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풍 없는 계절
스무 살, 본가를 떠나 시작된 나의 20대는
'이사'라는 두 글자로 요약된다.
10년 동안 원룸과 투룸, 낡은 빌라들을 전전하며
나는 늘 임시 거주자라는
불안정한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매년 겨울이면 창틈으로 파고드는 칼바람에
머리가 시렸고, 본가 아파트에 갈 때마다
느껴지는 따뜻함은 이미 낯설게 느껴질 만큼
추운 자취방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신기할 정도로 따뜻한
거실 한복판에 앉아 있다.
비록 여전히 '전세'라는 이름의 집이지만,
이곳은 우풍 하나 없이 온기가 꽉 차 있는 아파트다.
자취 시절엔 상상도 못 했던 예쁜 가구와 가전들,
그리고 둘이 살기에 과분할 만큼 넓은 공간.
욕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이 공간이 정말 내가 매일 들어올 곳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낯선 공간과 낯선 동네가 주는 이 풍요로움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게 느껴진다.
퇴근 후 남편과 나란히 앉아 있으면,
잠깐 쉬고 나면 다시 그 춥고 비좁은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치 깨기 싫은 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가끔 집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들도 눈에 띈다.
예전 자취 동네에선 늘 뒤를 살피며 걷던
치안 걱정도, 이곳에선 사라졌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사람의 온기'다.
캄캄한 빈방에 혼자 들어와 불을 켜던
10년의 쓸쓸한 퇴근길이 끝났다.
드디어 나에게도 진짜 가족이 생겼구나.
이제는 현관문을 열면 나를 기다려 주는 내 사람이
있고, 따뜻한 인사가 흐른다.
남편의 직장 근처로 오느라 나의 출퇴근 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멀어져서
몸은 고되지만, 신기하게도 버틸 힘이 난다.
지독했던 집주인과의 싸움,
그리고 숨 가빴던 결혼 준비로 깎여 나갔던
내 영혼이 이 집의 온기로 치유받는 기분이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한 보상인 걸까.
조용한 거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평온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고 모든 게 그저 감사하다.
창밖은 여전히 찬바람이 불지만,
올해 나는 처음으로 우풍 없는 따뜻한 겨울을
보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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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예고]
여행지 숙소 같던 집이
‘우리 집’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건,
주방에서 구수한 찌개 냄새가 퍼지면서부터였다.
10년 자취 경력으로 다져진 나의 투박한 요리와,
요리라고는 라면밖에 모르던 남편의 서툰 손길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란스러운 저녁 식사.
이제 법전 대신 레시피를 뒤지고,
소송 서류 대신 마트 영수증을 분석하는
평범하고도 위대한 신혼의 일상이 시작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