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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May 27. 2020

마흔아홉

몸은 늙는데 마음은 따라갈 생각이 없네.

열아홉 그 젊은 나이를 꽃 같은 나이라 하고 싶지 않다. 좋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그 시절에도 다리가 아팠고 몸은 자고 나도 쌩쌩하지 않았다. 더욱이 돈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환상 컸다. 언젠가는 멋진 남자와 결혼해서, 잡지에 나올 층고 높고 계단 많은 집을 가지고, 아름답고 순하고 지적인 아들 딸에, 틈틈이 비즈니스석을 타고 해외여행을 한다. 너무나 바쁜 커리어 우먼이라 집안일을 할 사람을  고용하고,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그런 미래. 이런 된장 하나도 맞아떨어진 게 없다.


스물아홉에 나는 아이가 둘이었다. 이미 체중은 10킬로 상승했지만 다시 빠질 것이라 믿었다. 아직 어린애인 내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공부를 몹시 잘할 것이고 모범적이라 육아 성공책을 어떻게 쓸까 꿈을 꿨다. 와장창, 이런 된장.

가장 먼저 깨진 내 환상은 남편이었다. 나의 성취에 기뻐해 주고 잘생기고 돈 많고 멋진 남자여야 하는데 제기랄.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잘 삐지고, 잘생긴 듯 착각하고 돈은 없고,  IMF 시절에는 월급날에도 돈이 없었다.  현실을 깨닫게 해 준 일등공신이다.



서른아홉 아직도 젊은 줄 알고 회사를 명퇴하고 더 늦기 전에 방학이 있고 일찍 마치는 안정적인 교사가 되려고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대학원생 3명과 스터디를 했는데 그들은 공부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초등학생인 우리 아들, 딸은 훌륭한 단어인 온라인 학습, 자율학습, 자기 주도 학습이  안되었고 학원에서 는 자꾸 늦게 온다고 연락이 왔다. 엄마한테 안 이르면 다음부터 일찍 온다고 딜까지 했다. 이 놈의 자식들이 남편과 더불어 엄마를 성장시켰다. 포기. 공부는 무슨



마흔아홉 정신 차렸다. 삼십 년 만에 내가 가진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정확히 모든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나는 그런 행운을 가질 만큼 확률이 높은 환경과 조건에 있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이만큼이라도 살고 애를 키우고 결혼 생활을 유지한 것도 기적, 미라클, 신의 가호, 조상님의 은덕이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도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순순히 인생의 배에 타고 휩쓸려 가고 있다.  아이들은 이제 20대의 파도를 헤쳐나가고 있다. 그들이 찾을 때 보듬어 줘야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나는 그들의 가이드도 디렉터도 아니다. 


정신없이 살았고 아직도 혹시나 뭔가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불이 훅 꺼져버린 느낌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직 불이 희미하게 보인다고 믿고 싶다. 오십아홉, 육십아홉,  칠십아홉까지 살 수도 있기 때문에 또 다음 30년을 위해 환상이 아닌 대비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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