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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여행기 Day 7 (1)

by SH

* 유럽 여행기 시리즈는 매주 금요일 저녁 8시에 연재 예정입니다.


마지막 숙소

패딩턴 호텔에서의 4박이 끝났다. 마지막 날은 원래 영국 유학 중인 친구 T의 집에서 자려고 숙소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친구의 일정이 바뀌는 탓에 숙소를 잡아야 했다. 패딩턴 역 근처의 2성급 호텔을 예약했고, 이전에 묵었던 호텔에서는 도보 5분 거리였다. 아침에 일찍 준비를 마치고 10시 쯤 호텔에서 나와 새로운 숙소로 이동했다. 직원은 예약자 명단이 적힌 종이를 건네며, 이 안에 내 이름이 있는지를 물었다. 내 이름은 한국어로 되어 있었고, 나는 내 이름이 적힌 곳을 가리켰다. 나는 우선 짐을 맡긴 뒤 저녁 때 숙소 체크인을 하겠다고 했고, 그녀는 데스크는 늦은 밤까지 응대를 하니 편할 대로 하라고 했다. 아직 객실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위치, 외관, 데스크에서 보이는 모습까지 2성급 치고는 괜찮은 숙소 같다고 느껴졌다.


오늘은 N, H 2명의 동행과 함께 하는 날이다. N은 20대 중후반의 여성으로, 런던과 멀지 않은 근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유학생이었다. 런던을 여행 겸 방문하는데, 한국인 동행들과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H는 아직 나이는 모르는 남성이었는데, 프로필 사진으로 봤을 때는 나와 나이 차이가 많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티타임을 갖는 것, 평소에 잘 먹을 수 없는 세계 음식을 파는 식당을 가는 일정을 제안했고, N은 들어본 적이 있다며 괜찮은 tea room을 추천했다. 세계 음식 메뉴로는 인도, 그리스, 터키, 지중해 음식 등이 후보로 나왔고, 그리스나 터키 음식을 파는 식당을 가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오전에 대영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동행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고, 대영 박물관은 무료 입장이었지만 인원 관리를 위해서인지 사전에 예약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는 오전 11시 30분으로 예약을 했고, 그 즈음에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영 박물관

조금 일찍 근처에 도착했고, 스타벅스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영국에 와서 스타벅스를 한 번은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고, 그러기에 딱 적절한 시점이었다. 달달한 아이스 시켜놓고, 장강명의 <재수사>를 꺼내서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N은 숙소 관련해 주인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며, 직접 얘기하느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대영 박물관은 일단 나와 H 둘이서 먼저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해왔다. 나는 문득 며칠 전에 겪었던 동행 잠수를 떠올렸으나, N은 숙소 문제를 해결하는 대로 바로 합류할 것이라고 연락을 보내와서 잠수를 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만약 잠수를 탄다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스타벅스에 있다고 말해두었고, H는 약속 시간 15분 전 쯤 나타났다. H의 프로필 사진은 조명이 어두워서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남성이라는 정도만 유추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만난 그는 체구가 크다는 게 특징이었고, 말을 걸어오는 첫 인상이 부드러웠다. 학교에서 교양 수업을 들었을 때 만난 한 선배와 몹시 이미지가 겹쳐보였는데, 그도 체구가 크고, 부드러운 인상에 낮은 목소리를 가졌으며,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만한 장난과 유머를 치는 것을 즐겨 했다. 초반에 너무 친한 척을 하거나 오버 텐션을 보이지도 않으면서, 기본적인 매너와 함께 가벼운 유머 스킬까지 보유해서, 내게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S.H죠? 유랑 동행입니다.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책을 보고 계시는 군요?"

"평소에는 잘 안 보는데, 여행 와서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해요."


H는 여기서 잠깐 있다가 시간 맞춰 박물관에 들어가자고 했다.


"영국 와서 다른 일정들은 잘 즐기셨어요?"

"네. 저는 뮤지컬 봤고, 아스널 펍에 가서 축구를 봤어요. 어제는 웨스트햄 경기장 직관을 다녀왔어요."

"경기장은 혼자 다녀오셨어요?"

"그게, 원래 동행을 구했거든요. 한국에서부터 연락을 해서 저녁을 같이 먹고 가기로 했는데, 런던에 와서부터 카톡을 읽고 씹더라구요. 그래서 혼자 봤어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죠? 아주 매너가 없는 사람이네요."


가벼운 화제로 동행 잠수를 꺼냈는데, 그는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나의 말에 공감해주었다.


"H도 그런 사람을 겪은 적이 있나요?"

"그동안 해외 여행 경험이 조금 있고 동행도 많이 구해봐서 잠수 타는 사람도 가끔 봤죠. 아주 매너가 없는 행동이에요. 그리고 이건 제 사견이지만, 대체로 사회 생활을 못 해본 어린 친구들이 그러는 것 같아요. 미안하다는 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용기조차 없는 거죠, 뭐."

"네, 마침 잠수를 탄 그 친구도 좀 어리기는 했어요."

"그쵸? 사실 회사나 인턴 생활 조금만 해보면 그 정도 센스는 갖추게 되잖아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어색함을 풀려고 먼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도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H는 먼저 말을 자연스레 걸어주며 내 이야기도 잘 끌어내주어서 내가 대화를 이끌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첫 인상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도 유랑 카페에는 괜찮은 동행들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오늘 N도 어찌 보면 약간은 그런 경우잖아요? 하하하."


N을 탓할 의도보다는 가벼운 농담인 듯 싶었다.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연락이 계속 잘 되니, 그거야 문제 없죠."

"네, 오후에는 볼 수 있을 것 같던데요. 일단 시간이 되었으니 박물관으로 가시죠."


간단히 가방 검사를 한 뒤 박물관에 들어갔다. 내부 혼잡 관리 때문에 사전 예약을 받는 줄 알았는데, 정작 짐 검사 말고 티켓 검사는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고대 이집트 코너부터 돌기 시작했다.


"S.H는 평소에 박물관을 좋아하세요? 저는 전혀 문외한이라서요."

"하하, 저도 그래요. 평소에 박물관이라면 흥미가 없는데, 영국에 와서 미술관을 가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구요. 작품이나 유물 자체를 보는 것보다도 그 설명을 쭉 따라 읽어보는 게 은근히 재미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걸음의 속도가 너무 차이 나지 않게 조절하며, 각자의 관심대로 유물들을 둘러보았다. 나는 고대 이집트의 왕, 주변 세력과의 패권 다툼 등에 대한 설명을 주로 읽어나갔다. 이어서 로마, 그리스 등의 코너를 거친 뒤, 어차피 다 둘러보기에는 매우 많으니 나는 3층에 있는 동아시아 코너를 둘러볼 것을 제안했다.


"H는 학생인가요?"

"저는 회사를 다니다가, 6개월 전에 그만뒀어요. 그리고 유럽 여행을 길게 왔죠. 지금이 거의 5개월 째인데, 1월 말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요."

"5개월이나 여행을 했으면 여러 나라를 봤겠네요.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사실 그걸 아직 못 정했어요. 일단 내일 영국을 뜨기로 했는데, 갈 곳을 오늘 정해서 비행기까지 예매해야 해요. 원래는 아이슬란드를 동행들과 가기로 했는데, 저도 동행이 취소되었어요."

"아, 저와 비슷한 잠수를 겪은 건가요?"

"네, 비슷하죠. 4명이서 가기로 했는데, 1명은 잠수를 탔어요. 그리고 아이슬란드는 차량 렌트를 하는 게 거의 일반적인 거 아시죠? 그런데 나머지 2명이 모두 운전을 아예 못한대요.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려고 했는데, 카톡을 하다보니 거의 저를 운전 기사처럼 여기더라구요. 여행이 좀 불편해질 것 같아 저는 안 가기로 했어요."

"그러게요, 운전자를 그렇게 취급하면 조금 불편하죠. 그럼 후보지가 있나요?"

"일단 독일도 좋고, 북유럽도 좋은데. 오후 중에는 정해서 비행기를 예매해야 할 것 같아요."


유럽 여행을 오래 하다보니 여유가 생긴 것일까. 나는 자유 여행을 좋아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행기 및 숙소 일정은 미리 확정을 한 상태에서, 여행지에서의 자유를 좋아하는 것이다. H의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여행인 걸까. 그는 얼른 비행기 예약을 해야 한다며 고민이 된다는 얘기를 했지만, 패닉이 되거나 초조해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까지를 여행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라면 한국에서부터 아이슬란드 동행 건을 확실히 처리했을 것이다. 아닌 것 같았으면 진작에 그들과는 동행을 취소하고 다른 일정을 잡았을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H의 여행 얘기를 듣는 것은 나름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다. 즉흥적인 면이 분명 많은데, 그럼에도 자신만의 주관이나 상황 대처 능력이 받쳐주고 있어서 그만의 여행을 잘 꾸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동아시아 코너에서 중국, 일본, 한국 순으로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옥스포드에서 방문했던 박물관의 동아시아 관에는 중국, 일본 코너 밖에 없었는데, 여기에는 한국 전시 코너도 있었다. 한국 전시 코너에는 한국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동전, 도자기, 밥그릇, 수저 등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영국에 와서 한국 유물과 문화를 봐서 반갑다는 느낌 외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차라리 한국에 있는 박물관에 가서 보면 한국사에 관해 좀 더 떠올리며 관람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곳은 특별히 스토리나 주제에 따라 묶어놓은 것도 아니고 '한국'이라는 테마 안에 이것저것 가져다 놓은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인 입장에서는 한국이 아시아 나라 하나에 불과할 테니까. 동아시아 코너를 보자고 한 것도 그나마 익숙한 것들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라도 들 것 같아서였는데, 역시 그 이상의 뭔가는 없었다. 영국 여행을 와서 전시는 옥스포드의 박물관, 테이트 모던 미술관, 이곳 대영 박물관, 이렇게 세 곳을 방문했는데, 내게는 테이트 모던이 생각보다 흥미로웠고, 나머지 박물관들은 그냥 그랬다. 여행에서의 경험이야 저마다의 의미가 있으므로 당연히 방문을 후회하지는 않는데, 미술관이야 그렇다 쳐도 박물관은 앞으로 해외 여행에서 나에게는 후순위로 밀릴 것 같다.


'저 이제 합류할 수 있어요. 시간 상 저는 tea room에 먼저 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혹시 웨이팅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N이 연락을 보내왔다. 관람한 지 2시간 정도 지났고, H도 이제 출발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tea room에 도착한다. 버스는 소호 거리를 빠져나와 tea room이 있는 동네로 향했다. 소호 거리의 인파 때문에 그다지 맘에 드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행들과의 일정을 보내다 보니 소호 근처로 계속 오게 되었다. 내일이면 영국 여행도 마지막이니, 소호 거리도 이제 마지막이겠구나 싶었다.


"S.H는 핀란드에 가신다고 했죠?"

"네, 내일이면 핀란드로 떠나요. 산타 마을로 유명한 로바니에미나 최북단에 위치한 사리셀카는 가지 않고, 남쪽에 있는 헬싱키와 탐페레, 이렇게 두 도시를 가요. 지구오락실이라는 예능에 비춰졌던 모습과 읽던 소설에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결심한 거여서 아직 계획이 많지는 않아요. 동행도 못 구했구요."

"저는 한 달 전 쯤에 로바니에미를 다녀왔거든요. 전반적으로 좋았어요. 네 명이서 숙소 동행까지 했는데, 다들 좋은 사람이었어요. 한국에 가서도 볼 것 같지는 않지만요."

"안 맞는 부분이 있었나요?"

"그런 건 아닌데, 좋은 동행이더라도 꼭 한국에 돌아가서 계속 이어질 인연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로바니에미 동행들은 여행에서부터 약간의 선이 있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숙소까지 같이 쓰니 아예 여행을 함께 하는 것을 기대했는데, 그들은 숙소를 공유하는 동행일 뿐 여행 일정은 저마다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좀 더 선호하더라구요. 물론 좋은 사람들이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친해졌는데, 그럼에도 한국에 돌아가서도 볼 것 같지는 않네요."


나는 H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는 한편, 나와 그는 한국에서 돌아가서도 볼 사이일지, 그렇지 않을지를 잠시 생각했다. 지금까지 H의 첫 인상은 매우 좋았지만, 여행 외의 다른 삶의 단면에서 그의 모습을 알거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으므로, 아직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마 N이 영국 유학생이 아니라 한국에 살았다면, 한국에 돌아가서 셋이서 한 번은 봤을 수도 있을까? 물론 이걸 그들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무슨 소개팅 예능도 아니고 좀 이상하고, 오늘 하루가 끝나면 어느 정도 답이 자연스레 내려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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