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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 이야기 Sep 06. 2021

바다 빛 당신 8. 숨길 곳 없는 마음

8. 숨길 곳  없는 마음

1943년 11월.       

  

동길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가장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태어나 처음 타 보는 오토바이.    


흙길에 엉덩이가 들뜰 때마다 사타구니까지 긴장감이 올라와 불편하기도 하지만,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색다르게 접하는 맛과 서릿발 같이 찬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는 기분은 한 겨울 냉수마찰보다 짜릿하다. 그러나 오토바이의 최고 궁극은 이 기계를 함께 타기 위해서 두 사람이 취해야 하는 자세에 있다.


뒤에 앉은 동길에게 등을 완전히 내어 주신 수사님과 수사님의 허리를 감아 잡아야만 안전이 보장되는 동길이 마치 하나의 생명공동체처럼 느껴지게 하는 기계. 수도원의 입소 동기에서부터 서로 간에 신뢰란 없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에게 던진 돌은 결국 네 안에 쌓이기 때문이란다.” 하시며 동길의 상한 마음에 정확히 메스를 대셨던 수사님을 어려워말고  잡아도 된다는 것이 참으로 묘했다.


혼자 다니시던 왕진 길에 굳이 동길을 태워 조선인 민가로 데려 가신 건.  혼은 내셨지만 진실한 애정으로 동길을 보살피는 어른의 마음임을 느꼈기에, 그 어른이 내어준 등에 기댈 수 있음에 괜스레 콧잔등도 시큰해진다.   


 만약에 동길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의 뒷등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아마 이 분의 등이었을 거란 감상까지 올라오게 만들다니. 서양인들과 함께 이 나라에 들어온 신문명과 기계는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그러나 요셉 수사님은 조선의 사라져 갈 수밖에 없는 풍경들을 더 신기해하며 아끼신다. 아직 코 푸는 법도 배우지 못해 콧물은 으레 달고 다니는 자식에게 흥! 하며 코 풀기를 가르치는 아낙을. 그렇게 푼 코를 또 남의 집 담벼락에 손으로 슥슥 문대버리고 그 손으로 새끼 손을 잡고 가는 어미의 당당한 뒷모습을 잠시 멈춰서 미소로 바라보기도 하신다.    


보면. 분명히 요셉 수사님은 자연이나 풍광 따위보다, 철학이나 신학 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크신 분이시다.



“베버 아빠스님의 필름을 저도 볼 수 있을까요? 수사님.”

    

조선인 거류지를 다녀오던 길에 동길이 물었다. 초대 아빠스께서 조선을 처음 방문했을 때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필름에 담았고, 그 필름으로 꼬레아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되어 서양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들은 이야기 중에도 그 필름을 직접 보여 달라고 말하는 친구들은 없었는데, 우리들의 처지에 대한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두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하숙집을 다녀온 후 동길은 그 필름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신문지로 흙벽을 덧대 바람을 막으려는 움막집에선 참빗으로 이를 잡는 할머니와 아궁이 불도 떼지 못해 이불만 둘러쓴 남매, 발이 쳐진 안 쪽에는 소생의 가망 없이 역한 냄새를 풍기는 병든 아비가 기침을 해댔다.  


이를 잡던 할머니가 귀한 손님이 오신 것을 알고 급히 머리채를 여며 묶고선, 며느리는 정유공장에 돈 벌러 나갔다고 했다. 냉기가 오른 방이라 방석이라도 깔아얄텐데 그런 것도 없어, 남매들의 이불을 빼앗아 손님 자리를 마련하려는 할머니를 간신히 말리신 수사님. 결국 실랑이 끝에 그 좁은 방에 여섯 명이 붙어 앉자,

가난이 실감 나게 우리 사이에 들어와 앉았다.


소반을 펼 자리도 없는데, 벽장에 쟁여두었던 고구마를 굳이 꺼내 손님상으로 기어이 내어놓는 풍경. 같은 조선인이지만 이미 문명화가 상당히 진행된 동길이가 보아도, 이를 잡던 손에 침을 발라 고구마 껍질을 벗겨주며 먹으라고 들이미는 할머니를 아름답고 신비하게 볼 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를 보는 수사님의 얼굴에는 어떤 그리움 같은 미소가 들어 있었다. 가방에 챙겨 온 사탕을 아이들에게 주시고, 수사님이 환자에게 해열 주사를 놓는 동안 동길은 차라리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자리가 좁아도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아니, 자꾸 마음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해서 앉아 있지도 서있지도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좋아할 수 있지?    


숨길 수 없는 가난을. 비위생적인 고구마를 감사히 받아먹는 수사님과 이 수도회의 독일인들이 조선의 무엇을 그리 좋아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 필름은 본국에 있단다. 하지만, 아빠스님의 일기는 인쇄해 두었으니 읽어 보고 싶다면 도서관에 가 보렴.”   


수사님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 길로 수도원 도서관을 찾았는데. 하필 그 책은  태주가 먼저 빌려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더 이상 마음으로도 친구에게 돌을 던지지 않기로  이후. 녀석을 미워하진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동길은 굳이 태주와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다.


신경이 쓰여도 안 쓰이는 척하며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도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할 상황은 오지 않길 바랐는데, 하필 그 책을 또 녀석이 선점하다니.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런 기분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비에르. 어제 빌려 간 책. 어디까지 읽었어?”    


동길이 둘 사이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태도를 꾸며 물어보았다.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드릴 때의 일이다. 태주는 한동안 혼자 삐졌다가 혼자 맘이 풀린 친구를 잠깐 보더니, 늘 모든 것이 쉬운 그의 성격대로 쉽게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는지 웃으며 받아 줬다.    


“ 고요한 아침의 나라 말하는 거야?”

“ 응 ”

“ 너도 관심이 있니?”    


그렇게 어색하게 나란히 마주 앉아 그 책을 먼저 읽어 본 자로써 녀석이 알려주는 말을 들어주고 있으려니 동길은 슬슬 불편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길이 원하는 것은 직접 그 책을 읽는 것이지, 책을 읽고 있는 녀석의 견해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문을 보면 조선에 대한 시각이 아주 냉철하거든. 망해 버린 조선의 문화가 곧 사라질 거라는 것도 일본에 의해 세워진 신질서를 따르게 되리란 것도 그리고 결국엔 미국 선교사의 질서냐 일본 제국주의의 질서냐로 국가 기반이 세워지는 일에 전쟁이 일 것까지 예상하고 계시거든. 수사님들은 분명 선교적 관점에서 오신 거야.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고.

내 말은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면 사랑이었지 우린 아니었단 거야. 그런데  빠져버리신 거지.

조선의 매력에. 

그래서 이 필름을 내 보이길 꺼려하셨대. 혹시 연약한 내 새끼가 상처를 받을 까 봐 하는 아버지 마음 같은 거 말야. 문화 인류학적  관점에서 접근했지만

결국 사랑하게 돼 버린  건  약한 자를 지켜보며 늘 주는 쪽이 었다니.  놀랍지 않니?

망해가는 약소국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독일의 수도자들이 결국은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일단 남자가 아버지가 되면 그땐 그냥 자식 위해 죽어야 하는 거라고 우리 아버지가 말씀... ”   


라는 대목에 이르러 결국 참지 못하고 말았다.    


“잘난 척 좀 그만할래?”

“아... 미안. 나는...”   


동길은 식판을 들고일어나 나가 버렸다. 태주가 무안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녀석은 아니었다.


동길은 그 길로 바로 요셉 수사님의 간호 소를 다시 찾아갔다. 책 따윈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동길이 궁금한 것은 사실 초대 아빠스님의 생각이 아니라 요셉 수사님의 마음이었다.


수사님께 직접 조선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물어보면 될 것을 괜히 둘러둘러 가다가 기분만 상했다. 그럴 필요도 없이 동길의 마음속 아버지 같으신 분은 늘 거기 계신데 말이다.

    

“수사님은 조선의 가난을 함께 하는 일이 힘들지 않으세요?”   


고르고 고른 말로 자뭇 진지한 인터뷰를 시도한 동길.    


“무슨 가난 말이냐?”    


되물으시는 말에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니까...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조선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아.

  나는 이곳에서 나의 가난을 되려 느낀단다.”

그런 거짓부렁....”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만다. 인생이 모범답 안이신 수도자들의  뻔한 대답이라 여겨지긴 했지만, 수사님의 마음을 알고 싶어 물어본 것이면서 동길 스스로 그 말씀을 잘라버린 게 잘못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은 벌써 다 읽고  묻는 거니?”

“아니요. 안 읽었어요.

그 책은 태주가 먼저 빌려갔더라고요.

 나도 좀 보자고 했더니 녀석이 먼저 읽은 잘난 척을 어찌나 하는지.  그래서 안 보려고요. 안 봐도 돼요. 이렇게 바로 수사님을 찾아오면 다 해결....


“영원히 안 볼 생각이냐?”   


수사님은  동길의 말을 자르면서 까지 동길을  부러 난처하게 만드신다.


 하지만, 도대체 수사님이 조선인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할 뿐인데 왜 이렇게 많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화가 나기 시작한 동길은 불복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우린 서로 안 맞다고요. 안 맞는 신발은 빨리 버려야지, 억지로 신을 순 없잖아요. 그리고 전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없는 셈 치기로 한 거라고요. 서로 노 터치. ”    


태주에 대한 속내를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어낸 순간, 수사님의 푸른 눈길이 골수를 쪼갤 듯 냉엄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그 속을 꿰뚫는 시선에 동길도 신경이 움찔하고 다. 수사님이 보고 계신 것이 자신의 구질구질한 속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쩨쩨함이 부끄러워서 친구에게 화를 내는. 자신의 쪼잔함을 외면하려고 친구를 외면하는. 자신의 열등감이 사무쳐서 친구를 밟고 일어서려는. 김동길의 버둥거림. 자기 아버지가 싫어서 다른 아버지를 같다 붙여야만 안심이 되는 응석받이 김동길.


지금 동길이가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는 이  수치심을 수사님도 함께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동길은 수사님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만다.


편안히 등을 내어 주시는 아버지 같아서 파고든 수사님 품이 알고 보니 가시 방석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피신할 곳이 없어 동길은 고개만 숙인 채 침묵하고 만다. 어쨌든 내가 못난 아들일지 몰라도  받아 주신 수사님도 어느 정도 책임은 있다는 거다. 란 심뽀로.


그러나 동길의 속내를 골수 쪼개 듯 다 해부해 보신 듯 수사님은 정말이지 가혹하고 냉정한 의사답게 태도를 바꾸신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손으로 마치 약품을 꺼내 듯 성경을 꺼내, 한 구절을 찾아 보여 주신다.    


‘가진 자는 더 가질 것이고, 못 가진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필 그런 무서운 구절을 굳이 보여 주시며   


“베드로.

태주가 가지고 있고, 네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거라.”   


과제를 내주시며 동길을 간호 소에서 돌려보내셨다.



요셉 수사님의 돌변은 늘 모룻돌처럼 단단하신 원장 신부님의 냉정함 보다 더 무섭다. 힘들 때마다 응석이라도 부리려고 찾아오던 발길을 이제는 끊어야만 할 것 같이 느껴질 정도다. 이 과정이 사제 지원자인 동길을 독립적으로 자라도록 훈련시키기 위함임을 알면서도,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억울함이 먼저 인다.   


‘뭘 해도 나만 못 난 놈이지.

 녀석이랑 있으면  마음이  곱게 안 써지는 것뿐인데...

 그것 마저 내탓이지. ’    


가장 의지하던 요셉 수사님과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이 더 싫어진 동길은 괜히 또 유태주를 꺼내 든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태주가 가지고 있고, 동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좋은 아버지’다.    


자신이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수도원까지 와서 가정환경을 생각해야 하다니 서럽다. 정말 하느님은 가진 자가 더 가지고, 못 가진 자는 더 못 가지는 원리로 세상을 만들었을까? 일본인은 더 부유해지고 조선인은 더 궁핍해지는 것이 예수님의 원리일까?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신 분이 그렇게까지 비정할까?   그런 신이라면 차라리.



부정적인 생각에 한 번 길을 터주고 나면, 어둠은 끝도 없다. 밤이 내린 수도원이 무덤 같이 느껴진다.    



말 대신 침묵을. 드러남 대신 겸손을. 부유함 대신 청빈을. 저항 대신 순명을. 이성에 대한 사랑 대신 순결을 배우고 추구해야 하는 인간의 삶이란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강제로 억눌린 것이 아닌가. 클링 자이스 신부님께서 철학 수업 시간에 공산주의에 대해 설명하실 때, 인간성을 무시한 강요된 제도라고 하셨던 말이, 이곳 수도원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동길은 신학교 운동장에 앉아 소금을 꺼내 불고 만다. 슬픈 노래를 여기서도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 부실한 식사에 배가 고파도, 나누어 먹는 형제애가 있어서 배고픈 줄 몰랐다. 라틴어에 철학에 신학까지. 공부에 코피가 터져도 자신이 성덕을 향해 정진하는 인간인 줄 알고 행복해했다. 하지만 거슬리는 일 하나에도 속이 수틀리고 내가 참지 못해 내가 망신을 당하는 , 좁쌀처럼 작아진 자신만 보이는 것이 점점 싫어진다. 그렇게 초라해진 수련생에게 괜찮다 다독여주는 이 하나 없이, 골수를 쪼갤 듯 명백히 자신의 잘못을 비춰 버리는 타인의 빛남이 두렵기까지 하다.



곱지 못한 마음은 설자리도 없는 이 공간이 숨 막힌다. 따뜻하지만 결코 무절제란 없는 수도자의 생활방식이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고 싶어 진다.      

  

 숨기고 싶어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결핍을. 누군들 가질 수도 있는 그 곱지 못한 마음을 요령 좋게 숨길 길이 도무지 없어, 이리저리 둘러 내 보이다 혼쭐이나 난 자신이 더 서러워, 동길은 소금을 꺼내 든다.    



동길이 부르는 ‘아리랑’은 나무관을 빠져나와 밤공기를 가르고 하늘을 찢는다. 찬 서리에 스러져가는 들풀의 가늘고 가는 노래. 세세대대로 침략당하고 쫓기다 식민지가 되고 만 한 민족의 애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의 음률이 고요와 침묵에 잠긴 수도원을 깨운다.     

   

소금을 부르는 동길의 입에 눈물이 내려온다. 이건 평화가 가슴에 스몄을 때 나던 그 눈물이 아니다. 가슴에 박혀있던 어둠과 비련이 쏟아져 나오는 짠물이다.


자신은 왜 하필 식민지에서, 여자의 등에 기생이나 하며 사는 비굴한 풍각쟁이의 아들로 태어났는지. 발버둥을 치며 어떤 선택을 해봤자, 인위적으로 만든 불합리를 벗어 날 수 없는 부족한 존재가 인간이라면. 죽어서야 갈 수 있는 천국을 미리 지향하며, 살아서 빈 무덤을 만들어 놓고, 미리 죽은 채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언뜻 고약해 뵈는 이 가사는 약한 자의 슬픔이다. 엄마 젖을 더 먹고 싶은데, 젖이 없어서 빼-액질 하던 동순이처럼. 오빠처럼 뛰고 싶은데 아직 잘 걷지도 못해 넘어져서 빼-액 우는 내 동생 동순이처럼. 나도 사랑받고 싶은데 받지 못하고, 멋들어지게 사랑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게 서러운 약한 존재라서 우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서러울 때마다 일단 우는 것이다. 울다가 울다가 씻기 우는 것이다. 제 감정 하나도 사적으로 남기지 않고 다 씻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노래다. 아리랑의 한은 그래서 깨끗하다.


영감이 거기까지 치솟았을 때에 하나의 선율이 들어왔다.    


소금의 청아함을 부드럽게 타고 안는 바이올린 소리. 동길이 눈을 떠 보니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태주다.


 어느새 건물의 창가에는 신학생들과 수도자들까지 모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들은 동길의 소금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주는. 수도원 마당에서 홀로 울고 있는 친구를 향해 직접 걸어와 바이올린으로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 냈다. 하필 또 왜 이 녀석인지.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태주가 동길의 심정을 완전히 알아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태주가 가진 악기는 동길이와 같은 음색을 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함께 해 주었다. 태주가 받아 주었다. 동길이 쏟아내던 열등감을. 던져대던 미움을. 다시 한번. 또.   그릇이 큰 녀석이 고마워졌다. 

  

두 친구의 연주 소리가 멈추었을 때, 사람들이 수도원의 벽에 대고 손뼉을 쳤다. 환호 소리가 박수와 함께 울려 퍼졌다. 아무도 꾸짖지 않았다. 규칙을 어기고, 타인의 수도 생활을 방해한 수련자를 질타하지 않았다. 소금이 주도하고 바이올린이 받침을 해주는 이 새로운 연주가 놀라운 창조를 이루어 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한 번 더?”    


태주가 구김살 없는 웃음을 보내니, 동길의 마음도 완전히 풀리고 만다. 너를 버리고 싶어 했을까? 왜 없는 존재이기를 바랐을까? 미안해진다. 김동길은 자신도 이 수도원에 없어도 되는 존재처럼 여겨질까 봐 무서워 한 밤중에 소금으로 빼-액 질이라도 해야 했으면서.    


숨길 수 없는 구차한 그 마음을 다 보고서도 태주는 여전히 구김살 없이 빛나는 미소로 동길을 받아 준다. 동길도 다시 소금을 분다.


이번엔 다른 가락이다. 이제부터 뽑는 음색은 비장하지 않다. 고맙고 풍부해진 마음이다.


태주의 바이올린이 동길의 가락을 날렵하게 따라온다. 밤하늘을 찢어 버릴 듯 치솟던 그 소리는 이제, 어둠 속에서도 응답하는 무수한 별빛들의 떨림처럼, 마음을 밝힌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한다.    



저 혼자 비참의 굴을 파고들어 가는 친구를 보고서는 조용히 빛을 비춰주는 형제들. 주위에 멋지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함께 해 주는 것만으로도 꼬인 것이 풀리고, 슬픈 것이 가신다. 다시 한번 동그래진 마음으로 연주에 몰두하다가 문득, 동길은 소름이 돋는다.    


숨을 곳이 없는 사이!

태주가 가지고 있지만 동길에겐 없는 건. 

숨길 곳이 없는 마음은 펼치면 된다는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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