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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천히바람 Dec 12. 2023

독학으로 심리학 공부 14

불편한 편의점 - 김호연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나? 입 닥치고 조용한 쪽 편이다. 잘 들어. 이놈아, 우리같이 돈도 힘도 없는 노인들은 발언권이 없는 거야. 성공이 왜 좋은 줄 아나? 발언권을 가지는 거라고. 성공한 노인들 봐. 일흔이 넘어도 정치하고, 경영하고, 응! 떠들어도 밑에 젊은 놈들이 경청한다고. 걔들 자식들도 충성하고. 근데 우린 아냐. 우린 망했잖아. 그런데 떠들긴 뭘 떠들어!"

"씨발. 그래. 인정. 망했지, 못났고... 그럼 못난 놈들끼리 모여서 떠들면 되잖아! 광화문 나가서 다 함께 말이야! 야 이 자식아, 너 이혼했다고 너무 의기소침할 거 없어! 나랑 같이 이번 주말에 광화문 나가서 신나게 소리나 한판 질러보자! 어때?"

곽은 부끄러웠다. 친구가 부끄러웠고 별다를 바 없는 자신도 부끄러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황의 마스크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의 입에 다짜고짜 씌웠다. 입 닥치라고.


손찌검만 안 했지 수시로 고함을 치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아이들 역시 그것을 보고 자라지 않았겠는가? 결국 고립은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대화를 나눌 가족이 사라졌고 그것이 스스로의 탓임을 깨닫게 된 곽은, 그제야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가 편하게 느껴졌다. 진즉에 봉했어야 했다. 가족들에게 무심코 던졌던 폭력적인 말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뒤통수에서 울릴 때마다 자업자득이란 말을 되새김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니까 조용해졌어."

"다들 너무 자기 말만 하잖아. 세상이 중학교 교실도 아니고 모두 잘난 척 아는 척 떠들며 살아. 그래서 지구가 인간들 함구하게 하려고 이 역병을 뿌린 거 같아."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김호연 작가는 중년의 남성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중년과 노년의 아저씨들을 너무 잘 묘사하였다. 돈독에 올라 도덕성이라고는 모르는 성형외과 원장, 회사에서는 대놓고 왕따, 집에서는 은따인 무력한 가장들, 자신들의 분노를 쏟아내고자 광화문에 가는 노인들. 패잔병으로 젊은 날을 마감한 중년 이후 남성들의 후회와 반성 뿐만 아니라 원망과 독기 그리고 위로와 체념이 있다.


강자들은 고함을 치고 윽박지르면 약자들이 자기 말을 듣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들은 속으로 '두고 보자'라는 마음을 키우며 점점 더 멀어진다. 아이들이 유년시절에 경험한 따뜻함과 친절은 평생 간직되는 비상약이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던 그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반면에 엄마는 바쁘고 화가 나있어 가족의 얘기를 들어줄 여유와 친절이 없었다. 주로 명령과 지시와 야단이었다. 그런데 나 또한 아이들에게 명령과 지시와 야단이었다. 어쩌다가 친절과 칭찬도 었지만 부끄럽게도 전자가 훨씬 많았다. 나는 아버지보다 엄마의 언어를 더 닮았다.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리움은 아름답고 온순하고 친절하고 조용한 상태에 대한 가슴 저림이다. 유년시절에 정월 대보름달을 보러 야트막한 산에 올랐다. 동네 꼬맹이들과 올라간 산에서 대낮처럼 밝은 큰 보름달을 보았다. 대자연에 대한 첫 경이로움이었다. 이 감정은 평생 잊혀지지 않았다. 훤한 둥근달이 정말로 내 소원을 꼭 들어줄 것 같았기 때문일까? 마치 하느님이 일부러 아이들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 달구경을 시켜주신 것 같았다.


불편한 편의점은 삶이라는 다리에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결핍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곳이다. 그 편의점에 교사로 퇴직한 할머니 사장님의 지갑을 찾아 준 노숙자 독고가 야간알바를 하면서 일어나는 군밤과 호빵 같은 가슴 따뜻한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진심이 진심으로 이어져 사람들이 용기를 되찾고 장점을 찾고 인정을 나누는 그런 이야기다.


 누구나가 꿈꾸는 따뜻함과 훈훈함과 해패엔딩이 있지만 정말 저런 곳이 있을까? 인간이 저렇게 이타적일 수 있을까? 이런 의문도 든다. 세상과 사람이 어떠한지 겪어본 후라 인간의 선택적 선함, 즉 나중에 나에게 뭔가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관계형성이 보장되어야만 보통의 인간은 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건 상대방도 그럴 경우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선한 사람들은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을 사랑한다.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는 밥딜런 외할머니의 명언을 잘 기억해야 한다. 나의 친절함은 오지랖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라는 다리를 걷는 사람들과의 다리 위에서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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