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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Nov 05. 2023

독학으로 심리학 공부 12

비사교적 사교성 - 나카지마 요시미치

의존하지 않지만

고립되지도 않게


 학력이 낮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니까, 교양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까, 매력적인 육체의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했으니까...... 나는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하지만 어쨌든 인간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알 수 없다는 점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스스로의 본질을 그렇게 결정하고 그것이 인생을 규정한다고 해석한다면, 그 책임은 당신 자신에게 있다. 스스로의 '형편없음'을 고정하고 이를 부모나 상황 탓으로 돌린 사람은 당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선택했다. 그러니 당신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한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한 인간의 행위와 모습을 결정하는지 실은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든 어떤 순간에든 '지금까지'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당신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한 인간일 것이다'는 말이 와닿았다. 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상처가 평생을 지배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년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을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각색한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상황이 악화되고, 일은 꼬이고, 사람에게마저 상처받으면 유전자 탓, 부모 탓, 환경 탓, 나 아닌 다른 사람 탓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리라.  하지만 반대의 경우, 즉 형편없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잘 살게 될 경우의 불우한 환경은 성공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얘기한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든 어떤 순간에든 '지금까지'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말은 성장 후 이루게 된 결과나 환경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칸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꼼꼼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 칸트가 산책하는 시간으로 동네 사람들이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칸트가 진짜 '꽉 막힌 사람'인가 하면 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무척 사교적인 사내다. '비사교적 사교성'이란 깊은 함축을 담고 있는 칸트의 말이다.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성질'과 '자신을 개별화하는(고립시시키는) 성질' 둘 다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완전히 혼자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타인과 함께 있으면 불쾌한 일뿐이다. 그 결과 누구나 '도저히 못 참겠지만 싹 갈라설 수는 없는 동료'에 둘러싸인다.


칸트가 매일 몇몇 손님을 오찬에 초대했다는 것은 유명한데, 이는 사실 그가 예순세 살 무렵 자기 집을 가지고 나서 생긴 습관이다. 어쨌든 이 오찬은 그만의 독특한 '사교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성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고, 철학자도 마찬가지였다. 부르는 사람이라고는 공무원이나 상인처럼 철학과는 연이 없는 남자들뿐이었다. 이 오찬은 철학 논의에 탐닉하는 자리가 아니라 철학 이외의 지식을 얻는 자리였다.  

그는 가까운 사람을 철저히 경계해서 형제자매와도 연락을 끊었으며, 그 어떤 철학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두루두루 교제할 수 있었다.

칸트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관계, 친구를 중심으로 하는 신뢰관계, 성애를 중심으로 하는 애정관계를 혐오했다. 이 모든 것은 상대방을 지배하려 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지배를 받으려 함으로써 인간에게서 이성과 영혼의 자율성을 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 24시간을 완벽히 관리하고 1분이라도 제 뜻에 반해 타인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타인은 그저 소파나 쿠션처럼 그의 생활을 쾌적하게 해 주는 '설비'일뿐이었다.



저자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독일 철학자 칸트를 전공하였고 교수를 지내다 은퇴한 후 '철학 학원 칸트'를 주재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철학이 재미있다. 나이가 들수록 관심이 생긴다. 특히 칸트의 철학은 뭐라는지 모르지만 매력적이었다. 칸트는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정확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무결점 인간이라 생각했으나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칸트는 어떤가?

그냥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싫은 사람에게 내 시간은 1초도 내어주지 않고 가족도 친구도 이성도 필요 없고  자기에만 몰두하는 그런 사람. 그러나 아니었다. 나카지마는 어릴 때부터 가족, 부부, 친구, 사제라는 미명 아래 서로 지배하고 속박하는 관계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완전한 고립은 두려워했다. 구체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자립한 사람들 사이의 옅은 관계, 늘 내가 우선이고 상대방은 두 번째인, 자기희생정신이 결여된 이기주의자들 사이의 건조한 관계, 상배방을 거의 구속하지 않는 인간관계를 바랐다. 칸트는 이기적이지만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옅은 성숙한 관계를 맺고자 했던 것이다. 자기 욕구를 알아차리고 그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 책은 제목도 그렇고 매력적인 철학책이지만 나이가 드니 그렇다고 철학자인 저자의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도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도 않고 이론과 현상에 새로운 기준과 해석을 주지만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이라 보편적 인간이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옅은 관계를 지향하는 사람들. 부모, 형제, 친구, 연인이 생활을 쾌적하게 해 주는 '설비'일까? 내가 힘들 때 그들이 힘들 때 상호 도움을 주고받던 그 고마운 관계가 쾌적한 설비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 생활하면서 너무도 싫었던  '도저히 못 참겠지만 싹 갈라설 수는 없는 동료' 그 사람들을 설비라고 생각할 걸 그랬다. 인간적인 것을 기대하지 말고 성능이 떨어지고 유행이 지나 한물간 설비라고 생각할 걸 그랬다. 퇴근할 때 설비들의 불을 끄듯 그들로 인한 속상한 마음을 끌 걸. 쓸데없이 설비 때문에 속상하고 애간장 태웠다. 어리석었다.


지금도 나는 내 요구가 먼저라고 하지 않는다. 아이들 먼저, 남편 먼저, 친구 먼저 늘 상대방을 먼저 생각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어떤가? 당연히 뭔가를 바라고 속상해한다. 속박하는 관계가 인간적이며 도의적이라 생각하는 데 몹시 익숙해져 있다. 아이들이 엄마 본인 먼저 생각하라고 지적하면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 경우 바른 사람, 착한 사람 콤플렉스다. 노력해도 고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이를 인식하고 고치려고 애를 써야 한다. 나 아닌 모든 타인에게 함부로 선 넘지 말기. 내 잣대로 친절하지 말기, 그들이 그은  선과 영역에 사람 사는 게 어쩌니 저쩌니 하며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입은 닫고 지갑만 여는 현명한 자가 되자. 비사교적 사교성, 참 근사한 말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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