날짜, 장소, 시간대, 하고 싶은 활동, 작성자의 나이와 성별 등의 내용이 담긴 게시글을 작성하고, 글 맨 아래에는 작성자에게 연락할 수 있는 오픈 카톡 링크를 첨부해둔다. 그러면 다른 이용자들이 게시판 검색어에 여행 장소 (예를 들어 '런던')를 입력했을 때, 해당 장소에서 동행을 구하는 게시글이 쭉 나온다. 그 중 관심있는 사람에게 오픈 카톡을 보내는 것이다. 게시글을 직접 쓸 수도 있고, 아니면 검색을 해서 다른 사람의 게시글을 살핀 뒤 관심이 가는 사람에게 연락을 보낼 수도 있다.


내가 뮤지컬 동행을 구한 방식은 전자였고, 아스널 펍에서 축구 관람 동행을 구한 방식은 후자였다. Y의 경우, 연락이 닿았을 때 서로 뜻이 꽤 잘 통했기에 옥스포드 방문 등 뮤지컬 외에도 몇 가지 일정을 더 함께 했고, 마지막 일정까지 그녀는 매우 좋은 동행이었다. 축구 관람을 함께 한 Y.J의 경우는 그의 게시글에서 처음부터 동행을 구하는 시간대와 컨텐츠까지 이미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일정을 더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혼자였다면 할 수 없었을 즐거운 축구 관람 경험이 되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기본적인 매너와 배려심을 장착한 사람임이 느껴졌다. 이렇듯 동행을 구해서 다니는 것은 해외 여행의 하나의 묘미가 되기도 하는데, 좋은 동행과 연락이 닿아 일정을 함께 하는 것이 꼭 순탄하지만은 않다. 서로 연락을 하다가 일정이 안 맞아 취소되는 것이야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비매너 유저들도 있기 마련이다.


먼저, 이성을 만나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동행을 구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이들은 비매너는 아닌 것이, 어찌 보면 본인의 목적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 서로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될 일이고, 그런 사람과 처음에 연락이 닿더라도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을 하면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을 바로 씹거나 채팅방을 나가기 때문에, 동행할 의사가 없음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동행을 할 의사를 어느 정도 밝혀놓다가, 이유를 모르게 잠수를 타는 부류이다. 내 입장에서는 일정을 명확히 결정하지 못한 채 기다리게 되므로,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자들이다. 내게는 그런 사람들이 Day 5까지 세 명 정도 있었다. 먼저, 본인은 축구 덕후라며 EPL 경기를 여러 개 직관할 계획이며, 함께 경기장 직관 동행을 구한다던 자. 한국에서부터 웨스트햄 구단의 경기를 함께 직관하기로 하고, 티켓까지 구매했다. 자리는 떨어져 있어서 저녁을 같이 먹고 경기장에 들어가자고 했는데, 런던에 도착해서부터 연락을 계속 읽고 씹어서 동행이 취소되었다. 다음으로 런던에서 한식이 그립다며 당일 저녁에 한식을 먹을 동행을 구한다던 자. 내가 동행 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그는 나의 위치를 물었다. 나의 위치를 알려주니 답이 없다. 아마도 멀리 있었던 걸까. 마지막으로 재즈 바를 가겠다던 자. 재즈 바는 나도 잠깐 알아봤었던 터라, 그에게 재즈 바는 생각보다 인기가 많아 좋은 자리는 꽤 미리 전에 예매를 해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당일에 갈 거면 자리가 남은 재즈 바를 찾으러 조금 돌아다녀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 사실을 듣고 그러냐며 반문하더니, 그 뒤로 답이 없다.


첫 번째 사람은 한국에서부터 연락을 하다가 급 잠수를 탄 것이라서 다소 악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상황 상 추론해보면 임박해서 동행을 구하려다가 본인이 희망하는 세부적인 일정, 장소와 안 맞아서 동행하려는 마음을 취소한 것 같다. 그러면 그렇다고 연락만 짧게 남겨주었으면, 자연스러운 동행 취소가 되었을텐데 말이다. 이런 것까지 경험이고 여행의 일부이며, 어찌 보면 좋은 동행을 공짜로 구하는 것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막상 여행 와서 직접 당하고 보면 기분이 절대 유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바논 음식

점심은 레바논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먹었다. 구글 맵으로 런던 내 식당을 검색하면 중동 식당이 꽤나 많이 뜨는데, 그 중에서도 레바논 식당이 종종 보인다. 내게 레바논은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쯤에서 대한민국과 맞붙는 나라의 이미지 정도로만 그려졌는데, 레바논 사람들은 무슨 음식을 먹을지가 문득 궁금해져 식당을 찾게 되었다. 애피타이저로는 수프를 시켰고, 양식에서 일반적으로 제공되는 수프보다는 조금 묽고, 간은 약간 짭쪼름한 맛이었다. 크래커를 몇 번 잘게 썬 듯한 과자를 같이 주어서, 스프에 살짝 담갔다가 함께 먹었다. 메인 요리는 양고기 스테이크, 샐러드, 밥이었다. 양고기 스테이크는 무난하게 맛있는 맛이었고, 양꼬치가 아닌 양갈비는 거의 먹어본 적이 없는 내게는 소고기 스테이크와도 비슷한 맛으로 느껴졌다. 고기도 부드러웠고, 양념도 적절했다. 밥은 겉보기에 색이 하얀 모짜렐라 치즈처럼 생겼고, 맛은 간이 살짝 되어 있는 설익은 밥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다. 영국에 와서 밥과 비슷한 걸 먹지 못해서 그런지, 내게는 밥도 아주 맛있었다.


하이드 파크

하이드 파크는 꽤 큰 공원이었다. 공원을 대략 가로가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본다면, 세로 방향을 따라 직선으로 걷는 데에만 15분이 걸리니, 공원 둘레를 따라 산책을 하면 1시간은 충분히 걷고도 남을 크기이다. 내 목적지인 임페리얼 컬리지 블록까지 가려면 세로 방향의 직선을 곧장 따라 15분 만에 갈 수는 있었지만, 여유롭게 공원을 둘러보며 조금 돌아서 가기로 했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러닝 대회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끼를 입은 안내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손으로 같은 방향을 계속 가리키고 있었고, 뛰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웃으며 격려를 보내주었다. 아마도 러닝 코스를 안내하는 모양이었다. 혼자서 달리는 사람도 있고, 여럿이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격려하며 함께 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런던의 날씨가 비가 종종 오기도 했지만, 하이드 파크에 있는 순간 만큼은 날씨가 좋았다. 영국의 겨울 날씨는 한국의 겨울보다 따뜻하고, 한국의 늦가을에서 초겨울 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반바지를 입고 뛰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공원도 마음에 들었고, 러닝 대회의 풍경도 정겨워 보였다. 나도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스쳤다. 물론 운동복을 챙겨오지는 않았지만, 다음에 언젠가 날씨가 적당히 온화할 때 해외 여행을 간다면 그 나라의 공원에서 러닝을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평소 일상에서 하는 일들을 여행에 와서 전혀 낯선 곳에서 해보는 것, 이것이 내게는 여행의 큰 의미 중 하나였다. 최소한 발 디딜 틈 없이 관광객 인파로 붐비는 거리를 걷는 것보다는 말이다.


공원 내에는 호수가 있었는데, 오리 등의 야생 동물들이 호숫가와 그 옆의 모래 바닥에까지 많이 보였다. 안내 판을 보니 무료로 입장하는 공원임에도 야생 동물들이 사람들과 잘 어우러져 지내고, 공원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하이드 파크의 가치로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 공원 이용 시 주의 사항을 잘 지켜달라는 글이 이어서 적혀 있었다. 커피를 파는 곳 앞에는 테이블이 몇 개 야외에 놓여 있었고, 거기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금 걷다 보니 윈터 원더랜드가 나왔다. 하이드 파크에서 겨울에만 개장하는 놀이공원인데, 공원 안에 있는 것이다 보니 규모가 국내 테마파크와 비교될 정도는 아니지만, 대관람차, 회전목마 등 몇 개의 주요 놀이기구와 함께 겨울 컨셉의 테마파크로 꾸며 놓은 곳이었다. 런던 동행을 구하는 글에서 윈터 원더랜드를 같이 갈 동행을 구하겠다는 글도 몇 개 봤었다. 이름부터 괜히 유치한 것 같아 끌리지는 않아서 아예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우연히도 내가 방문한 하이드 파크 내에 있는 것이었다. 내부 소리도 뭔가 시끌시끌해서 근처에 온 김에 분위기라도 구경하려고 했는데, 입구의 직원이 이곳부터는 유료라고 얘기를 해주었다. 미련 없이 윈터 원더랜드를 뒤로 하고, 임페리얼 컬리지가 있는 블록 방향으로 공원을 빠져나가는 길로 걸었다.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거리를 ㄷ자를 그리며 빙글 돌듯이 천천히 걸어오다 보니, 약 1시간 정도에 걸쳐 공원 반대편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핸드드립 커피

임페리얼 컬리지 부근을 조금 걸었는데, 영국식 건물 사이를 걷는다는 느낌 외에 대학 캠퍼스 느낌을 특별히 받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대부분 하나의 캠퍼스 안에 모든 건물이 모여 있는데, 영국의 경우는 건물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방문했던 옥스포드 대학은 사실상 마을 전체를 아주 큰 캠퍼스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 대학교의 건물들 그 사이사이에 상점, 식당, 호텔 등 여러 다른 시설도 위치하고 있는 식이다. 대학교 안과 밖의 구분이 거의 없는 것이다. 임페리얼 컬리지는 런던 시내에 있어서, 교외에 위치한 옥스포드 대학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캠퍼스라는 구역 안에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느낌도 아니어서, 건물 입구에 쓰인 표지판을 보고서야 이것이 임페리얼 컬리지의 건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정도였다. 학생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예상대로 출입증이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고, 오늘이 마침 휴일이라서 그런지 학교 내의 카페도 문을 닫았다. 생각보다 구경 거리가 많지는 않았어서, 발걸음을 돌려 검색해 둔 카페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스타벅스를 하나 지나쳐 Guillam Coffee House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카페의 대표 메뉴 중 하나이지만, 유럽에서는 아이스 커피를 팔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이곳의 메뉴판에는 아이스 커피가 있었지만, 얼음 제빙기가 고장나서 모든 ice drink는 판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겨울이지만 날씨가 별로 춥지 않고, 평소에 한국에서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편이라서, 찾아두었던 다른 카페를 가보기로 했다. 골목길을 돌면 바로 나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구글 맵에는 영업을 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오늘이 휴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다. 주변에 마땅한 커피 숍이 더 없었고, 스타벅스를 가기에는 뭔가 아까웠다. 결국 다시 Guillam Coffee House를 갔다.


메뉴에 핸드드립 커피가 있어서 그걸 먹어보기로 했다. 가격은 한화로 약 6~7천원. 한국에서 핸드드립 커피도 웬만하면 6~7천원 이상은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 생각하면 나름 괜찮은 물가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점원이 핸드드립 커피는 시간이 조금 걸리니 다 되면 자리로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자리에는 노트북 사용 시 최대 2시간만 머물러달라는 글이 쓰여진 조그마한 안내판이 놓여 있었다. 나도 평소에 주말이면 카페에 노트북을 들고 가서 할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최근 뉴스나 미디어 컨텐츠에서는 이렇게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줄여 일명 '카공족'이라고 부른다. 댓글을 보면 여론은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일부 사람들이 커피 하나만 시켜 놓고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거나, 카페에 대화하러 온 사람들에게까지 예민하게 구는 사례들이 제시되며,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제기하거나 아니면 아예 과장하여 이를 개그로 승화시키는 컨텐츠가 나오기도 한다. 아마 영국에서도 '카공족'에 대한 비슷한 담론이 오가는 것일까. 이곳에서 안내판으로 '최대 2시간'의 느슨한 규칙을 둔 것은 꽤 적절해 보였다. 내 옆 자리에도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헤드폰을 쓴 채 노트북을 켜고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다른 자리에도 그런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런던의 카페들은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면, 이곳은 주문한 메뉴도 핸드드립 커피에, 분위기도 조용하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책을 좀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따.


"여기, 주문한 핸드드립 커피가 나왔어요."

"감사해요. 혹시 어떻게 마시면 되나요?"

"...ㅎㅎ 컵에 따라 드시면 되죠, 하하하"


한국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시켰을 때는 다른 커피 메뉴처럼 커피 잔에 담아서 주었는데, 여기는 커피를 내린 주전자와 컵을 따로 주었다. 그래서 뭔가 마시는 방법이 특별히 있나 했는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알아서 컵에 따라서 마시면 되는 것이었다. 답변을 듣고 보니 조금은 당연한 질문을 한 것 같기도 했다. 주전자와 컵이 있는데 어떻게 마시냐니. 당연히 컵에 따라서 마시지. 종업원은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고 돌아갔다.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핸드드립 커피를 조금씩 컵에 따라 마시며 책을 펼쳤다.


유럽 여행을 출발하기 이틀 전, 서점에 들러서 여행에 가서 읽을 책을 구입하려고 했다. 평소에는 일, 공부, 다른 취미 생활에 우선 순위가 밀려 독서를 별로 안 하는데, 여행을 갈 때면 독서가 항상 생각나서 책을 한 권 챙겨서 간다. 이동 시간이나 중간에 애매하게 비는 시간에 책을 꺼내 읽거나, 아니면 아예 지금처럼 카페에 와서 독서를 하는 것을 여행 일정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주로 21세기 한국현대소설을 즐겨 읽는데, 그 중에서도 장강명 작가의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도서 검색대에 그의 이름을 입력하자, <재수사>라는 장편소설이 1년 전에 출간되었다고 나왔다.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이 당장 <재수사>가 꽂혀 있는 곳으로 가서, 1, 2권을 모두 들고 계산대로 갔다. 총 2권으로 되어 있고, 한 권당 약 400 페이지가 되는 장편소설이었다. 장강명 작가의 책을 여럿 읽어보았지만, 장편소설은 거의 읽어본 것이 없어서 이번 기회에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았다. 비행기를 타서부터 바로 읽기 시작했었는데, 영국에서 1권을 다 읽고, 다음 여행지인 핀란드로 넘어가서 2권을 읽는다면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 두 권을 모두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그래야겠다는 약간의 의무감까지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독서가 나의 우선 순위에서 또 다시 뒤로 밀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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