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공에 운명을 맡겨서
헤일리는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을 분당에서 다녔고 집에서 CD로 영어책을 꼭 한권씩 읽고 잠이 들곤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엄마도 젊어야하는구나싶다.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신체적인 고난과 정신적인 힘듦이 있었던때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영어를 잘하고 선생님들도 잘한다 칭찬해주시니 주변 공립학교를 보내기가 아쉬웠다.
지금생각하면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집은 분당이었고 아빠의 회사도 분당이었는데 영어와 중국어 이머전 사립학교인 노원구에 있는 모 초등학교에 애를 보내기로 맘먹었다.
추첨을해서 들어가는 방식이라 아직도 그때 노랑공을 뽑았을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내 아이 미래가 보장된 것 같은 눈물겨운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웃음이 나고 떨어졌어도 또 다른 길이 있다고 여유가 났겠지만
그때는 하나밖에 안보였다. 여길 보내겠다는 마음밖에..
이 학교는 영어반, 중국어반, 국제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딸은 중국어반에 지원했다.
이유는 그때만해도 홍콩대가 유명하던 때라 아이를 중국본토나 홍콩대학교를 보내야겠다는 나름 엄마의 빅픽쳐가 깔려있었던 결정이었다.
선생님은 담임 한국선생님과 부담임 중국인선생님이 맡아 지도하셨고 , 첫수업이 8시에 시작해서 우리집은 항상 밤 8시에는 불을 껐다.
나는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기위해 난생처음 운전을 배웠고 300만원짜리 오래된 중고차를 사서 아이를 태우고 아침마다 같은 길만 반복했다.
아침 7시에 자는 아이에게 교복을 입히고 , 원피스라 타이즈까지 신기고 , 애을 엎고 미리 싸놓은 아침도시락을 같이 들고 주차장으로 간다.
애를 뒷자리에 눕히고 덜덜 떨리는 초보운전자는 아이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용기를 낸다.
굽이 굽이 어려운 도로를 지나 중간즈음 다다르면 아이를 살포시 깨운다.
헤일리~ 일어나서 앉아보자~~ 도시락을 연다~~ 하나 집어 먹는다~
아이는 얼마나 착한지 일어나서 도시락을 꺼내서 먹는다. 한입에 먹기 좋으라고 매번 주먹밥 과일을 쌌더니 참기름 냄새가 차안에 진동한다.
아이는 아직도 참기름 냄새를 맡으면 그때가 생각난다고 추억한다.
그렇게 아이를 잘 내려주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 잘하고 있는거지?" 하며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주로 학교내 수영을 끊어 나도 운동을 하거나 엄마들이랑 주차장에서 만나서 같이 커피를 마셨다.
다들 같은 상황이고 픽업이 필요한 아이들이라 엄마들의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때 동고동락했던 엄마들을 아직도 만나는건 그때의 시간과 동질감이 이어져온 것이라 생각된다.
학교에서는 중국어 연극 동아리가 있었는데 헤일리는 소속되어 1학년, 2학년 2회에 걸쳐 연말 정기음악회때 중국어 연극 무대에 섰었다. 조그만 8살짜리 아이가 중국어 대본을 외우고 동작을 외우고, 어른도 떨릴 저 큰 무대에 서서 실수 하지 않고 다 해내는걸 보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3년동안 이런 시간들을 반복하며, 그 안에 세계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아이도 친구들과 선생님과의 관계를 맺으며 지냈었다.
딴 아이들이 하는것을 보고 조바심내고 중계동 학원가에 그룹을 만들어 공부를 시키고, 스케이트도 가르치고..
지금 생각하면 그럴꺼까진 없었다싶지만..
그땐 저게 최선이었고 나름 그 시간에는 열정을 가진 나였다.
헤일리에게 고마운건
뭘 하나 가르쳐도 안한다고 한적이 없었다. 다 해야되는줄 알고 최선을 다해했고 뭐든지 잘해내는
태도가 옳바른 아이였다는거다.
내가 이런 아이니 어쩌 듬뿍 집중을 하지 않을수가 있었을까.
중국어는 이제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섰고 영어도 꾸준히 원서를 읽고 스피킹도 한터라 3개국어를 하는데 문제가 없어보였다. 예체능도 수영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트 캠프도해서 다방면에 아이는 많은 경험을 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한다.
남편은 아침 일찍 자차로 노원에서 분당까지 1시간 넘게 출근을 했고 차가 막히지 않는 시간대인 밤8시에 출발해서 집에 오면 항상 10시가 되곤했다.
오면서 항상 차에서 졸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맘이 아팠지만, 아이 생각만하기로해서 남편의 고생은 당연한거라 생각했다.
3년을 하니 이제 더이상은 못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난 너무 이기적인 아내인가싶어서 며칠을 고민했다. 하지만
더 이상 남편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아쉬웠지만 3년의 열정불태운 사립초등학교 시절을 뒤로 하고 기존에 살던 분당지역으로 다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만큼 열정을 다해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을까?
헤일리도 그때만큼 열심히 따라주었을까?
지금 이야기를 아이와 하면 그때 초등학교 3년이 제일 열심히 살았던 때였고
그때 바탕이 지금의 자기를 만든것 같다고 말한다.
세상 열심히 한것은 헛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때 기반이 또 하나의 다른 기반이 되고 연결 연결되는 것을 아이는 일찍 깨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