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사람들

포마드를 바른 남자

by 은의 정원

"앞으로~ 전진!

하낫 둘 셋 넷

하낫 둘 셋 넷


좀 더 씩씩하게 걷는닷"


"네! 분대장님"


까르르 까르르 여학생들의 웃음 소리가

무악재 고개를 넘어오는 좁은 길에서 터져나오는 소리가 증폭되어 대로로 쏟아지는 바람에 독립문까지 확성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소리가 울렸다.


"저 마할것들. 쯧쯧"

할아버지가 못마땅한듯 혀를 찼다.


"오늘도 잔뜩 끌고 들어오려나 보네"


서울여상에 다니는 막내딸 풍자는 분대장이다.

군대처럼 분대, 소대로 학생 조직을 나누고 이를 이끄는 대장을 한 명씩 세워둔 것이다.

전쟁 후 무악재를 넘어오는 미군 간식은 모조리 쓸어오던 왈가닥 풍자는 기어코 분대장을 맡았다. 성격이 활달하고 나서는 것을 좋아해서 언제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공부도 곧잘해서 졸업하기도 전에 상업은행에 취직되었다. 취업도 정해졌으니 마음 놓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다.

언제나 친구들과 요란스럽게 내려와서는 묻지도 않고 화성옥에서 이것저것 잔뜩 주문한다.

문 앞에서 계산을 받고 있는 큰오빠가 아무리 험악한 표정을 지어도 거리낌없이 자리를 잡았다.

졸업을 남겨 두고 풍자는 상업은행으로 출근을 했다. 오목조목한 얼굴에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양장을 입고 출근하는 모습이 왈가닥에서 숙녀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퇴근할 때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극성스러운 10대 소녀가 되어 버렸다.


반짝이는 구두에 뽀마드를 발라 머리를 멋지게 넘긴 멋쟁이가 할머니댁에 온 것은 이쯤이었다.

늦둥이 정균이도 중학교 입시를 잘 치뤄서 좋은 학교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는 이제 걱정이 없다며 경환이만 불쌍하다 안됐다고 밤낮 한숨이었다.


"경환이만 손준가?"

"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할머니는 왜 경환이 편만 들어?"

"니들이야 편들어줄 사람이 지천에 널렸는데 경환이는 아니잖니!"

"흥, 그런게 어딨어? 우리 집도 엄마, 아부지는 맨날 언니편만 드는데"


같이 놀다가도 해코지를 하는 경환이가 미워 명희가 원망을 늘어놓아 보지만 돌아오는 말은

"불쌍한 것 좀 잘 챙기면 좀 좋아"


할머니고 엄마한테 더 대거리를 했다가는 핀잔만 들을게 뻔해, 명희는 화풀이로 이런 저런 깍쟁이 같은 짓을 했다. 이모들은 그런 명희가 이쁘다며,

"으유, 저 안차지고 달아질 것"하고 욕인지 아닌지도 모를 말을 뱉어냈다.


"삼촌은 좋겠다. 이제 시험 봤으니까 과외공부하러 안가도 되는 거야?"

"아니지. 중학교 갔으니까 계속 다녀야지"


"진짜? 왜? 시험도 끝났는데 안다녀도 되지"

"너희들도 열심히 공부 해"


"후~ 공부하러 다니기 힘든데.."

"언니 그래도 과외갔다가 올 때 떡볶이 사먹을 수 있잖아. 히히"

"그치, 그건 좋아"


"그럼 가방 두고 우리 시장가서 할머니 떡볶이 먹으러 가자"

아이들이 할머니네 대청 마루에 가방을 던져 놓고 나갈 참이었다.

디딤돌 위에 반짝이는 가죽 구두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남자 구두네"


"우리집에서 삐닥 구두 신는 사람은 영순이모 밖에 없는데...."


집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가라앉은 숨소리가 안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이들은 절로 숨을 죽인 채 집을 빠져 나갔다.


"흠"

빗겨 앉은 채로 헛기침만 하는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할머니는 괜스레 음식을 권했다.


"맛있습니다. 어머니 솜씨가 아주 좋으시네요"

포마드를 발라 머리카락을 넘긴 남자는 흡사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았다.


"농협에 다녀요. 아버지"


"흠"


"그래? 인물도 훤한데 능력도 좋으네. 집은 어디우?"


"가깝게 살아요"

영순이 잡아채듯 대답했다.


"고향은?"


"개성입니다. 누님과 함께 내려왔는데, 지금은 저 혼자입니다"


할아버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형제가 어떻게 되나?"


"네 누님 한 분과 쌍둥이 동생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같이 못 오고 누님과 둘만 내려왔습니다"


"학교는?"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 영순이는?"


"네, 이 사람하고 이야기는 다 나눴습니다. 제가 잘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 학벌 좋고 인물 좋고 직업도 좋은 사람 찾는거 쉽지 않아요. 이 보세요. 우리 경환이도 잘 살피고 잘 살게요"


"흠.."


"그래, 그래 건너가서 쉬어요. 준비할테니 저녁 들고 가야지"


"네, 어머니"


영순이 윤기나는 얼굴을 싱글싱글하며 남자를 일으켰다.

댓돌에 놓인 구두가 해를 받아 노곤노곤해지고 있었다. 남자는 영순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해가 비치지 않는 곳으로 구두를 옮겨 두었다.

영순은 방문을 열고 서서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멋쟁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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