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동
할머니는 가끔 명자네 집으로 내려와서 엄마와 소곤거리고는 눈물을 훌쩍였다.
아랫목에서 자던 명자, 명희가 뒤척이며
"할머니~ 엄마~"
어두운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소곤거리는 것이 꿈인지 생신지 몰라 소리를 더듬었다.
졸음에 겨워 떠지지 않는 눈을 애써 가늘게 떠보려하지만 불 꺼진 방 안에 희미한 윤곽만 보일 뿐이다.
"자, 자, 아가, 얼른 자"
토닥토닥 달래보지만, 잠이 깬 아이들이 몸을 일으키며
"엄마~아"를 찾는다.
"애들 잠 다 깨겠네. 가야겠다"
문지방을 넘는 치맛자락이 달빛에 비쳤다.
인왕산 중턱 작은 봉분 속에 있는 경준이를 보러 가던 영순이모는 또 방을 비웠다. 화장대 위에는 먼지만 남았고 이모의 물건들도 모두 사라졌다.
할머니, 엄마는 이모가 시집 갔다고 했다.
이모가 시집 간 이후로 집차도 할머니 댁에 오지 않았다. 종이 상자에 들어있던 드랍스와 소세지, 초콜릿, 사탕이 먹고싶어서 집차는 언제오냐고도 물었다.
할머니 댁을 찾는 손님들은 가까운 친척이기도 먼 친척이기도 했고, 사돈의 친척도 있었고 친척처럼 이웃들이었다.
명자네 집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면 엄마는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대부분 할머니 댁에 올라갔고 아이들도 독립문 앞을 맴돌며 놀면서 할머니 댁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늘상 드나드는 손님이 많지만 잔칫날은 평소와 달랐다.
할머니는 생신에 주변에사는 친척, 이웃을 모두 점심에 초대해서 푸짐하게 상을 차렸다. 안방, 대청, 건넌방까지 분합문을 모조리 떼어내고 상을 차려두면 무릎이 닿을 정도로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물에 물린 북어포를 간장, 마늘, 고춧가루, 설탕을 넣고 조린 북어조림에 잡채, 연근조림, 우엉조림, 소불고기, 나박김치가 빠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제 환갑이 지나서 미역국 대신 무국을 끓였다.
아침상을 치우자마자 대문 닫힐 틈없이 하얀 고무신이 댓돌을 가득 채웠다.
"이이는 밥이 왜 아직 그대로야?"
"그러게 밥이랑 국이 그대로네. 밥을 왜 안 먹어?"
쩝쩝대면서 젓가락으로 불고기를 집어 올리던 아주머니의 밥과 국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아유~ 그야, 밥하고 국은 어차피 내 건데, 다른 음식 다 먹고 먹으면 되잖아요"
"오호호~~그렇네. 맞는 말이네"
"어휴 욕심도 많아"
"크크크 그러게 나도 밥은 나중에 먹어야 겠다"
"성님은 북어찜을 어쩜 이렇게 잘 해요? 난 이 집 북어찜이 제일 맛있더라"
"불고기도 맛있어"
"많이 들어. 연탄불에 구우니 더 맛있나 보네 부족하지 않게 또 구울 테니 실컷 들어요"
"호호호"
작은방에는 아이들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
정균, 명자, 명희도 북어찜, 불고기, 연근조림, 우엉조림, 김, 시금치나물이 한 상 가득 차려진 상을 받았다.
마당으로 난 문이 살짝 열렸다.
"먹고 있니?"
"네~"
"뭐 더 줄까?"
"아니요. 누나. 우리 다 먹었어요"
"그래, 잘 들 먹었네. 물장수 밥상인 줄 알겠다. 그릇이 다 비었네. 아이고 이제 손님들 가시려나 보다."
정균, 명자, 명희는 둘도 없는 단짝이다.
명자와는 두살 터울이고, 명희와는 네살 터울이니 조카들이라고 하지만 동생들이나 마찬가지다. 어려서 교통사고를 당해 뛰는 게 조금 불편한 정균은 남자아이들과 뛰어노는 것보다 조카들과 앉아서 소꼽놀이, 공기놀이하는 걸 더 좋아한다.
얼굴도 곱상하고 말소리도 조용조용하지만, 골목에서 누가 조카들을 놀리려고 하면, 대뜸
"마할것들~"하면서 우뢰같은 목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할머니, 이모들이
"명자는 참 착해, 착한 우리 명자"라고 하고
명희보고는
"저 안차지고 닳아질 것, 깍쟁이 같은 것"하듯이
조그마한 명희도 동네 아이들과 싸움이 붙을 때는 앙칼지게 대들어대니 셋이 뭉치면 이길 사람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 먹고 방에서 뒹굴뒹굴 노는 것도 재밌어서 데굴 데굴 몸을 굴리며 깔깔대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문을 벌컥 열고 마당을 내다봤다.
"아휴, 내 고무신이 어디갔어? 잔치에 오려고 새로 신고 왔는데"
"무슨 일이래. 누가 착각했나 보네"
"아니, 나랑 문수 같은 사람이 누구예요? 자기 고무신도 모르고 신고 가나? 아휴 참."
"내가 물어볼게. 일단 집에 가 있어. 응?"
새 고무신을 잃어버렸다고 역정이 난 성필이 할머니는 할머니가 내어 준 고무신을 신고 아무렇게나 신고 나갔다.
할머니와 엄마의 표정을 보고 아이들은 급하게 신발을 신었다.
"사람 버릇 못 고친다더니. 에휴. 창피해서. 그 양반은 왜 그런다니?"
"잔칫날마다 꼭 이런다니까"
"우리가 다녀올게요"
"어딘지 알고?"
"알아요. 춘잿말 아주머니잖아요"
"가자~"
아이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특명을 수행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대로를 건너 무악동 언덕으로 치달렸다. 나무문을 빼꼼 열고 보니 댓돌에 새 고무신이 여지없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명자, 명희가 문 사이를 들여다보는 틈에 정균이 살금살금 들어가 댓돌에 놓인 고무신을 들고 나왔다. 방문이 벌컥 열릴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새 고무신을 들고 교남동으로 향하는 길. 누가 빠른지 시합이라도 하듯 셋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렸다. 좀 전처럼 빼꼼 대문을 열고 정균이 댓돌에 새 고무신을 올려 놓고 살금살금 나왔다.
할머니 생신날이면 늘상 있는 일이었다. 남의 것을 신고 가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다. 신발 문수가 맞든 맞지 않든 상관없이 새고무신이라면 뒷축을 구겨 신고서라도 신고 가는 못된 버릇이 쉬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깝게 사촌, 멀어도 8촌 아니면 사돈간에 얼굴을 붉힐수는 없으니 고무신이 임자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눈감아 주는 것이었다.
새 고무신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오는 길에 여기까지 왔는데 놀다 들어가자며 정균이 사직동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그래~ 가자"
"내가 노래불러 줄게"
명희가 단발 머리를 한들한들 흔들며 고갯짓, 손짓을 더해 노래를 불렀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뱅그르르 돌기까지 하는 모습에 키득키득 웃다보니 가파른 길을 쉬이 오를 수 있었다.
사직동 고갯마루에는 왕고모할머니댁이 있다. 왼쪽으로 길게 늘어선 담장을 오른쪽으로 돌아올라가면 왕고모할머니 댁이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은 담장을 돌아가지 않았다.
왼쪽으로 담장이 길게 이어지고 그 끄트머리쯤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서양인 집이 있었다. 담의 오른쪽으로 철제 대문이 마주하고 있어 이쪽 대문으로 들어가서 맞으편 대문으로 나가면 바로 왕고모 할머니 집이 보였다. 철대문은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고 어린 아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땅에서 얼만큼 올라와 있었다.
명희가 먼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몸을 비비적 거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명자, 정균도 뒤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드넓은 들판에 나무 한 그루 심어져 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이 펼쳐진 너른 들판의 왼편 끝으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보이고 그 뒷쪽으로 붉은 벽돌집이 보였다. 서양사람들이 사는 서양식 집으로 2층에 건물로 들어가는 계단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먼저 들어간 명희가 그 풍경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컹 컹
붉은 벽돌집에서 검고 큰 사냥개가 달려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금발의 남자아이가 황급히 따라나왔다.
"엄마아"
"으악~ 뛰어! 뛰어"
들판을 가로질러 맞은편 철문으로 향했다.
비명과 빠져나가려고 사지를 바쁘게 움직이는 사투가 이어졌다.
대문 밑으로 킁 킁 대며 냄새를 맡는 개의 코가 보였다. 주둥이를 대문 밖으로 밀어내보지만 몸집이 커서 빠져나올수는 없는것 같았다.
쿵덕쿵덕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허옇게 질린 얼굴을 서로 쳐다보았다.
"간 떨어질 뻔 했다"
"하하하"
"헤헤헤"
"너무 재밌다~ 그치!"
"응, 무서운데 너무 재밌었어"
"아까 걔 봤어?"
"응"
"어디서 놀다 오는 거야? 땅강아지들도 아니고! 뭣들하고 다니는 거야?"
땀과 흙먼지에 범벅이 된 꼴이 기가막혀 엄마는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 놓았다.
엄마가 왕고모 할머니 댁으로 심부름을 보낼 때마다 명자, 명희는 철문 밑으로 들어가 들판을 가로 질렀다.
어느 날부터 사냥개가 쫓아오지 않았다. 금발의 남자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영순이모가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쌍꺼풀이 진하고, 얼굴이 하얀 아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