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숙박의 장점 중 하나는 조식을 제공해준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1층 부엌에 가보니, 식탁 위에 시리얼이 든 큰 통, 우유, 과일이 있었다. 나는 그릇에 시리얼을 몇 스푼 담고, 우유를 부었다. 과일은 복숭아와 블랙베리가 있었다. 블랙베리는 처음 먹어봤는데 먹어본 과일과 비교하자면 산딸기랑 그나마 비슷했고, 아주 맛있었다. 식사를 거의 마칠 때 쯤, 어제 저녁 안내 사항을 전달해준 노부부의 부인이 커피를 마시러 내려왔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니?"
"옥스포드를 갔다가, 저녁 때는 뮤지컬을 보러 가요."
"무슨 뮤지컬?"
"레 미제라블."
"뭐라고?"
"레... 미... 저라불...?"
"음... 내가 모르는 뮤지컬 같은데. 처음 듣는 이름이야."
그녀가 레 미제라블을 모를 확률보다 내 발음이 영국인이 듣기에 안 좋을 확률이 훨씬 높다고 직감했다. 한국에서도 레 미제라블은 다들 최소한 한 번은 들어보기는 했을텐데, 영국에서 모를 리가 없을 것이었다.
"Miserable...?"
몇 번 천천히 말했더니 그제서야 그녀가 영국식 악센트로 '레 미제라블!!' 하며 웃었다. 일반적인 대화는 한국식 발음으로 어찌어찌 통했는데, 고유 명사는 전달이 더 어렵나보다.
기차
Y와 나는 런던 패딩턴 역에서 GWR (Great Western Railway)이라는 기차를 타고 옥스포드로 가기로 했다. 시간은 약 1시간 반 쯤 걸리고, 왕복 가격이 약 5만원 좀 안 된다. 숙소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East Putney Station으로 갔다. 우리나라 지하철 역 입출구에는 대부분 직육면체 모양의 팻말에 호선별 고유색을 배경으로 하여 호선명과 역 이름, 출구 번호가 적혀있고, 역으로 통하는 문은 지상 또는 지하 방향의 계단의 형태로 획일화가 되어 있다. 영국은 지하철 역마다 입구 모양이 각양각색인 듯 했는데, East Putney Station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는 낡은 놀이공원 또는 놀이기구의 입장 문과 같은 느낌이 났다. 패딩턴으로 향하는 District line 지하철을 탔고, 어제 탔던 Piccadilly line보다는 덜 낡은 느낌이었다.
패딩턴 역은 지하철도 여러 노선이 지나고, 기찻길도 많아서 역이 꽤 컸다. 탑승 시간이 될 때까지 패딩턴 역을 구경하기로 했다.
"S.H는 여행비는 어떻게 마련했어요?"
"저는 부모님이 여행비로 쓰라고 이번에는 용돈을 평소보다 많이 주셨고, 그 외에는 학기 중에 학교 조교 활동 등을 하며 조금씩 번 것을 보태서 가요. Y는 직접 번 돈으로 여행 오신 거에요?"
"네. 학기 중에 과외도 많이 하고, 라이프 가드도 하고, 학교 내에서 돈 벌 수 있는 것 이것저것 했어요."
라이프 가드. 최근 수영을 한창 열심히 하는 나에게는 반가운 단어였다.
"라이프 가드 자격증을 받으셨으면 수영을 잘 하시나봐요. 그거 따려면 4개 영법을 제한 시간 안에 완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 4가지 영법을 다 할 줄은 아는데, 미국에서는 아마 한국보다 자격증을 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에요. 영법도 자유형, 평영만 자격 시험에 들어가고요. 다만 최근에는 라이프 가드 말고 자유 수영을 직접 많이 하지는 못하고 있네요."
반가운 마음에 나는 최근에 나도 수영에 재미를 붙여 동아리도 뒤늦게 들었다는 얘기, 한국에서는 라이프 가드 자격증은 곧 수영 잘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그래서 수영 동아리의 주장단은 모두 학교 수영장의 라이프 가드로 일하고 있더라는 얘기 등을 덧붙였다. 이어서 다른 좋아하는 스포츠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Y는 스키도 좋아하는데 지금 살고 있는 주는 미국 남부 지방에 위치해 있어 날씨 상 즐기지 못한다고, 예전에 다른 지역에 살았을 때는 좀 타러 다녔다고 했다.
사람들과 얘기를 하며 대화가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말을 많이 했다가 들어주기를 많이 했다가 하는 흐름이 유기적으로 반복되면 일반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한 번은 오랜 친구 J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는 자신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자신은 그것에 대해 '둘이 서로 가지고 있는 에너지 준위가 비슷하다'고 표현한다고 했다. 한 쪽이 에너지가 많이 높다면, 대화를 할 때 에너지가 높은 사람이 계속 말을 하다보니 에너지가 낮은 사람은 소위 '기가 빨린다'는 느낌을 갖고, 에너지가 높은 사람 입장에서는 대화의 텐션이 떨어진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공학을 전공하지만, 전형적인 이과식 유머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편인데, 이 말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주 유치한 유머도 아니어서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박힌 말이 되었다. J와 나는 서로 친구 관계가 오래 유지되고 여러 대화 주제를 가지고도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서로의 '에너지 준위'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그런 관점에서 Y도 나와 '에너지 준위'가 크게 다르지는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옥스포드
옥스포드에 도착하자마자 애쉬몰리언 박물관을 방문했다. 영국이 과거에 세계 여러 나라를 침략하면서 각종 문화 유산들을 빼앗아 왔을 것이고, 그런 문화 유산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리라. 애쉬몰리언 박물관도 제법 크기가 컸는데, 이런 박물관이 한두개도 아닌 걸 보면 빼앗아 온 문화 유산의 양이 상상 이상인 듯했다. 아시아 섹션도 방문했는데, 일본과 중국의 문화 유산만 있었다. 한국의 문화 유산은 덜 빼앗아 온 걸로 봐서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아니면 일본, 중국에 비해 인지도가 밀린 걸로 보고 아쉬워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Y가 자신은 미국에서도 종종 박물관을 다닌다며 말을 건네왔다.
"미국 애들하고 얘기해보면 일본이 엄청 문화 강국인 줄 알아요. 한국보다요.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건축이라든가 종교 이런 것들, 일본이 우리 나라 백제 문화를 많이 배워간 것도 있잖아요? 제 생각에는 일본 문화 발전에는 한국이 큰 영향을 준 거라고 보는데, 그래서 미국 애들한테 그렇게 얘기해줘요."
한국사를 좋아하는 나지만, 대학에 온 뒤로는 나의 주 관심사인 한국 근현대사에만 주로 관심을 가져왔다보니, 문득 백제 같은 삼국 시대 얘기를 들어본 것조차 매우 오랜만이었다. Y는 미국에서 유학한 지 오래 되었는데, 그럼에도 한국사에 대해서도 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 점이 반갑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히 한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주제로 굳이 대화를 하지는 않는데, 외국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의 나라에 대해 얘기를 할 때 가볍게 역사 얘기도 올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S.H는 배가 고파요?"
"네. 아침 먹은 지도 좀 지나고 해서, 저는 배가 고프네요. Y는 어때요?"
"혹시 Five Guys라는 햄버거 집 가볼 생각 있어요? 미국에서는 ShakeShack, InNOut과 더불어 3대 버거로 꼽히는 브랜드에요. 저는 배가 아직은 안 고파서 먹지는 않을 건데, 간다면 메뉴 추천을 해줄 수 있어요. 저는 미국에서 이 브랜드 버거를 가장 좋아하거든요. 한 번 먹어보는 것도 좋을 거에요."
"네, 좋네요. 그럼 저는 거기서 점심을 먹을게요. 주문을 같이 한 다음에 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먼저 다녀오세요. 이따가 옥스포드 역에서 시간 맞춰서 다시 만나죠."
"네, 그래요."
미국 L.A에 다녀온 친구 J.J가 인앤아웃 버거를 먹었다고, 그게 거기서 제일 유명한 버거 브랜드라고 말해줬을 때 인앤아웃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었는데, 이제 비로소 미국의 3대 버거 브랜드에 뭐가 있는지 다 알게 되었다. 나는 Y의 추천을 받아 치즈 버거에 grilled onion 등 몇 개의 토핑을 추가하고, 감자 튀김과 음료수까지 시켰다. 주문이 끝나고 그녀는 다른 박물관을 또 둘러보겠다며 식당을 먼저 나갔다.
버거 크기는 특별히 크지 않았는데, 감자 튀김은 small 사이즈를 시켰는데도 한국 버거 가게의 large 사이즈 이상으로 양이 많았다. 배가 고팠는데도 혼자서는 절대 다 못 먹을 양이었다. 버거의 맛은 그리 특별한 지 잘 모르겠고, 배가 고프기도 하고 버거 자체가 오랜만이어서 맛있다는 정도였다. 사실 나는 버거의 맛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용어 구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수제버거'라고 부르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맥도날드 (또는 패스트푸드) 부류 간의 맛의 차이는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다. 내 기준으로 ShakeShack, Five Guys 등이 전자에 해당하고, 맥도날드, 버거킹, 롯데리아 등이 후자에 해당한다. 각 부류 내에서는 맛을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내 친구들은 대부분 버거킹의 버거를 롯데리아의 그것보다 훨씬 선호하며, 롯데리아의 버거를 맛 없다고 말하는데, 나에게 브랜드 이름을 감춘 채로 두 버거를 준다면 높은 확률로 구분하지 못할 것 같다. 비슷하게 Y는 내게 Five Guys의 버거가 나머지 3대 버거들과 다르게 '보다 고기의 진한 맛이 잘 느껴지고, ...' 의 특징이 있어 이 브랜드를 더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것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버거를 먹을 때 Y가 옆에 있었다면 '음 맛있네요~' 하면서 적당히 답변을 넘겼을 테지.
차이나 타운
오후 4시가 좀 넘어서 옥스포드에서 런던 패딩턴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GWR 기차는 미리 비싼 돈 내고 티켓을 예매하는 것에 비해 자리를 정할 수가 없다는 게 약간 이상해보였다. 옥스포드 갈 때는 운이 좋게 빈 자리를 잘 잡아서 탔는데, 돌아가는 열차는 조금 늦게 탔는지 자리가 대부분 차 있었다. 이대로면 1시간 반 넘도록 서서 가야 했는데, Y가 옆 칸에 빈 자리가 좀 있다고 앉아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옆 칸은 Prestige class, 일등석이었다. 옥스포드로 갈 때 티켓 검사를 하지 않았고, 만약 티켓을 검사하면 예매한 티켓을 보여주고 Prestige Class에 탄 지 몰랐다, 혹은 미안하다 정도로 대응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맨 끝에 위치한 1인석에, Y는 테이블을 둘러싼 4인석 중 한 자리에 타고 패딩턴으로 마저 이동했다. 다행히 도착할 때까지 내가 탄 칸으로 탑승객이나 역무원이 오지는 않았다. 혼자였으면 아마 Prestige class의 빈 자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계속 서서 갔을 것이다.
'레 미제라블'을 상영하는 뮤지컬 극장은 런던에서 몹시 번화한 소호 거리에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차이나 타운이 있었다. 우리는 저녁을 차이나 타운에서 먹기로 했다. 차이나 타운에 들어서자마자 붉은 색의 원기둥 모양 연등들이 주황빛 불빛을 내며 머리 위 쪽으로 빼곡히 매달려 있었고, 드라마 <수리남> 등 매체에서 봤던 차이나 타운과 거의 똑같은 느낌을 주었다. Y는 거리가 예쁘다며 하늘 방향으로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연신 찍었다. 나는 아직도 유럽의 소매치기에 대해서 경계하느라, 혹여 Y가 손을 하늘 방향으로 치켜세우고 사진을 찍느라 손에 힘이 풀렸을 때 누군가 핸드폰을 낚아채지는 않을까 하며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그런 사람은 없어 보였고, 다들 번화한 거리에서의 연말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차이나 타운은 별 게 있는 게 아니라 중식 메뉴를 파는 식당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는 거리이다. 거리의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내놓은 메뉴판의 모양과 내용은 식당들끼리 대부분 비슷했고, 줄의 길이에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식당들마다 앞에 대기열이 늘어서 있었다. Y와 나는 그나마 줄이 짧아 보이는 식당 앞에 줄을 섰고, 10분 정도 지나서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2인 세트를 시켰는데, 전반적인 평은 어제 먹었던 피시 앤 칩스 집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무난한 중식 맛. 가성비가 있지는 않고, 그래도 영국 와서 중식 종류를 이것저것 먹고, 오랜만에 먹는 거라 나름 맛있게 먹었다 정도. 다들 이 정도로 줄을 서서 먹다니,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이나 타운의 식당마다 줄이 늘어선 것은 음식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차이나 타운의 분위기를 구경하고 번화한 거리를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인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나는 번화한 거리를 걷는 것을 그다지 유쾌하게 느끼지 않고, 소호 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라리 영국에서 중식으로 한 끼를 먹는다는 것에 그나마 의미를 둘 수 있겠다.
뮤지컬
뮤지컬은 저녁 7시 반 시작이었고, 우리는 약 15분 전에 극장에 들어서 예매한 자리에 앉았다. 뮤지컬을 보러 오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이 나와 동생을 데리고 서울의 한 극장을 찾아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서커스가 소재 중 하나로 쓰이는 뮤지컬이었는데,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흥미로울 주제의 뮤지컬을 선정한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나는 뮤지컬 1부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인터미션 때 부모님을 졸라 더는 못 보겠다고, 극장을 나가면 안 되냐고 했다. 부모님은 내 말을 들어주었고, 그 뒤로 뮤지컬은 지루한 것이라는 인상으로 내 기억 한 켠에 박혀 있었다.
뮤지컬은 영화에서처럼 죄수들이 감옥에서 부르는 'Look down'으로 시작했다. 극장은 2층 구조였는데, 우리는 가격이 저렴한 축 (한화 약 12만원)에 속하는 1층 계단 한가운데 자리였다. 아마 2층이 더 가격이 비쌌을 텐데, 무대가 2층까지 걸쳐있는 구조라서 더 시야가 넓게 펼쳐졌을 수 있다. 내 앞 사람이 키가 좀 큰 편이라 가끔씩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무대를 봐야 한다는 점 빼고는 1층 자리라서 시야가 제한되는 건 거의 없었다. 뮤지컬은 영화의 줄거리와 대체로 일치하며 전개되었고, 전날 나무위키 1회독까지 마친 나의 예습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영어에다가 노래로 진행되다 보니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지만, 무대 배경과 몸짓을 보며 나의 예습 내용과 하나씩 대응시키면 전개를 파악하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한 가지 문제는 영화에는 없었던 웃음 포인트가 뮤지컬에서는 조금 추가되었다는 것인데, 영어 노래에 더해 영국 유머 코드까지 이해해야 하는 거라 유머 포인트에서 따라 웃는 것까지는 불가능했다. 미국에 오래 살았던 Y에게 물어보니, Y는 영어는 다 알아 들었지만 그녀도 영국식 유머 코드에는 대개 따라 웃지는 못했다고 했다.
영어를 많이 알아듣지 못했어도, 현장에서 직접 배우들이 number를 부르는 걸 듣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뮤지컬 티켓 값어치가 충분히 되었다. 원래 좋아했던 <Do you hear the people sing?>과 <One day more> 외에 다른 number들도 직접 들으니 훨씬 생동감이 넘쳤고, 배우들의 발성은 극장 전체를 울렸다. 뮤지컬 관람 문화 중 하나는 number와 함께 극의 한 chapter가 끝나면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성과 박수를 친다는 것인데, 내게는 이것이 뮤지컬 현장 관람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로 느껴졌다. 특히 장발장이 자기 대신에 죄인으로 오해받고 있는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자백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부르는 <Who am I?>는 극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대목인데, number와 함께 chapter가 마무리되며 장발장이 자신의 죄수 번호인 'Two Four Six Oh One~'을 크고 길게 외치는 소리와 관객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겹쳐질 때는 소름이 쫙 돋을 정도였다. Epilogue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과 이어지는 커튼 콜 역시 감명을 크게 받았던 포인트였다. 커튼 콜에서는 단역, 조연급, 주연급 (자베르, 장발장) 순으로 인사를 하고, 포즈를 바꿔가며 인사를 몇 차례 더 하고 관객들은 일어선 채로 끊임없이 박수를 쳤다. 내 옆 자리의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뮤지컬을 보며 느낀 점 중 하나는 배우와 관객이 직접 소통하는 것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이었다. 사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스토리만 따져보면, 소설에 비해 개연성이 한참 떨어지고 인물 묘사도 한참 부족하다. 예를 들어, 자베르의 직업적 면모를 보자면 사실상 한평생 장발장 한 명만을 잡기 위해 올인하여 형사 생활을 하는 단편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장발장이 혼자 고민하다가 갑자기 법정에 뛰어들어가 죄수 번호만을 외치는 장면도 노래를 떼어놓고 보면 다소 전개가 뜬금없으며, 마리우스를 포함한 청년들이 혁명을 하는 것도 사전 설명이나 연결 고리가 부족하다. 'Who am I?'의 유튜브 영상 베스트 댓글도 이를 잘 표현하는데, '이 장면은 원래 책으로는 4개의 chapter인데, 뮤지컬에서는 단 3분 짜리 노래 하나'라는 댓글이다. 또한, 테나르디에 부부가 손님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장면이 'Master of the house'라는 넘버와 함께 연출되는데, 자신이 사기를 어떻게 치는지를 노래로 부르며 일일이 알려주며 대놓고 사기를 치는데도 손님들은 다들 속아 넘어간다. 심지어 나중에는 사기를 당하는 손님들이 함께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이처럼 개연성과 논리성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대신 극적인 장면들에 배우와 무대 장치, 노래 등 모든 요소가 오롯이 온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것이 뮤지컬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저절로 일어나서 박수를 치게 되고, 전율을 느낄 수 있으며, 배우들의 발성으로 생동감 있게 불리는 number들은 보다 풍부한 느낌을 준다. 뮤지컬을 보는 약 3시간 동안 나는 이와 같은 현장감과 몰입감에 매료되었다.
또 하나는 개인적인 선호도는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계기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 뮤지컬을 보다가 인터미션 때 극장을 빠져나온 뒤, 나는 뮤지컬을 안 좋아한다고 자연스레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런던 여행을 다녀온 친구 J.D의 '런던 가면 뮤지컬 한 번 보는 것도 좋을 걸' 이라는 한 마디에 뮤지컬을 알아보고 예매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정작 그 친구는 런던에 가서 뮤지컬을 보지 않았고, 그냥 분위기를 보고 한 얘기였다. 부모님을 졸라 극장을 뛰쳐나온 뒤 1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뮤지컬은 이곳 영국에서 나에게 다시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왔다. 물론 여행 감성을 감안해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같은 감정일지는 미지수이나, 한국에서의 뮤지컬도 언젠가 한 번은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뮤지컬이 마친 뒤, Y가 뮤지컬 내용에 대해 내게 물어왔다.
"S.H는 자베르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자베르가 자살한 것에 대해서요."
"전개 상 약간은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극적인 효과를 주려고 그런 전개가 나온 것 아닐까요?"
"음 그럼 전개 말고, 그 행동의 당위성은 어떻게 생각해요?"
"자베르가 자살한 이유는 일단 장발장이 자신을 풀어준 걸 보고, 자신이 형사로서 한평생 지켜왔던 신념이 무너지는 걸 봐서 그런 것 같은데. 한평생 갖춰온 신념이면 흔들림이 크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자살은 좀 과한 전개인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요."
사실 영화만 봤을 때는 자베르가 왜 자살한 건지 잘 와닿지가 않아서, 이 부분은 나무위키의 해석을 그대로 옮겨 말한 것에 가까웠다. Y에게는 이 장면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었던 모양이다.
"저는 자베르의 자살은 무책임한 거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아니면 신념이 무너진 게 두려워서 자살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회피가 아닐까요."
그 이후에도 Y는 그렇다면 식물인간의 산소 호흡기를 떼는 것은 살인이라고 볼 수 있을지, 만약 식물인간이 본인의 의사 표시는 가능한 상태에서 산소 호흡기를 떼겠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로 볼 수 있을지 등에 대해 물어왔다.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의 질문이었고, 나는 별다른 이유를 갖추지 못한 단답식의 답변만을 연거푸 뱉어낼 뿐이었다. Y의 생각도 되물어 보았는데, 그녀도 거기에 대해 명확한 답을 가졌던 것은 아니고 그냥 나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은 것이라고 했다. 뮤지컬을 보면서 나는 number들의 웅장함과 풍부함, 그리고 커튼 콜 때 배우들의 인사가 가장 인상적이었고, 반면 스토리는 다소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낮은 평가를 주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 볼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레 미제라블'이 오래도록 명작으로 칭송받는 것은 음악만이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