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를 해?”
“아이고, 조용히 좀 말해요”
“참, 나. 별”
“그냥 알고만 있어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어른들은 아시고?”
“엄마만 알지. 아버지한테 얘기해야 하는데”
“허”
“어딜 가요?”
“마당에 나가요”
“깜짝이야. 행여 아버지한테 아무 얘기도 하지 마요”
영숙은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 얘기를 꺼냈다. 친정아버지와 허물없이 지내는 남편이기에 나중에 일이 났을 때 그나마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만 한숨 쉬고 들어가요. 내일 일찍 나간다면서”
“허 참. 농협에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요?”
“뭘 잘못했는지 쫓겨났다고 하더라구요”
“사람을 골라도 왜? 꼭.”
“누굴 탓해요. 다 지 할 일이지. 그만 속 끓이고 자요. 우리가 이럴 것도 아니야”
“당신 행여 거기 발걸음도 하지 마요”
“알았어요”
경희궁에서 태평로로 이어지는 길가에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밖으로 창을 내지 않고 쌓은 붉은 벽돌은 담인지 벽인지 알 수 없었고, 해가 질 무렵이면 죽창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보초를 서며 건물 주변을 에워쌌다.
발이 작은 중국인 아주머니네처럼 한국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요새처럼 단단하게 지은 붉은 벽돌 건물 안에 무리를 지어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쟁 이후 정착한 중국인들의 붉은 벽돌 건물은 그들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했다.
궁궐이라고는 하지만 경희궁은 문만 덩그러니 있고 잡초가 자라는 공터라 아이들은 넓은 놀이터로 생각했다. 공터 안쪽으로 우물이 있고 산기슭 아래 너른 바위로 산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푹푹 찌는 날씨에도 바위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한기 때문에 닭살이 돋았다.
공터 뒤쪽의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 옷이 몽창 젖을 때까지 끼얹으며 놀다가 바위 그늘까지 달려가서는 가만히 앉아서 새소리 물 흐르는 소리를 듣다 오는 것이 놀이였다.
경희궁에서 저만치 보이는 중국인 건물은 마치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아무리 극성스럽게 누비고 다니는 화성옥 삼인방이라고 해도 그 앞을 지날 때는 흘끗 쳐다보기만 할 뿐 건물로 들어서는 입구를 호기심으로 들여다보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조선기와집과 달리 붉은 벽돌로 반듯하게 쌓아 올린 건물은 거대한 벽 안에 여러 가구가 모여 있는 듯했고 그 입구도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벽과 벽 사이의 좁고 깊은 골목만 보였다.
“삼촌 우리집에 가자. 엄마가 간식 해 놓는다고 했어”
“누나 우리집에 있던데? 아까 가방 놓고 나올 때 봤어”
“그래? 그럼 할머니네 가자”
“고개까지 누가 더 빨리 가나 다~”
“좋아~ 내가 먼저 갈 거야”
“조랑말 잡아라”
“삼촌~ 우리 할머니한테 짜장면 달라고 하자”
“넌 질리지도 않냐?”
“난 우동!”
맛있는 것을 눈치보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파른 사직동 고개를 단숨에 넘어 집에 도착했다.
“너희들 어디 갔다 오니? 꼬라지들이 왜 그 모냥이야?”
“헤헤”
“어서 씻고 밥 먹어”
“우리 짜장면 먹고 싶은데~”
“난 우동!”
“그래, 그래 알았으니, 얼른 얼굴이랑 손 씻어. 땅강아지들도 아니고”
“밥 먹고 할머니 심부름 좀 다녀와”
“어딜?”
“저기”
마루 위에서 신발을 신고 댓돌에 내려왔지만 워낙 자그마해서 올라서나 내려서나 키가 그대로인 할머니가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또 심부름이야?”
“너가 갖다 와”
“왜? 맨날 나만 심부름 가?”
“너가 제일 빠르잖아”
가게 문으로 들어갔던 할머니가 쟁반 가득 음식을 들고 나왔다.
“와~ 이건 뭐야? 군만두도 있네”
“이제 군만두도 하는 거야?”
“그래, 어서 먹고 심부름 다녀와”
“어디로요”
“저기. 뜨듯할 때 얼른 먹어”
바삭바삭한 군만두를 아그작 배어 무니 입천장이 다 까질 만큼 뜨거운 육즙이 흘러나왔다.
“앗 뜨거”
큰 아이들 먹는 것을 챙기려고 나온 엄마 옆으로 안방에서 장난감을 갖고 꼬물거리고 놀던 명애, 윤무가 따라 나왔다. 맛있는 냄새를 맡았는지 상 옆에 단정히 앉아 저희들도 하나씩 달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함부로 손을 뻗어 음식을 집지도 않고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모습이 예쁘다며 명자가 군만두를 하나씩 손에 쥐어 줬다.
엄마가 밥상을 치우는 동안 할머니는 부엌에서 신문지를 둘둘 만 둥치 하나를 갖고 나왔다.
“이거 저기 이모 갖다 주고 와”
“누구?”
“경환이 이모. 경희궁 아래 중국인 마을 있지? 거기 들어가면 이층에 댄스홀이 있어”
“댄스홀?”
“이게 뭔데요?”
“애들은 몰라도 돼”
“뭔데? 좀 이상한 거 같애. 난 안갈래”
“빨리 갖다 주고 와아~ 올 때 생과자도 좀 사오고”
“뭔데요? 응?”
“뜸부기야. 어제 원당에서 갖고 왔어. 이것만 갖다주고 바로 나와. 알았지”
“뜸부기를 어떻게 들어? 못 들고 가겠어요”
“자, 여기 담아줄게”
할머니는 신문지로 둘둘 감은 뜸부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려줬다.
붉은 벽돌로 요새처럼 쌓은 건물을 할머니는 중국인 마을이라고 불렀다. 심부름은 명희 혼자 가는 날이 많았지만, 이번 만큼은 셋이 함께 가기로 했다.
사직동 고개까지 가는데 신문지에 둘둘 말리고 보자기에 싸인 뜸부기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만 같아 보자기 매듭을 당겨 보퉁이를 길게 늘어뜨렸다.
“번갈아 가면서 들고 가기다”
붉은 벽돌로 세운 벽과 벽 사이로 들어서니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이 사라져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붉은 벽돌은 햇볕을 완전히 막아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 들어선 것 같았다. 한여름 모든 것을 선명하게 비추던 빛이 갑자기 사라진 공간에서 아이들은 잠시 멈춰섰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이 캄캄해졌던 시야가 어느새 익숙해져서 벽돌의 거칠거칠한 표면과 볼록하게 튀어나온 줄눈이 보였다.
“이층이라고 했는데”
벽으로만 세워진 공간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기 위해 아이들은 더듬 더듬 걸음을 내딛었다. 들어선 길만큼 앞으로 나가니 건물 중간 쯤에 좁은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 어딘가에서 요란한 음악소리가 흘러내려왔다.
댄스홀은 계단을 오르자마자 보이는 첫번째 문 안에 있었다. 두꺼운 문이 닫혀 있음에도 음악소리와 웃음소리가 문 밖까지 들렸다.
빼꼼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확 여는 바람에 아이들은 줄줄이 넘어질 뻔했다.
“너희들 왔구나. 어서 들어와”
영순 이모였다.
보름달 같이 뽀얀 얼굴에 분을 발라 화사한 꽃 같았다. 뽀글거리는 짧은 머리를 하고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다.
집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젊고 화려하고 예뻤다.
아이들 눈에 밖에서 만난 영화배우처럼 화려한 이모는 낯선 사람이었다.
영순은 얼른 정균 손에 들린 보따리를 손에 쥐고 아이들을 댄스홀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얼른 들어와. 뭐 시원한 거라도 마시고 가. 밖에 많이 덥지?”
반짝거리는 마룻바닥 위를 남자 여자가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광을 낸 바닥이 미끄러워 아이들은 걷기는 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아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미끄러운 바닥 위를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어른들이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춤을 추지 않는 사람들은 한 쪽 벽에 서서 뿌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아니야. 엄마가 이것만 주고 바로 오라고 했어”
정균이 소리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말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모양이 꼭 항의하는 것만 같아, 명자 명희는 삼촌의 옆얼굴을 보며 왠지 든든해져 슬금슬금 삼촌 등 뒤로 늘어섰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가라~ 갈 때 맛있는 거 사서 가고”
영순 이모가 지폐 몇 장을 접어 정균 손에 올려놓았다. 손 끝에 반짝이는 빨간 매니큐어가 가지런하게 발라져 있었다.
두꺼운 문을 온 몸으로 잡아당겨 열었다. 내달리듯 계단을 달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햇볕이 내리쬐는 큰 길에 나와 붉은 벽돌담을 돌아보았다.
가쁜 숨을 고르며 벽과 벽사이로 난 어둡고 좁을 길을 바라봤다. 갑자기 셋만의 비밀이 한 가지 더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지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 하하, 하하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큭큭, 하하”
“아이고 배꼽이야. 하하”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이다”
“그래. 하하하”
정균은 할머니가 준 돈 대신 영순이모가 준 돈으로 생과자를 샀다.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예쁜 손가락으로 접어 준 돈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들고 있었다.
“이거 다 쓰고 가자”
생과자를 사고 남은 돈으로 시장에 가서 찹쌀 도너츠도 샀다. 몇 개 남은 동전으로는 딱지랑 머리핀을 사서 독립문으로 향했다.
“우리 강아지들 다녀왔니?”
할머니는 심부름 간 아이들을 기다렸는지 문일 열리자마자 마루에서 뛰어내려왔다. 손에 잔뜩 들린 주전부리를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잔소리도 하지 않고 얼른 방에 들어가서 먹으라며 큰 접시를 가져와 담아주었다.
“그래. 누나가 있었어?”
“응”
“매부는?”
“몰라”
“그래, 사람은 많디?”
“….”
“얼른 먹어. 오미자 마실래?”
“네”
“자, 엄마가 좋아하는 밤. 할머니가 좋아하는 김 붙은 거, 내가 좋아하는 생강 설탕, 언니가 좋아하는 땅콩 들은 거. 골고루 샀다.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