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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Dec 22. 2023

나잇값 5 - 비우기 not 채우기

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릇된 생활방식의 산 증거물에 불과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고 잃을세라 줄곧 조바심 내기 마련이다. 도둑을 겁내고, 경제적 변동을, 혁명을, 질병을, 죽음을 두려워할뿐더러, 사랑하는 행위에도 불안을 느끼며, 자유, 성장, 변화, 미지의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나. 그리하여 나는 신체상의 질병뿐만 아니라 내게 닥칠 수도 있는 온갖 손실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에 싸여 살며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에서 생기는 불안과 걱정은 존재적 실존 양식에는 없다. 존재하는 자아가 나일 뿐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앗아가거나 나의 안정과 나의 주체적 느낌을 위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중심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고 존재하면서 나의 고유의 힘을 표현하는 능력은 나의 성격구조의 일부로서 나에게 달려 있다.






육지에서 병원순례를 마치고 한 달 만에 집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여백의 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간이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한 달 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집을 보니 애지중지했던 것이 잡동사니 같았다. 거기에다 추가배송료가 아까워 육지에서 들고 온 짐까지 더해졌다.


하루에 다섯 가지만 정리하기로 마음먹다가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새 상품을 사느라 몇 시간을 고도의 집중력으로 훌쩍 쇼핑에 바쳤다. 공부가 아닌 오로지 쇼핑에 그런 끈기와 집중력이 나오다니 스스로도 한심하다. 마음을 새롭게 하고 정리에 들어갔다. 우선 냉장고 재료로 음식을 한다. 헌 달력과 철 지난 옷을 정리하며 또 반성한다. 마음의 허기로 사들인 쓸데없는 옷들이 많았다. 필요가 아닌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자 몇 시간을 바쳐 산 몇 천 원짜리 물건들이 내 공간을 허접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릴 적 대모님의 방에 간 적이 있었다. 수녀님이셨다가 사회복지시설에서 일하셨는데 그분의 단칸방에는 침대와 책상과 옷장이 전부였다. 아주 깔끔했고 신성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경건해졌다. 나는 많은 물건으로 공간을 더 허접하게 만드는 놀라운 재능을 버려야 한다. 모델하우스에 가면 최소한의 배치로 세련되고 깔끔해서 머물고 싶다. 그러다 그 공간에 주인이 생기면 물건이 사람보다 우위가 되는 것 같다.


소유냐 존재냐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가진 물건이 내 존재보다 우위에서 나를 지배하는 일이 없도록, 할 일이 없고 우울할 때 쇼핑앱을 기웃거리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말처럼 쉽지 않으니 자각과 노력이 필요하다. 살 빼면 입을 옷은 이미 살이 빠진 사람에게 나누고, 먹으려고 냉동실을 채운 재료는 손질하고, 읽으려던 책은 읽고 공간도 마음도 정리를 해야겠다. 어차피 눈이 쌓여 꼼짝도 못 하는데 오늘은 정리정돈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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