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집
“아고고, 아고고. 밖에 누구 있니?”
“네?”
명자, 명희는 오늘도 뒷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소꿉놀이 중이다.
편편한 돌에 봉선화 잎과 꽃을 따서 조약돌로 콩콩 찧어 밥을 하고 자갈돌로 반찬을 올려 풋내 나는 상을 차리고 있었다. 봉선화 꽃물이 손톱밑을 검붉게 물들였다.
“이리 들어와 봐. 할아버지 심부름 좀 다녀와라”
명희는 가볍게 일어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기 무악재 고개에 산골집 알지? 거기 가서 산골 좀 달라고 해. 알았지?”
할아버지는 허리춤에 찬 돈주머니에서 작은돈 몇 장을 꺼냈다.
“아고고, 허리야”
할아버지는 마차를 끌고 마장동까지 다녀오는 날에는 더 아프다고 했지만 큰삼촌은 그런 일은 창피하다고 인상부터 지푸렸다.
"막대기 시집보내느니 내가 다녀와야지"
명희가 폴짝 폴짝 뛸 때마다 잔꽃무늬 원피스가 찰랑찰랑 움직였다. 원피스 자락이 찰랑거리고 귀밑으로 반듯하게 자른 단발머리가 차르르 차르르하는 것이 재밌어서 폴짝거리다 보니 어느새 고갯마루에 있는 기와집에 닿았다.
할아버지는 잊을만하면 산골집에 심부름을 보냈다.
산 중턱에 기와집 두 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형제가 함께 살면서 산골을 캔다는 얘기를 할머니한테 들었다. 어느 집으로 들어갈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희는 항시 열려 있는 집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자그마한 영감님이 흰 바지 저고리를 단정하게 입고 나왔다.
“산골 사러 왔어요”
영감님은 말없이 마루에 있는 작은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누가 드시니?”
“할아버지요”
영감님은 책상 위에 놓인 주발크기의 돌절구에 엄지 손톱만한 붉은 돌맹이를 넣고 콩콩 찧다가 절구공이를 비빙빙 돌려 고운 가루를 만들었다.
바스락 거리는 종이에 절구 안의 것을 조심조심 부었다. 빨간색의 고운 가루가 종이로 떨어지며 부스스 붉은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영감님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꼭꼭 눌러 접었다.
명희는 할아버지가 주신 돈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종이 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댓돌에 내려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 올 때처럼 폴짝 폴짝 뛰어 무악재 고개를 내려갔다. 내리막 길은 올라올 때보다 걸음이 빨라져서 하마터면 고갯마루에서 데굴데굴 구를 뻔했다.
할아버지는 명희가 가져온 작은 종이 봉투 안의 붉은 가루를 물에 타서 한 입에 꿀꺽 삼켰다.
“할아버지, 그거 먹는 거예요?”
“이게 산골이야. 돌가루인데 뼈에 좋단다. 할애비가 요즘 허리가 아파서 먹는 거야”
“돌가루를 먹으면 뼈가 튼튼해 져요?”
“아고고, 그래. 명희야 할애비 다리 좀 주물러라”
“네”
할아버지는 심부름 값도 주지 않고 거스름돈을 한 푼도 남김 없이 돈주머니에 넣었다.
일어날 때처럼 아고고 소리를 내며 누웠다.
“요즘 네 아빠 바쁘니?”
“네. 우리 아빠 요즘 바빠서 집에 늦게 와요”
“그래, 바쁘면 좋지.”
“그래서 일요일에 가서 목욕하고 우리끼리만 집에 왔어요”
전쟁이 끝나고 명자네가 영천으로 이사온 후에 명자 아버지는 전매청에 취직을 했다. 당직을 서는 날이면 명자 아버지는 명자, 명희, 완무를 데리고 전매청 목욕탕에서 아이들 목욕을 시켰다.
당직실에 옷을 벗어두고 세 녀석은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목욕탕까지 잰 걸음으로 달렸다.
"아이 추워"
폭이 좁은 나무판자로 된 마룻바닥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일요일이라 당직을 서는 아버지밖에 없었지만 옷을 홀랑 벗고 사무실 복도를 뛰려니 창피한 기분에 세 아이 모두 잰 걸음으로 긴 복도 끝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는 목욕탕을 향해 달렸다. 뜨거운 욕탕에서 불린 때를 밀고 머리를 감고 나면 열기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정수리에서 모락 모락 김이 올랐다.
뽀얗게 때를 벗을 얼굴들을 보며 아버지는 보름달만한 공갈빵을 한 봉지 사주며
“엄마랑 나눠 먹어라. 집으로 곧장 가고”
“네”
종이 봉투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에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집으로 향했다.
목욕만 하고 나면 왜 배가 고픈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항상 뭐든지 사줄 때마다 엄마랑 나눠 먹으라고 했다.
“엄마~”
“어, 왔니?”
“아버지가 공갈빵 먹으래요”
“그래. 아주 뽀예졌구나”
명자는 아랫목에 앉아 종이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제 겨우 앉기 시작하는 명애가 궁금해서 종이봉투 안으로 손을 뻗쳤다.
“기다려, 언니가 줄게”
“음. 음.”
“공.갈.빵. 공갈빵이야. 언니가 줄게 기다려”
“응”
언니가 준다는 말에 명애가 공손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아이 착해”
명자는 아기가 말귀를 알아듣는 것이 신통하다며 명애의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할머니는 명애 머리칼이 불밤송이 같다면 빨간 머리들이 사납다고 했지만 명애는 떼를 쓰지 않는 순한 아이였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한 번 울기 시작하면 기운이 다 빠질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울어제끼냐고 타박해도 지쳐서 잠이 들때까지 울었다.
바사삭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얇은 빵 껍질이 깨졌다. 명예는 작은 조각을 밤벌레처럼 통통한 손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맛있어? 좀 기다려 아버지가 엄마랑 같이 먹으라고 했어"
보리차를 갖고 들어온 엄마가 입 안에 넣은 꿀이 발린 빵조각을 음미하고 있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어쩜 전매청 물이 좋은가 보다. 아주 뽀얗게 됐네"
"아버지가 때를 뻑뻑 밀었어"
완무는 화가 난 듯 때 미는 시늉을 했다.
"호 호 어서 먹자"
와그작 엄마가 부셔놓은 빵조각이 달콤했다.
"맛있다"
살껍질이 벗겨진다고 눈을 질끈 감으면서 아프다고 소리치던 명희도, 완무도 하얗게 불어버린 손가락으로 공갈빵을 집어 먹었다.
"맛있다"
"그래, 많이 먹어"
아랫목에 깔아놓은 목화솜 이불 아래 발을 집어 넣고 뒹굴 뒹굴 누워 먹는 공갈빵의 맛이란.
때를 밀어 매끈매끈해진 몸이 옷 안에서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공갈빵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이불 속에 발을 넣은 아이들은 쿨 쿨 잠이 들었다. 발그레한 볼을 부풀리며
'푸우~ 푸우~"
숨을 뱉어내는 언니, 오빠 옆에 명애도 몸을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