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여행기 시리즈는 매주 금요일 저녁 8시에 연재 예정입니다.
인천국제공항
12월 28일 오전 10시 55분에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8시 반에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다. 국제선을 타고 캐리어도 맡겨야 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서둘렀는데, 보안 검사까지 마치니 아직 1시간 반이나 남아버렸다. 커피를 한 잔 뽑아놓고, 사람 별로 없고 콘센트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핸드폰을 충전해두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탑승 게이트 근처의 카페 C.W에서 5300 원을 주고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한 잔 take out 했는데, 한때 공항이나 여행지 위주로 많이 보였던 카페 D.K와 유사한 느낌이었다. 포인트 적립이 되는 걸 보니 S사의 계열사인 모양이고, 맛이나 분위기, 가격적인 이점 모두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커피를 사게 되는 위치에 묘하게 자리는 잘 잡아서 관광객들 상대로 주로 매출을 올리는 전략을 펴는 카페이지 싶었다.
출발 1시간 전. 다행히 아직까지 긴장이 되지는 않았고 몸 컨디션도 괜찮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하와이로 가족 여행을 갔는데, 일본 공항을 경유해서 5시간 정도 대기한 뒤 하와이로 가는 비행 일정이었다. 경유에 지친 나는 일본 공항에서 떠나기 직전 결국 구역질을 했고, 이어지는 하와이행 비행기에서 새우가 포함된 기내식을 먹은 여동생도 구역질을 했다. 그 뒤로 나는 경유를 하는 비행에, 동생은 새우에 대해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10년이나 넘게 지난 일이고, 동생은 이제 새우 요리를 즐겨 먹는다. 나도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비행 울렁증을 극복할 때가 되었으리라.
비행
처음에 런던행 항공권을 끊었을 때는 비행 예정 시간이 12시간 30분이었는데, 한 달쯤 지나서 출발 시간만 2시간 앞당겨져 비행 예정 시간이 14시간 30분으로 늘어났다. 찾아보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항로가 바뀐 탓인데, 영국에서 유학 중인 친구 T는 진작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평소에도 종종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사를 검색해보며 전쟁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었는데, 이번 계기로 전쟁이 끝났으면 하는 개인적인 이유도 내게는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이륙 직후에 제공되는 기내식을 먹은 뒤, 나는 태블릿에 다운로드 받아 온 '레 미제라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 영화를 미리 다운로드 받아 온 이유는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날 극장에 가서 보기로 한 '레 미제라블' 뮤지컬에 대한 일종의 '예습'이었다. 영어 듣기에 자신이 없으니, 우선 비행기 내에서 영화를 보며 스토리와 인물을 숙지하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놓친 줄거리가 있는지를 다시 파악하기 위해 나무위키에 들어가서 '레 미제라블'의 줄거리를 정독하겠다는 게 나의 '예습' 계획이었다.
런던 여행을 다녀온 친구 J.D가 뮤지컬 보는 것을 추천해줘서 어떤 걸 보는 게 좋을지 생각해보다가, 고등학교 음악 수업 시간에 틀어줬던 '레 미제라블'이 떠올랐다. 스토리가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었고, 대표적인 넘버 중 하나인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친구들이 수업이 끝나고도 따라불렀던 기억이 났다. 하도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부르는 걸 듣기도 하고, 또 듣다 보면 뭔가 뮤지컬스럽고 웅장한 느낌이 드는 게 마음에 들어서 , '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a song of angry men? ~'로 시작하는 후렴구는 거의 가사를 외우게 되었다. 또 다른 대표적인 넘버 <One day more>은 무한도전에서 무한상사 컨셉으로 직접 개사해 부른 <내일로>라는 한국어 버전의 유튜브 영상으로 여러 번 봤다. 대표적인 넘버를 좋아하다 보니 뮤지컬로 봐도 재밌겠다는 생각까지는 했는데, 정작 인물이나 스토리 라인은 잘 모르다 보니 극장에서 충분히 분위기와 노래를 즐기기 위해 일종의 예습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약 3시간 정도 레 미제라블을 시청하면서 시간을 보낸 뒤 이어진 비행 시간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목 베개를 챙겨왔는데도 의자에 앉아서 잠에 드는 것은 어려웠다. 군 복무 시절, 조는 것을 뭐라 안 하는 당직 사관들과 같이 당직 서는 것을 선호해 중대원들이 '같이 당직 서면 좋은 당직 사관 리스트'를 만들어 두었는데, 나는 대놓고 자도 뭐라고 안 하는 '꿀 당직 사관'이 걸려도 중간중간 졸지 못하고 꼬박 밤을 지새우곤 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은 내 또래의 여성 분은 아예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이륙을 다 하기도 전에 이미 잠에 들어 최소 8시간 이상은 계속 자는 것 같았다. 아이스 음료를 들고 별로 마시지도 않은 채로 바로 자길래 자다가 저걸 쏟는 건 아닐지 불안했는데, 아이스 음료조차 위치의 변동 없이 8시간 이상을 비행기에서 한 자세로 잘 자는 것이 내게는 거의 놀라울 지경이었다.
"착륙 전 기내식 올려드리겠습니다. 음식은 한식 생선 요리하고, 한식 닭갈비 볶음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걸로 올려드릴까요?"
식사를 '올려드린다'는 높임 표현을 쓰며 승무원이 물었다.
"저는 식사는 괜찮고, 콜라 한 잔만 주실 수 있을까요?"
중간에 간식으로 준 샌드위치까지 잘 먹었는데, 기내에서는 움직임이 없어 소화가 느린 건지 배가 불렀다. 목이 말라서 콜라 한 잔을 받고, 한 번에 들이킨 뒤 한 잔만 더 달라고 했다.
"캔으로 하나 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승무원은 종이컵에 콜라 한 잔을 더 주고, 아예 콜라 한 캔을 더 가져다 주었다. 갈증도 해결했고 비행 시간도 거의 다 되어 가니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다 싶었다. 도착지인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의 착륙 신호 대기 등 사소한 지연이 이어진 뒤, 마침내 약 15시간 30분의 장시간 비행 끝에 도착하게 되었다. 비행 중에는 다시는 장시간 비행을 안 하겠다느니, 전쟁을 일으켜 항로를 막아버린 러시아를 원망한다느니 하는 갖가지 괜한 생각들을 하며 힘들어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새로운 곳에서의 설렘이 커져서인지 다시 컨디션이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
먼저 첫날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동행 Y에게 카톡을 남겼다.
'저 비행기가 조금 지연되어서 이제야 내렸어요. 숙소에 짐 풀고 나오면 늦은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저는 시내에 나와 있는데, 저도 그 쯤 맞춰서 식당으로 갈게요.'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의 입국 절차는 매우 간편했다. 한국, 캐나다, 일본 등 8~9개국의 국민들은 별도의 심사 없이 여권만 스캔하면 입국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맡겼던 캐리어까지 찾은 뒤, 마침내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잤으니 거의 20시간 넘게 깨어 있는 상태였는데, 새로운 곳이 주는 설렘과 신선함의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나는 피로함을 잊고 숙소를 향한 길을 서둘렀다.
런던 히드로 공항 4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지하철인 Piccadilly line을 타고 Earl's court 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Y는 캐리어를 든 상태에서 버스 타기는 힘들테니 적당히 가까이 와서는 U 택시를 불러서 숙소까지 가라고, 본인도 그렇게 했노라고 말했다. Piccadilly line을 타고 약 30분 정도 이동하며 지상과 지하를 번갈아 오르내렸다. 겉모습부터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지하철이었는데, 지하철 내부의 불빛이 자꾸만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깜빡임으로 무슨 의미를 전달하나 싶어서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관찰해봤는데, 아무리 봐도 규칙성 없이 깜빡이는 걸로 보였고, 그냥 고장난 걸 방치해두는 것 같았다. 지하철이 지하를 지날 때는 데이터가 아예 터지지를 않았다. 한국에서는 지하철에서 데이터가 안 터지는 곳이 없고, 공공 와이파이도 되는 곳이 매우 많고, 낡은 2호선도 최근에 새로운 열차로 많이 교체되는 걸 보면, 한국 지하철 시스템은 정말 잘 유지되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Earl's court 역에서 내려 버스나 택시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여러 매체에서 유럽의 소매치기에 대해 많이 들어 왔던 터라, 나는 주변을 괜히 잔뜩 경계하며 두 손으로는 핸드폰을 힘을 주어 움켜쥐며 교통편 검색을 마저 했다. 한국에서 U 택시 어플을 깔고 카드 등록까지 해두었는데, 차량을 호출하니 invalid한 결제 수단이라고 나왔다. 여기서 검색을 마음놓고 할 수도 없겠고, 마침 건너편에 바로 버스 정류장이 보이기도 해서 C3 버스를 타고 숙소까지 가기로 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2층 버스를 타서 생각해보니, 내가 등록해둔 카드는 이전에 쓰던 체크카드였다. 버스를 타고 약 15분 이동한 뒤 정류장에 내렸다. 처음 유럽에 온 나도 구글 맵으로 경로만 검색하면 어려움 없이 지하철, 버스를 타는 걸 보면 영국도 대중교통 시스템이 매우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은 비록 조금 낡았지만 말이다.
숙소를 예약한 곳은 원즈워스 라는 동네인데, 런던 시내와는 대중교통을 타고 30분은 조금 넘게 가야 하는 위치이다. 에어비앤비 공유 숙박을 통해 저렴하게 묵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이 참에 공유 숙박 경험도 해보고, 런던 시내보다는 현지 마을 느낌도 강하게 날 거라고 생각해서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약 10분 정도를 걸어야 했는데, 마을에 진입하기 전 한국의 로터리 교차로 형태의 도로와 지하도를 통과해야 했어서, 영국 첫 숙소 치고는 찾는 데에 난이도가 있는 편이었다. 나는 마을이 보이자 캐리어를 드르륵 거리며 끌고 달리듯이 걸어갔다. 마을에 대한 반가움보다는 사람이 별로 없고 휑한 도로 한복판을 얼른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숙소의 호스트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영국의 노부부였고, 내가 쓸 3층의 방과 2층의 게스트 전용 욕실을 안내해 주었다. 다른 공유 숙소와 달리 이곳의 장점 중 하나는 게스트 전용 욕실을 제공해준다는 것이었다. 노부부의 부인은 숙소 출입문 잠금과 몇 가지 추가적인 안내 사항을 내게 전달해주었다.
"밤에 숙소에 들어온다면 숙소 문을 잠가주어야 해요. 이것 보세요. 안쪽에서 열쇠를 왼쪽으로 돌리면 문이 잠기죠? 반대로 나갈 때는 안쪽에서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문을 열고 나가면 돼요. 이 위쪽의 열쇠 구멍은 건들지 말아요. 아래쪽 열쇠 구멍만 써야 해요. 열쇠를 당신에게 하나 줄게요."
영국식 악센트가 강하지는 않은 영어였고, 친절함이 묻어나지만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할 때는 강하고 단정적인 어조였다. 숙소의 첫 인상은 매우 좋았고, 노부부도 좋아보였다. 다만 열쇠로 출입문 여는 방법이 들으면서 헷갈려서 재차 물어봤는데, 디지털 도어락이 달린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로서는 가끔 열쇠로 여닫는 숙소를 만나면 항상 버벅거리곤 했다.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행, 저녁 식사
유랑 카페에 뮤지컬 같이 볼 동행을 구한다는 글과 함께 오픈 카톡 링크를 올렸는데, Y가 오픈 카톡을 보내와서 동행을 하게 되었다. 혹시 모를 사기나 잠수를 방지하기 위해, 동행 생각이 있으면 실제 카톡 프로필을 교환한 뒤 대화하자고 했고, 그녀는 바로 수락했다. 그녀는 20대 후반의 미국 유학생이었고, 영어 이름을 카톡 프로필로 설정해 놓아서 그녀의 한국 이름도 물었다. 여행 약 한 달 전에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붙어있는 자리를 각자 예매했고, 그 날 오전에는 옥스포드를 같이 다녀오기로 해 옥스포드행 기차 왕복권도 미리 예매했다. 영국에 도착하는 날이 같아, 첫 날 저녁도 함께 먹기로 했고, 그 이후 일정의 동행 여부는 가서 생각해보자고 했다. 카톡을 주고받고 예매하는 과정이 매우 매끄러워서 괜찮은 동행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여행 스타일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 정도까지만 동행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 런던에서 가보고 싶은 곳 리스트를 보내오면서 앞으로 영국을 또 오기 힘들 것이니 자신은 여기를 최대한 다 가보겠노라고, 만약 가보고 싶은 곳이 겹치면 Day 3 이후에 부분적으로 자기 일정에 join 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관광 명소를 이곳저곳 둘러보기 보다는 거리나 공원을 걷고 카페에서 책도 읽으며 다소 느긋하고 널널한 일정을 보내는 것을 선호하므로, 하루 종일 그녀와 같이 다니기에는 성향이 맞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그녀가 보내온 리스트 중 몇 곳은 나도 관심이 있었기에 알겠다고, 좋다고 했다.
Y는 약 10분 전에 식당에 먼저 들어와 앉아 있었다. 카톡만 주고 받은 뒤 처음 대면하여 만나는 자리였으므로, 만나서 반갑다며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누고 메뉴를 정했다. 이곳은 런던 시내와는 약간 떨어진 마을 근처에 있어 현지인들이 주로 많이 올 법한 펍이었다. 오리고기 롤, 양념 닭 튀김 등 small dish 3개와 피시 앤 칩스를 main 요리로 시켰다. 그녀는 시내에서 혼자 맥주 한 잔을 하고 왔다며 음료를 마시지 않겠다고 했고, 나만 논알콜 음료를 하나 주문했다.
"첫 날인데 많이 피곤하지는 않으셨나요? 시내를 다녀오셨다구요."
"아 네, 오전에 도착해서 숙소에서 조금 자고 시내를 구경하고 왔어요."
카톡으로 성격을 짐작하는 건 제한적이긴 하지만, 추측해보았을 때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외향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인상은 다소 내향적인 것 같았다. 나는 시내에 가서 뭘 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물어보았고, 그녀는 박물관을 갔고, 혼자서 맥주를 한 잔 마셨으며, 런던 아이를 멀리서 보고 왔다고 말했다. 런던에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 같고, 한국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혼자 다니기에도 괜찮은 여행지인 것 같다고 했다.
"아 참, 우리 옥스포드 같이 가기로 한 동행 M이 연락이 왔는데, 런던에 와서 일정이 바뀌었다고 함께 못 간다고 하네요."
M은 Y가 구한 또 다른 동행이었는데, 옥스포드를 함께 가기로 하고 기차를 끊어두었다. 나는 직접 연락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Y의 말로는 M은 여행에서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고, Y가 일정을 제안하면 자기는 다 좋다며 따라다니겠다고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 면에서 M과 계속 같이 다니는 것은 약간은 피곤할 것 같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아마 하루 앞두고는 예매해둔 기차표 환불이 안 되지 않을까요? M은 왜 하루 앞두고 일정을 바꾼 걸까요?"
나야 연락을 안 해봤으니 동행이 취소되어도 그만이긴 했는데, 그래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예매까지 해둔 일정을 바꾼 이유가 뭘지도 궁금하고, Y와 대화가 약간은 어색해지려던 참에 공통 대화 주제가 생긴 것 같기도 해 물어보았다.
"M이 예약해둔 숙소를 직접 가보니 너무 심각해서 그걸 다시 알아봐야 해서 일정을 바꾸려나봐요. 확인해보니 예약금은 제가 미리 받아두었네요."
Y가 왕복 기차표 3인을 한 번에 예매했는데, 나는 이후에도 같이 다닐 계획이었으니 현지에 가서 적당히 나눠 내기로 했고, M은 미리 돈을 보냈었다. 다행히 동행 취소로 인해 돈이 얽히지는 않았고, M이 자신의 기차 예약금 손해를 감수하면 될 문제였다. 역시 동행과 일정을 계획할 때 돈 문제는 미리 확실히 해결해두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Y에게 만나서 적당히 나눠 내기로 한 걸 생각해 보면 이건 스스로의 말에 대한 조금의 모순이기는 했다.
"M은 그래도 같이 다니고 싶기는 한 모양이에요. 계속 카톡을 보내오는데, 숙소 상황으로 당황하고 힘들어보이는 티가 많이 나네요. 잠깐 위로 카톡을 좀 보내둘게요."
"숙소가 못 묵을 정도로 상황이 많이 안 좋았나보네요. 런던 숙소가 전반적으로 물가도 비싸던데요."
Small dish들이 나왔고, 이어서 main 요리인 피시 앤 칩스도 나왔다. 영국에서 유학하는 친구가 영국의 현지 음식은 맛이 없다며, 피시 앤 칩스는 고등학교 급식에 나오는 임연수 구이랑 비슷하다나 뭐라나. 유학을 시작한 뒤 한국에서 그를 만나면 감자 요리는 한국에서 쳐다보기도 싫다며, 국밥 같은 전통적인 한식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Small dish는 괜찮나요?"
"치킨 양념이 너무 매운데요."
나는 처음에 양념이 덜 묻은 부위를 먹어서 맵다고 안 느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한 입 더 먹으니 양념이 꽤 자극적이었다.
"아 네, 양념이 조금 자극적이네요..."
"저는 치킨은 못 먹겠어요. S.H도 치킨 먹을 때 양념은 조금 덜어내고 드세요."
피시 앤 칩스를 이어서 먹었는데,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그저 그런 무난한 맛이었다. 생선 튀김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무난한 맛이었고, 감자 튀김 역시 그러했다. 한국 돈으로 약 2만원 조금 안 되는데, 무난한 저녁 식사로는 나쁘지 않았고, 반대로 영국 특유의 뭔가를 기대했다면 그런 건 별로 없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영국 음식에 대한 기대 수준이 낮아져 있어서 그런지, 나는 그런 대로 맛있게 먹었다. 영국에 가면 피시 앤 칩스는 꼭 여러 번 먹어보겠다던 그녀는 몇 입 먹은 뒤 더 이상 먹지 않았고, 배가 부르다고 했다.
"이 식당을 10점 만점으로 평가한다면, 몇 점 정도 주고 싶으세요?"
그녀가 물었다.
"음... 8점 정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피시 앤 칩스가 뭐 아주 맛있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런 대로 무난했고, 어쨌든 영국에서의 첫 식사이니 거기에 의미를 좀 둘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이 돈 주고 이걸 안 먹겠지만, 나는 여행 와서 먹는 음식에는 웬만하면 후한 평가를 내리는 편이다. '그래도 여행 와서 먹는 건데'라며 음식이나 식당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주기도 하고, 여행비의 많은 부분을 식비로 계획해두는 편이라서 가격 대비 만족도를 깐깐하게 계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서로 평소에는 뭘 하던 사람인지, 원래 어디에 사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대화를 조금 더 나누었다. 나는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이 평소에 어떤 공부나 일을 하는지 등 소위 '본캐'에 대해 어느 정도 대화를 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내게는 여기서 상대에 대한 첫 인상이나 더 친해지고 싶은 상대인지 여부가 많이 결정된다. 본캐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려 하고 얕은 대화 위주로 화제를 자주 전환하는 사람들이나, 반대로 자세히 묻지 않은 전문적인 부분까지 먼저 너무 많이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단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전자의 경우, 상대가 나와 친해지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는 걸로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이고, 후자는 일단은 다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모르는 분야에 대해 묻고 상대에게 그 분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기본적으로 좋아해서 대화 템포를 맞춰가며 디테일로 조금씩 들어가는 대화야 환영이지만, 여기서 후자는 간단한 질문에도 혼자 앞서나가는 답변을 마구 쏟아내는 사람의 얘기이다. 그런 면에서 Y는 첫 인상이 괜찮아보였다. 익명 카페에서 좋은 동행을 구한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고, 앞으로의 일정에서도 같이 잘 다닐 수 있기를, 또 여행에서 앞으로 만나게 될 다른 동행도 괜찮은 사람들이 많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